소설리스트

프로페서-321화 (321/500)

적과의 동침 (2)

민우의 반론은 단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구성을 갖췄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곳을 찌르고 들어온 김명현과는 애초에 궤가 달랐던 것.

무엇보다도 각본가인 소민정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함께 각본을 작업한 한정현과 소민정에게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민우의 말을 들은 소민정 작가의 표정이 환해졌다.

“맞아요. 휴먼 다큐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인물의 인생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캐릭터를 짰어요. 에피소드도 그렇고요.”

“감독님은 어떠셨어요?”

이번엔 민우가 한정현 감독에게 물었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소신껏 말했다.

“아무래도 박 교수께서 말씀해 주신 그런 특징 같은 것들이 성장물의 기본이기도 하지요. 감정 과잉이라는 김명현 씨의 의견에도 공감합니다마는…… 이건 드라마예요. 애초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다면 게임이 안 되는 겁니다. 박 교수님이 말씀하신 ‘역동성’이란, 바꿔 말하면 드라마성이거든요.”

딱 원하는 반응이 나왔다, 그런 느낌이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정현 감독의 말에 공감했다.

생각보다 김명현은 자신의 의견을 금방 철회했다.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더는 이견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분위기에 균열이 가자 한정현 감독이 봉합을 시도했다.

“그래도 명현 씨의 의견은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독자의 일반적인 인식이란 것도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맞습니다. 작중 인물이 명인대 출신이니, 어느 정도 엘리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과하지 않은 정도로.”

민우도 거들었다.

김명현은 다소 의외라는 듯, 그런 흥미로운 눈빛으로 민우를 관찰하고 있다. 민우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대놓고 마주 보진 않았다.

한정현 감독이 정리했다.

“그럼 그런 느낌으로 오늘 오디션을 진행해야겠군요. 아무래도 주인공을 잘못 고르면 각본과 연출이 아무리 좋아도 드라마는 망할 수밖에 없으니까. 음, 좋습니다.”

“절충안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대중이 원하는 것도 보여 줘야지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명이랑 조감독이 묵직하게 한마디 꺼냈다.

“그래야지. 백 회장님이 오랜만에 출자해 주신 작품인데 망하면 큰일 나. 저예산 영화는 좀 그만 찍고 싶다. 뭐, 좋습니다! 그럼 주인공은 박 교수님과 명현 씨의 의견을 수렴해서 채점 포인트를 잡도록 하지요.”

이후로 주연급 배역들의 채점 포인트가 하나둘 마련되기 시작했다.

김명현은 사사건건 민우와 대립했다.

“송승희 역은 따로 피드백이 없습니다. 여리면서도 강인한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가 아주 잘 잡혀 있어요. 아마 실제 인물이신 송승현 이사님이 보신다면 소름 돋는다고 한 말씀 하실 정도로요.”

민우가 이렇게 코멘트를 하면.

“아뇨. 송승희 역은 좀 다르게 접근해야죠. 작중 내에서도 그렇고 자서전에서도 매우 비중 있는 인물이니까 말이죠. 서다훈 교수와의 로맨스를 좀 더 많이 다루는 게 어떨는지. 대중이 원하는 것은 애틋하면서도 감미로운 로맨스입니다.”

김명현은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로맨스를 늘리자는 코멘트는 제작팀 입장에서도 수용하기 쉬운 조건이었다. 오히려 여성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코드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 부분에서는 작가인 소민정도 긍정적인 코멘트를 남겼다.

“로맨스 부분은 좀 강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저도 했었어요. 명현 님 말씀대로 좀 더 분량을 늘려보는 방향으로 해볼게요.”

한번 오케이 사인이 나자 김명현은 더욱 적극적으로 제안을 쏟아냈다.

“서강찬 역은 세속적으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주인공이 고고한 학자의 이미지라면, 거기에 분명히 대립되는 느낌으로 투입하는 게 옳아 보입니다. 나중에 깨달음을 얻어 전향하는 전개가 좋겠군요.”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캐릭터 성향을 아예 바꿔버리면, 이후 분량을 다 들어내야 할 수도 있는데…….”

“어차피 뼈대는 나온 상황 아닙니까. 수정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런 식의 향후 전개를 아예 틀어버리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한정현 감독이야 워낙 이런 일이 많으니 그렇다 쳐도, 소민정 작가는 꽤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오죽하면 곤란하다고 했을까.

아무래도 자신의 작품이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들어 불편했을 것이다.

김명현을 빤히 바라보던 민우는 그제야 파악이 끝났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평가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가치평가다.

김명현은 모든 조언을 ‘상업성’과 연관 지어서 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돈 되는 연출’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교육도 비즈니스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닐 정도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음, 좋습니다. 이 정도로 마무리하도록 할까요. 주연 배우에 대해서는 채점 방향이 모두 잡혔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괜히 이래저래 나댄 것 같아 송구하네요.”

응. 나댄 거 맞아.

민우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마디 던졌다.

“그래도 명현 씨가 조언을 아끼지 않아서 그런지 이야기가 풍성하게 오간 것 같네요.”

“그렇게 봐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소감은 어떠십니까? 일기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 이야기를 재구성해 만든 각본인데요.”

“신기한 느낌이죠. 이렇게 각본 회의에 들어온 것도 처음인데, 뭔가 제 스토리를 놓고 이야기를 하니 더 어색하기도 하고요.”

“좋은 경험이 됐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민우는 아까 김명현이 했던 말 중 한 대목을 떠올렸다.

송승희 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서전 내용을 언급했었다. 이 사람, 자서전을 완독하기라도 한 건가.

