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5)
저녁 식사는 물론 디저트까지 모두 맛있게 먹은 허윤과 이소윤은 차가 끊기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민우는 개수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꼈다.
그래도 손님이 두 명밖에 없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설거짓거리는 적었다.
거실을 정돈하던 이수빈이 주방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오빠. 그냥 놔두지. 오늘은 내가 설거지 당번이잖아.”
“괜찮아. 심심해서 그래.”
“심심해서 설거지를 한다고? 심심하면 늘 책이나 붙들고 있던 양반이 웬일이래?”
“그냥.”
민우는 싱겁게 대꾸하곤 설거지를 시작했다. 잠시 후 거실 정돈을 모두 마친 이수빈이 개수대 옆에 섰다.
그리곤 신혼 때처럼, 민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 오빠가 부럽다.”
“갑자기?”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제자들이 계속 늘어나는 거 같아서. 소윤이 오늘 보니까 싹수가 제법이더라고.”
“그렇긴 하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수빈의 안목은 정확하다.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진짜 환자를 생각하는 그런 의사가 될 거 같아. 물론, 현실에 치이다 보면 초심을 잃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은근히 내면도 강해 보이기도 하고요. 10년 후가 기대되는 사람이랄까.”
아까 다과를 나누며 이수빈은 이소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 때의 주인공이 허윤이었다면, 다과에서는 이소윤이 주인공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소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편히 터놓을 수 있게 됐다.
민우의 강의를 청강하게 된 이유부터 시작해서, 왜 인간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까지.
그녀가 쓰는 언어는 당연히 전공자인 민우와 이수빈이 바라보기에 조악하긴 했지만,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어서 뜻깊었다.
“다음에 또 초대하고 싶어. 오늘 너무 일찍 자리를 파한 거 같아서 아쉽네.”
“윤이 오디션 합격하면 겸사겸사 모이면 되겠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설거지를 모두 마치고 주방 정리까지 마무리한 민우는, 간단히 씻은 다음 안방으로 들어왔다. 이수빈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윤아는?”
“방금 잠들었어요.”
민우는 핸드폰을 방해 금지 모드로 전환시킨 다음, 이수빈의 옆에 누웠다.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수빈이 민우의 몸을 껴안았다.
“별다른 연락은 없어요?”
“무슨 연락?”
“전에 김명현이라는 사람이 선전포고하고 갔다면서요. 그 이후로는 왠지 조용한 것 같아서.”
조용한 게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현상이 눈에 보이면 대책이라도 마련할 텐데, 지금은 워낙 조용했으니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우가 답했다.
“학교에서 나를 어떻게 하려고 그런 짓을 벌이는 건 아닐 거야.”
“그럼요?”
“유치한 장난은 그렇게 효과가 없거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지.”
민우는 옆에 놔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인터넷 기사를 띄워 수빈에게 보여주었다.
기사를 바라보던 수빈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거…….”
“역풍이 불기 시작했어. 교양학부장이 어떤 생각으로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거든.”
이야기를 들으며 이수빈은 다시 처음으로 올라와 기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 때아닌 ‘자격 논란’
― 강의에서 배제된 박민우 교수
― 효율과 수익만 강조하는 현장을 비판하는 목소리 커져
헤드라인부터 명인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가 양산되고 있었다.
물론 학계 기사라 이슈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댓글에서도 대학 당국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기사와 댓글 반응을 모두 살핀 이수빈이 핸드폰을 넘겼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여론이 우리 편인 것 같아서요.”
“글쎄. 적어도 그쪽 사람들은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을 거야. 미국에서 공부한 수재가 모를 리 없지.”
“그런데도 강행했다는 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야. 아직은 그게 뭔지 모르겠어. 이슈를 만들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내 멘탈을 공격하려는 건지.”
민우는 눈을 감았다.
이수빈의 보드라운 손이 민우의 몸을 달래듯 쓸어 만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어떻게든 잘되겠지. 전에는 몰라도 이번에는 혼자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래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거야. 혼자 싸울 때야 나 하나 다치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도 다칠 수 있는 상황이니까.”
“오빠.”
순간 민우의 뇌리에 정연주의 활기찬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으로서 가장 걱정되는 사람.
민우는 괜히 불똥이 튀어, 연주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다른 팀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게 걱정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냥 기우였으면 좋겠다.”
“나도요.”
“잘자.”
“오빠도.”
민우는 다시 눈을 떴다.
밤이 깊어질수록 민우의 생각도 점점 깊어져 갔다.
***
다음 날, 민우는 연구실로 출근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람이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바로 서지훈 교수였다. 그는 차민재가 준비해 준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선생님.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어, 왔냐?”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서지훈 교수 앞에 앉았다. 서지훈 교수 앞의 테이블엔 신문이 놓여 있다.
신문은 밖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자신은 연구실로 신문을 배달시키지 않으니까.
서지훈 교수가 신문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뉴스, 봤냐?”
“아. 예. 봤습니다.”
민우는 신문을 쥐고 헤드라인을 살폈다. 어제 핸드폰을 봤던 기사와 비슷한 것이 신문에 실려 있었다.
“인터넷에서도 비슷한 기사가 올라왔어요. 댓글까지 다 확인했고요.”
“감상은?”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역시.”
서지훈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 세력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다 걸려 넘어졌다고 좋아할 만한 상황은 결코 아니다.
