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4)
“아는 분이셨어요?”
이소윤이 물었다. 다소 늦게 강의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민우는 오늘도 이소윤과 같이 복도를 걸었다.
“아는 사람은 아니고, 앞으로 알게 될 사람.”
“묘한 표현이네요.”
“그렇게 느꼈다면 제대로 느낀 거고.”
그때 복도 맞은편에서 이수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민우와 이소윤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좀 더 빠르게 옮겼다.
“이제 강의 끝났어요? 좀 늦었네.”
“손님이 찾아와서.”
“손님이요?”
“김명현 씨. 기억나지? 전에 서지훈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바로 그 사람.”
순간 이수빈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옆에 학생이 있는 것을 보곤 표정을 다시 풀었다.
“재미있네요. 설마 청강이라도 하려고 들어온 건 아니죠?”
“맞아. 오늘만 청강하겠다고 하더라.”
“하, 배짱 한번 좋네.”
“앞으로 자주 볼 테니 통성명이 필요했겠지.”
민우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상대방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그때 이수빈이 시선을 돌려 이소윤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나네요. 이소윤 학생 맞죠? 박민우 선생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멋진 예비 의사 선생님이 있다고.”
“아, 안녕하세요.”
이수빈의 장황한 설명에 이소윤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이수빈은 그녀가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도록 생글 웃었다.
“박민우 교수님이 그 얘기 안 했죠?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오라는 말.”
“네?”
깜짝 놀란 이소윤이 민우와 이수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역시 얘기 안 하셨나 보네. 하여간 우리 박 교수님은 중요한 일을 이렇게 빼먹는다니까.”
“할 시간이 없었어. 이번 주 첫 강의였잖아.”
“그래요? 그럼 지금 하면 되겠네. 다음에 한번 우리 집에 놀러와요.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같이 초대할 사람 한 명 더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아, 감사합니다.”
이소윤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행히 빼는 스타일은 아닌지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봐요. 박 선생님도 강의하시느라 고생 많았어요.”
해맑게 인사한 이수빈은 교재를 품에 안은 채 강의실 쪽으로 움직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이소윤이 미소를 지었다.
“이수빈 선생님은 참 따뜻한 분 같아요.”
“어디가?”
민우가 약간 항의하는 듯한 어조로 묻자 이소윤이 풋 웃었다.
“혹시 잡혀 사시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닙니다만.”
“하하하. 그냥…… 말투 하나에도 배려심이 묻어나 있어서요. 마음씨도 따뜻하실 것 같아요. 건너 들은 것뿐인데 식사 자리에도 초대해 주시고. 보통은 그러기 쉽지 않잖아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이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제자가 저 사람 제자고, 저 사람 제자가 내 제자다. 그런 느낌으로 생활하고 있어. 아무래도 겹치는 인연들이 많다 보니까.”
“즐거울 것 같아요. 나중에 저도 그런 사람 만날 수 있겠죠? 내 환자가 그 사람 환자고, 그 사람 환자가 내 환자이기도 한 사람.”
“그 전에 국시부터 통과해야 하지 않나?”
민우의 일침에 이소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이상과 현실의 갭은 크네요…….”
***
이소윤은 이틀 후 저녁에 찾아왔다. 빈손으로 오기 뭐하다고 작은 조각 케이크를 사 왔다. 이수빈이 반갑게 맞았다.
“케이크 좋아하는데, 고마워요. 어서 들어와요. 음식 거의 다 해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바로 민우와 이수빈의 딸인 윤아였다.
하지만 그렇게 반가워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윤아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편이었다.
“안녕?”
이소윤은 자연스레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자 윤아가 경계심을 풀고 조금 더 관심을 보였다. 민우는 주방에서 음식을 도우며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먼저 나서서 상황을 해결하지 않고, 딸이 어떻게 대응할지 한번 보고 싶었다.
이소윤이 물었다.
“이름이 뭐니?”
“박윤아.”
“이름 예쁘네.”