특별하다고는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의외이기는 했다.

하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도 있으니까. 본격적으로 견제를 하기 전에 참고용으로 완독했을 가능성도 있지.

김명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한정현 감독과 소민정 작가가 뭔가 상의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명이랑 조감독도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상황.

결국 회의실에는 민우와 김명현 둘만 남았다.

많이 불편할 만도 한데, 민우는 일부러 의식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더욱 불편해질 것이 분명하니까.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작성하고 있던 논문을 불러왔다.

“쉴 틈이 없으시군요. 그새 논문 작업을 하시는 겁니까.”

김명현이 물었다. 민우는 살짝 웃었다.

“주말 내내 잘 쉬었으니 이제 일해야죠. 원래 틈틈이 딴짓을 잘하는 타입이라서.”

“그러고 보니 최근 학회에서 이사직을 받으신 거 같더군요. 민영환 교수님이 계신 학회였나요?”

“잘 알고 계시네요.”

“개인적으로 흥미가 가는 분이라서 박 교수님 소식은 평소에도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민영환 교수가 현대문학연구학회 회장으로 취임하며 임원진을 대폭 교체했다. 관련 소식이 기관지에 실렸는데, 그걸 본 모양이다.

민우가 제언했다.

“학회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군요. 명현 씨는 교육 전문가이시기도 하니까요. 사실 대학에서 연구와 학회 활동도 중요한 교육 활동이 아니겠습니까.”

“음,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정석적인 쪽이라서. 이를테면 커리큘럼이나 프로그램 같은 것들. 그래서 학회엔 크게 관심은 없지요.”

“그러시군요.”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뚝 끊겼다.

민우는 간간이 타이핑을 하며 논문 작업에 착수했고, 김명현은 삐딱하게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명이랑 조감독이 도시락이 담긴 봉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시장하시죠? 오후에 바로 오디션 있으니까 식사 먼저 하시고 좀 쉬고 계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감독님하고 작가님은요?”

민우가 물었다.

두 사람은 회의가 끝난 직후 회의실을 나서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각본 수정하고 계실 겁니다. 보통 이렇게 회의하고 나면 바로 수정 작업하시거든요.”

“점심도 안 드시고?”

“뭐, 워낙 바이오리듬이 불규칙한 분들이라서. 아점과 점저는 예삿일입니다. 저는 밖에서 스탭들하고 같이 먹겠습니다. 편하게 계십쇼.”

“네.”

명이랑이 문을 닫고 나가자 짙은 적막이 깔렸다. 먼저 적막을 깬 것은 민우였다. 민우는 봉지에 담긴 도시락을 하나 꺼냈다.

“명현 씨는 안 드십니까?”

“아, 저는 도시락은 취향이 아니라서. 괜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박 교수님 불편하실 테니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맛있게 드시길.”

김명현이 회의실을 나섰다. 민우는 신경을 끄고 도시락을 열었다.

먹음직스런 제육볶음이 담긴 맛있는 도시락이었다.

***

점심 식사가 끝난 오후, 스튜디오는 오디션 준비로 분주하게 돌아갔다.

지원 배우들이 속속 도착했다.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 안면이 있는지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허윤 같은 톱스타가 오니 악수를 하거나 사진을 찍으며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민우는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

“박 교수님. 뭘 그리 보고 계십니까?”

한정현 감독이 다가왔다.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그냥 배우들이 모인 걸 처음 봐서 그런지 신기해서요. 다들 긴장한 게 눈에 보이네요. 다들 이런 쪽으로는 프로들일 텐데.”

“선생님도 강단에 서기 직전에는 떨리실 텐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도 대학에 강의를 나가보기도 했고, 뭐 아는 사람들 중에 교수들은 부지기수로 많으니까요. 한결같이 하는 소리가 ‘긴장된다’였죠.”

한정현 감독이 민우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무대 한쪽에 심사위원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의자는 네 개다. 감독과 조감독이 한 자리씩 차지했고, 나머지는 민우와 김명현의 자리였다.

사실 고문의 입장에서 배역 캐스팅까지 참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한정현 감독은 자주 ‘백 회장’을 언급하며 그를 챙겼다.

새삼스레 투자자의 힘이 대단하다는 게 체감되었다.

잠시 후 명이랑 조감독이 배우들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에 나타나 공지했다.

“10분 뒤에 오디션 시작합니다. 우선 주인공 박진수 역부터 시작할 거니까, 지원하신 분들은 다들 준비하세요.”

“네!”

현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무대는 소극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작았다. 관객석도 50여 석이 채 되지 않은 곳인데, 오히려 그래서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무대 위쪽에서는 조명이 조절되고 있었고, 스탭들이 분주히 오가며 필요한 물품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민우는 조용히 앉아 모든 것들을 차분히 관찰하고 있었다.

“교수님.”

민우가 고개를 돌리자 명이랑 조감독이 인쇄물과 볼펜 하나를 건넸다.

“채점표입니다. 항목별로 점수 기입하시면 되고요. 오디션이 끝난 이후에 종합 평가를 하는데 그때 상세 코멘트 해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거, 비전문가인 제가 해도 되는지 걱정이네요.”

“오히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전문가가 아닐까요? 교수님 본인 이야기잖습니까.”

멋쩍게 웃은 민우는 인쇄물과 볼펜을 받아들고 자리에 바르게 착석했다. 곧 조명이 어두워지고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지금부터 <프로페서> 공개 오디션을 시작합니다. 지원자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오세요.”

공지가 떴고, 대기실에 있던 배우들이 하나둘 들어와 관객석에 착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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