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20화 (320/500)

적과의 동침 (1)

민우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이곳에서 전혀 볼 일이 없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순간 자신을 미행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놀라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못 올 곳에라도 온 듯한 표정이신데.”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조금 놀라서요. 여기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

“오늘은 비즈니스 차 왔습니다. 아마 박 교수님과 같은 용건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씨익 웃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명현이었다. 명인대 교육개발실에서 일하고 있는 그가 대체 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그것도 민우와 같은 목적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저와 같은 용건이라면, 드라마 오디션에 참석한다는 말씀인가요?”

“음, 정확히는 사전 미팅이라고 할까요. 박 교수님이 일찍 오신 이유도 그거 때문 아닙니까? 제작사 미팅.”

“맞습니다.”

“저도 <프로페서> 드라마의 자문 역을 맡아서 말이죠. 대학이 배경인 드라마가 아닙니까? 교육 전문가가 필요한 장면들이 많지요. 거기에 적절히 조언을 해주는 게 제 역할입니다. 투자사의 대리이기도 하고.”

“그러시군요.”

“불청객처럼 느껴지시나 봅니다?”

그렇게 말한 김명현이 안경을 고쳐 쓰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다소 의외라는 듯 김명현이 악수를 받았다.

“불청객이라뇨. 투자사 대리에 자문 역이라면 제작에 꼭 필요한 역할이겠지요. 당분간은 같이 일하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김명현 씨.”

“저야말로.”

“그럼 들어가실까요? 다들 기다리실 것 같은데요.”

“그러시지요.”

두 사람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로비에 들어서자 사원증을 목에 건 젊은 남자가 이쪽을 주목했다.

민우는 유명인이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달려왔다.

“실례합니다. 박민우 교수님 맞으시죠?”

“예.”

“미팅 장소는 이쪽입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쪽 분은…….”

“김명현입니다.”

“아! 김 선생님. 마침 같이 오셨군요. 명인대에서 바로 오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바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두 사람은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배역 오디션은 오늘 오후에 진행된다. 지금은 오전 시간인데, 사전 미팅을 위해 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다.

한정현 감독에게 듣기론 각본과 오디션 채점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니 세 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중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정현 감독이었다.

“오, 박민우 교수님!”

“안녕하세요?”

국내 드라마계의 신성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라 민우도 바로 알아보았다. 젊은 나이만큼 파격적인 연출을 즐겨 쓰는 감독이었다.

한정현 감독이 다가오더니 민우를 꽉 끌어안았다.

“하하하. 반갑습니다.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네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민우의 어깨를 다독인 한정현 감독은 이번엔 김명현을 주목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명현 씨. 그간 별일 없으셨죠?”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다행이군요.”

한정현 감독은 민우와 포옹한 것과 대조되게 김명현과 정중히 악수했다.

사람에 따라 인사 방법이 다른 건 좀 독특했다. 매스컴에서의 이미지와 상당히 흡사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느낌.

쾌활하면서도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무림 고수 느낌이 났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이름이 적힌 의자에 앉으시면 됩니다.”

“예.”

민우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묵례로 인사한 다음, 자신의 이름이 써진 곳으로 가서 앉았다. 한정현 감독 좌우로 자리가 비었는데 민우는 좌측이었다.

자연스레 김명현도 우측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덕분에 묘하게 대립하는 구도가 완성되었다.

운명의 장난일까.

민우와 김명현은 자리에 앉은 채 서로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한정현 감독이 조심스레 김명현에게 물었다.

“백 회장님은 잘 계시지요?”

“예. 덕분에. 이번 드라마도 잘 부탁드린다는 전언입니다.”

“이거 원. 하하하. 한번은 현장에 나와주시면 좋을 텐데 말이죠.”

“워낙 바쁘시니까요. 양해를.”

“양해랄 게 뭐 있겠습니까? 백 회장님 바쁜 거야 대한민국 사람들 다 아는 건데. 다음에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김명현은 투자사 대리로 참석해서 그런지 감독이나 스탭들의 호응이 좋았다.

그 기세를 몰아 김명현은 여유롭게 웃으며 민우를 응시했다.

‘이것 봐라?’

하지만 민우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책상에 놓인 프린트물을 읽어보고 있었다. 전혀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때 한정현 감독이 민우와 김명현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두 분은 서로 잘 알고 계시지요? 같은 명인대에서 일하는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두 분 다 열정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계시다던데.”

“글쎄요. 명현 씨와는 실제로 한두 번 정도 뵌 것 같네요.”

민우가 심심하게 대답하자, 한정현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뭔가 미묘한데요. 서로 잘 모르십니까?”

“저도 이름 정도만 들었습니다. 며칠 전엔 박 교수님 강의도 처음으로 들어보았지요. 청강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김명현이 대답했다. 평범한 웃음이었지만, 사정을 아는 민우에게는 썩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묘한 기류가 회의실로 밀려왔다.

한정현 감독이 뭔가 알아챘는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셨군요. 저는 두 분이 서로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해서 특별히 초빙한 거였는데. 하하하. 이거 죄송하게 됐군요. 그래도 이번 기회에 서로 가까워지시면 되겠습니다. 이것도 인연 아니겠습니까?”

한정현 감독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서로를 향한 미적지근한 태도만으로도 관계가 썩 좋지는 않다는 걸 바로 캐치한 모양이다. 이렇게 급하게 수습하는 걸 보니까.