“인문대 교수회에서 우려를 표명했지만, 교양학부에서는 이번 프로그램을 강행할 거라고 하더구나. 놈들이 독하게 마음먹고 나왔다는 증거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냥 가만히 있어. 지금은 관망할 때야. 괜히 기선을 잡겠다고 설치다간 함정에 빠질 수도 있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머니티 프로젝트는 그럼 속행해도 되는 걸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게 문제란 말이지.”
서지훈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커피를 후룩 마셨다. 잠시 후 다시 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놈들이 지저분하게 나오지 않을 거라는 낙관론만 펼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너희 프로젝트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역시, 청문대 쪽 자본 유입 의혹을 걱정하고 계시는 거죠?”
“아무래도 그렇지. 사회적으로 문제는 되지 않아도, 어쨌든 너희는 명인대 교수 신분이 있잖아. 이수빈, 한진섭, 주예린 선생도 마찬가지고. 백성웅 총장이 총장실까지 불러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경고로 끝나진 않을 거야.”
“그래도 저는 강행하겠습니다.”
민우가 당당히 말했고, 서지훈 교수는 잠시 입을 닫고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심인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이야?”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는 정면으로 돌파하겠습니다.”
“믿는 구석은 있는 거냐?”
“왠지 제가 이렇게 고민하게 만드는 게 그들의 목적인 것 같거든요. 제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든 술책이라고 할까요. 그렇다면 거기에 빠져들어선 곤란하겠죠. 팀원들이 바라는 일도 아니고요.”
그것이, 밤새 고민한 민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서지훈 교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럼 우리도 엄호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찾아보마.”
“우리라고 하시면…….”
“나도 그렇지만 민 선생님도 아주 벼르고 계시거든. 교양도 없는 교양학부 놈들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몰라본다고.”
“의외네요. 민 선생님, 원래 이런 복잡한 일에는 관여를 잘 안 하실 텐데.”
“정년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럴걸?”
“하하하하.”
“그럼 오늘도 수고해라!”
서지훈 교수가 밖으로 나갔다.
책상으로 돌아온 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홰홰 젓고는 어제 쓰다 만 논문 파일을 불러왔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민우는 쓰다 만 원고의 뒤를 잇기 시작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연구실을 울렸다.
***
3월 23일 토요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물론 그것은 허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민우는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를 먹고 여유롭게 외출 준비를 했다.
김태현과 김명현 형제 일은 오히려 민우에게 더욱 큰 자극제가 되고 있었다.
민우는 여전히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수빈은 그런 민우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긴장돼요?”
“내가 연기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긴장을 해?”
“그러면 기대? 이수연 역에 도전하는 지원자들 미모가 장난 아닐 거 같은데. 고증이 철저하게 들어갔다고 하던걸?”
이수연은 드라마 <프로페서>의 주인공 아내 역이다. 즉 실제 모델이 이수빈인 것이다. 고증이라는 것은 자신의 미모를 두고 하는 말이고.
민우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고개를 가로젓기도 하면서.
“아니, 그렇게 대놓고 웃는다고?”
“현실이 어떤지 궁금하면 같이 가든가. 감독님이 참관하러 와도 상관없다 그랬어.”
“오늘은 윤아랑 친정 다녀올 거예요.”
“자고 와?”
민우의 물음엔 약간의 기대심이 묻어 있었다. 이수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자고 오길 바라는 사람 같은데?”
“아니…… 그, 뭐냐. 오늘 갔다 바로 오는 거면 이따 밤에 데리러 가려고 그랬지.”
“자고 올 거예요. 오디션 후에 뒤풀이 같은 거 하지 않으려나?”
“글쎄. 난 잘 모르지.”
“오늘은 푹 쉬어요. 전에 민재가 그러더만. 박 선생님 요즘 너무 피곤해하시는 거 같아서 걱정이라고. 선생님 대학원 시절에 쓰러진 거 엄청 유명하다나 뭐라나.”
“민재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
“그럼요. 누가 들으면 내가 집에서 바가지라도 긁는 줄 알겠어. 그러니까 특별 휴가라고 생각하고 푹 쉬어요. 나도 친정 가서 좀 드러눕다 올 테니까.”
“오케이!”
민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길가에 고급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레아에게 신세 지기로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식사는 했어요?”
“그럼요. 참, 오다가 미국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제임스 사장님이 다음 주쯤 한국에 오신다고 하네요. 혹시 들으셨나요?”
“전혀요. 제임스 씨가 왜요?”
“주예린 작가님께서 미팅 좀 하자고 하셨다나 봐요. 그래서 급하게 항공편을 알아보셨대요.”
짐작 가는 일은 있다.
일전에 팀 307호 회합 때 주예린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으니까. 글로벌 출판사의 사장이 직접 움직일 정도라니, 새삼스레 주예린이 대단해 보였다.
아니면 진짜 차기작 계약이라도 걸어 놓은 건가?
“오랜만에 시끄러워지겠는데요.”
“그럼요. 저도 사장님께 할 말이 아주 많으니까요.”
“아직도 화가 난 모양이네요.”
“저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죠.”
아무래도 레아는 제임스 사장에게 삐쳐있는 것 같았다. 하긴, 민우에게 고지도 안 하고 부하직원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차가 조용히 출발했다.
약 한 시간 후, 민우는 드라마 오디션이 열리는 선샤인 프로덕션의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오늘은 기다리지 말고 들어가서 일 보세요. 늦어질 거 같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인사드릴게요.”
“운전 조심하시고.”
차에서 내린 민우는 스튜디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
다른 의미로 가슴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오, 박 교수님 아니십니까.”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