“이모는 이름이 뭐야?”
이모 아닌데, 그렇게 중얼거린 이소윤이 싱긋 웃었다.
“이소윤.”
“소윤 이모?”
“이모 말고 언니라고 불러.”
“응. 언니!”
여전히 이소윤은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고 있다.
그녀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낯가림이 심한 윤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소윤은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을 하나 꺼내 들이밀었다.
“사탕 먹을래?”
“응!”
“대신 저녁 먹고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엄마한테 혼날지도 몰라.”
“알았어!”
그때 민우가 감탄 섞인 어조로 한소리 했다.
“소윤이 너 소아과 전공해도 되겠다. 윤아 낯가림 심한 편인데.”
“전에 소아과 실습 갔을 때 배웠거든요. 우선 눈높이를 맞추는 거. 처음엔 잘 안 됐는데, 요즘은 나름 성공률이 높아요.”
“의사도 참 힘들겠다.”
“의사만 힘들까요. 다 힘들지.”
이소윤은 소파에 앉아 윤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현관이 열리더니 허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왔습니다! 형님, 누님!”
거실로 들어오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소윤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소윤은 톱스타인 허윤을 알아보았지만, 허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못 보던 미녀분이 계시네?”
허윤이 쓸데없이 작업을 치려 하자, 민우가 다가와 두 사람을 정식으로 인사시켰다.
“인사해. 이쪽은 명인대 의대 다니는 이소윤 학생. 수빈이가 오늘 저녁에 초대했어. 같이 저녁 먹자고.”
이소윤이 다시금 고개를 꾸벅 숙였다. 허윤은 오, 하는 탄성과 함께 씨익 웃었다.
“이쪽은 소개해주지 않아도 잘 알겠지?”
“네. TV에서 많이 봤어요.”
“그 형님이 말하던 희한한 의대생이 바로 이분이구나?”
희한한 의대생이라는 표현에 이소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그런 표현을 했던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우는 해명해야 했다.
“예전에 잠깐 너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어. 본과 4학년인데 교양 강의에 청강하러 오는 신기한 학생이 있다고.”
“그러셨구나.”
“아무튼 반가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죠. 의사 선생님 알아둬서 나쁠 거 없잖습니까? 하하하. 나중에 피부과나 성형외과 쪽으로 가시면 더 잘 부탁드립니다! 아, 치과도 좋겠지?”
“치과는 치대 가야 해서…….”
“아.”
허윤이 너스레를 떨며 악수를 청했다. 이소윤은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다들 와서 식사해요! 윤아는 손 씻고 오렴!”
곧 저녁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민우와 이수빈, 그리고 허윤과 이소윤. 마지막을 윤아가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크으~ 역시 형수님 매운갈비찜은 탑클래스라니까! 식당에서는 이런 깊은 맛을 못 내더라고요.”
“이거 시어머니께 배운 거야. 어머님이 갈비찜 굉장히 잘하시거든.”
“우리 형님 입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닌데. 맞추려면 형수님도 참 피곤하시겠습니다.”
“뭐 인마?”
“하하하하.”
이소윤은 신기한 듯 민우와 허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이수빈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아, 그냥 좀 신기해서요. TV에서 허윤 배우님이…….”
“에헤이! 허윤 배우님이라니. 너무 남 같지 않나? 오빠라고 불러요.”
그렇다고 점잔을 빼는 성격은 아니라서, 이소윤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넵. 허윤 오빠가 박 교수님하고 엄청 친하다고 말씀하신 걸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친할 줄은 몰랐어요.”
많은 사람이 민우와 허윤의 관계를 두고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허윤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어휴, 요즘은 방송에서 거짓말하면 큰일 나요. 시청자들도 눈 엄청 높아졌고, 괜히 이슈 터지면 배우 생명 끝이거든요.”
“부럽네요. 저도 이렇게 친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공부하느라 친구들 만날 시간이 별로 많지 않나 보네.”
“중학교 때부터 늘 집하고 학원만 왔다 갔다 했더니 친구는 많지 않은 편이에요.”