내부 사정을 전혀 모르고 섭외한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건 비즈니스인데.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로비에서 대충 인사는 나눴습니다. 자, 시간이 촉박할 거 같은데 진행하시죠.”

한정현 감독이 박수를 몇 번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좋습니다. 그럼 미팅을 시작해볼까요. 우선 소개를 좀 해야겠는데. 이쪽은 조감독인 명이랑 씨.”

“안녕하십니까.”

“저와 예전부터 함께 작업한 친구입니다. 성실하고 믿음직스럽죠. 제가 없을 땐 이랑 씨랑 함께하시면 됩니다.”

나름 ‘랑’으로 라임을 살려 개그를 친 것 같은데, 서먹한 분위기가 쉽사리 해소되지 못했다.

민우와 김명현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신경 쓰지 않고 명이랑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눈인사를 나눴다.

30대 중반 정도 되는 남자였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일을 상당히 잘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쪽은 각본가 소민정 씨.”

“안녕하세요. 소민정입니다.”

둥글둥글한 얼굴이 선해 보였지만, 손에 남아 있는 굳은살에서 작가로서의 프라이드가 느껴졌다. 민우는 꾸벅 인사했다.

“이번 각본 집필을 맡았는데, 민정 씨는 신인이긴 하지만 역량이 출중해서 눈여겨보던 작가입니다. 이번에 시기가 맞아서 같이 작업하게 됐죠.”

소개가 모두 끝나자 명이랑 조감독이 잘 제본된 각본을 한 부씩 돌렸다. 배부가 끝나자 한정현 감독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으흠, 오늘 일찍 오시라고 한 건 각본을 좀 점검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배우 오디션 채점 기준을 좀 세워볼 건데요. 물론 감독인 제가 생각해 둔 구상은 있지만, 여기 계신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이라면 으레 고집불통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것으로 많이들 그려지지만, 한정현 감독은 신중한 구석도 있었다.

“다들 각본을 읽은 느낌이 어떠셨는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아마 소민정 씨 본인도 많이 궁금할 겁니다. 소설도 아니고 자서전을 각색한 건 희귀한 일이니까요.”

한정현 감독은 신인 각본가와 작업하는 것을 굉장히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거기에 개성 넘치는 연출이 더해지니 신선하다는 평가가 많다.

지음사에서 선샤인 프로덕션과 계약한 것도 바로 한정현 감독을 섭외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민우가 손을 슬쩍 들었다.

“박 교수님. 말씀하시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아주 좋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민우 쪽을 향했다. 민우가 자신 있게 설명을 이어갔다.

“제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더군요. 자서전이 베이스라는 정보를 접하지 못하면 새로운 이야기처럼 느껴질 겁니다. 오리지널리티가 충분히 있었어요. 특히 캐릭터의 변주가 좋았습니다.”

“감사해요.”

소민정 작가는 표정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다. 담백하게 고맙다는 말만 꺼냈다.

명이랑 조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박민우 교수라는 완성된 이미지에 침잠되지 않고 어떤 새로운 느낌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바로 정면에서 반론이 튀어나왔다.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캐릭터라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지 않을지…….”

그렇게 운을 뗀 건 김명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당황하는 척한 그가 손을 내저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교육 관련 자문이니, 대본 피드백은 월권이겠군요.”

“아뇨. 아닙니다! 각본을 다 읽어주셨다면 한 말씀 정도는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지 소 작가?”

“네. 괜찮아요. 편하게 부탁드립니다. 피드백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받는 게 좋으니까요.”

한정현 감독이 허락하고 나서야 김명현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는 박 교수님과는 다르게, 오히려 캐릭터 설계가 조금 잘못된 게 아닐까 하고 느꼈습니다. 대본 속에서의 주인공은 지나치게 역동적이에요. 바꿔 말하면 감정 과잉이죠.”

가장 긴장하고 있는 것은 소민정 작가였다.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오히려 교수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려면, 신선함이나 어떤 역동적인 느낌보다는 지적이며 단정한 학구적인 이미지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자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있다 보니 그렇게 느껴진 것 같은데, 이는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시청자들은 익숙한 걸 좋아합니다. 선입견을 잘 활용해야 하죠. <프로페서>라는 제목이 주는 무게감도 그렇습니다. 요컨대 주연은 엘리트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편이 훨씬 낫다 이거죠. 모던하면서도 근사한 컨셉으로.”

“으음, 그렇군요. 과연 미국 유학파다운 말씀입니다. 하하하.”

“…….”

팔짱을 낀 민우는 김명현이 꺼낸 발언을 곱씹었다. 무리해서 트집을 잡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었다.

“과연 그럴까요?”

민우는 김명현의 발언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격에 나섰다.

“저는 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접근 방식을 좀 다르게 해서요. 이 드라마는 대학원생의 성공기를 다룬 게 아니거든요.”

“그럼 뭡니까? 대학원생이 소꿉놀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텐데 말이죠.”

의도적인 도발이었으나, 민우는 씨익 웃고 넘겼다.

“이 드라마는 학문을 하는 사람의 성공기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입니다. 인생을 표현하는 데 MSG가 필요한가요? 진솔함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되어야 하지요. 당차고 솔직하지만, 때로는 좌절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게 좋습니다.”

모두가 민우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민우는 소민정 작가를 바라보았다.

“아마 소 작가님께서도 그런 걸 의식해서 각본을 쓰신 것 같은데…… 아닙니까?”

민우의 질문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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