“그렇구나.”
허윤은 어느새 말을 놓고 말았다. 이소윤은 딱히 그 부분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연예인 친구는 어때? 요즘은 방송 플랫폼도 다양해져서 출연 기회가 많다고. 친해져서 나쁠 거 없지.”
“연예인 친구요?”
“나 말이야. 나랑 친구 하면 되잖아? 동네 오빠 정도로.”
“어…….”
갑작스런 제안에 이소윤이 말을 줄였다. 앞에 앉아 있던 민우가 타박했다.
“괜히 바쁜 사람 꾀어내지 말고 오디션 준비나 잘해 인마.”
“어휴, 형님은 잘나가시다 또 여기서 잔소리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지.”
“알겠슴다.”
그때 이소윤이 물었다.
“그런데 오빠 정도 되는 스타가 오디션도 봐요? 보통 섭외가 들어가지 않나…….”
“음, 전부 그런 건 아냐. 뭐 사전 섭외가 들어오는 경우도 많지만, 이번에는 좀 까다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거든.”
“어떤 건지 여쭤봐도 돼요?”
“<프로페서>.”
이소윤이 낮게 감탄을 흘렸다. 독서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소윤은 민우의 세계관에 감화되어 있었고 그가 낸 책은 모두 다 읽었다.
“설마 교수님 자서전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맞아. 거기 주인공 역에 도전하고 있지.”
“멋져요. 교수님도, 그리고 오빠도.”
허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야 대본대로 움직이는 배우니까 멋질 건 없는데 우리 형님이야말로 어마어마하게 멋진 분이지! 나도 형님 자서전을 다 읽긴 했지만, 막상 연기에 들어가 보니 참 속이 깊은 사람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니까?”
허윤이 흥겨운 반응을 보이자 민우가 이수빈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당신, 음식에 뭐 이상한 거 넣었어?”
“이상한 건 안 넣었는데, 왜요?”
“쟤가 이상한 이야기 하는 거 보니 음식이 상했나 싶어서.”
민우의 농담에 윤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당연히 허윤은 억울했다.
“진짜예요. 빈말이 아니라니까요? 왠지 이번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느낀 건데, 사람이 책을 읽는 이유를 알 것 같더라고요.”
“뭔데?”
국내 최고 학부의 국문과 교수가 두 명이나 있는 자리였지만, 허윤은 자신의 느낀 바를 솔직히 말했다.
“뭐라고 할까…… 대본을 통해 민우 형님의 삶을 더 잘 이해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며 배우는 게 아닐까 해요. 저는 독서가 아니라 연기라는 방식으로 민우 형님의 삶을 이해하게 된 거고.”
상기된 채로 쉴 새 없이 느낀 바를 말하는 허윤.
그를 바라보는 이소윤의 시선이 깊어졌다. 톱스타라면 으레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인데, 눈앞의 이 사람은 정말 진솔한 것 같았다.
“그런데 소윤이 너는 뭐 전공할 생각이야?”
허윤이 물었고, 잠시 멍하니 허윤을 바라보고 있던 이소윤이 살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아,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하느라. 뭐라고 하셨어요?”
“전공 뭐로 할 거냐고.”
“외과 쪽으로 할 생각이에요.”
“크~ 역시 의학의 꽃은 외과지. 그럼 흉부외과?”
이소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세부 전공은 안 정했는데요.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서 적성을 좀 살려볼 생각이에요.”
“크, 멋있다! 수술실에서 당당히 집도하는 모습이 벌써 눈앞에 선하네. 나중에 나 의학 드라마 찍을 일 있으면 취재 좀 해야겠다. 콜?”
“뭐, 그 정도야…….”
“그럼 번호 교환해야지?”
“네?”
“나 아무한테나 번호 안 알려주는데. 이번엔 특별 팬 서비스야.”
한쪽 눈을 찡긋하며 허윤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린 이소윤은, 앞에 있던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곤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