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3)
오늘도 강의를 위해 민우는 사전 준비를 마쳤다. 강의를 앞두고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는 그 어떤 휴식보다 달콤했다.
민우는 쏟아져 내려오는 봄볕을 받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그때 허윤이 말을 걸었다. 민우는 의자를 빙글 돌려 그와 마주 보았다.
“왜?”
“저 연기 괜찮은지 좀 봐주실래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 아니냐. 나는 연기 전공이 아니라고.”
“그래도 이건 형을 모델로 한 드라마잖아요. 형이랑 비슷한 모습이 투영되는지 한번 살펴봐 주세요.”
민우는 뭐라 잔소리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일단 연기를 살펴본 다음 훈계를 해주는 것도 좋겠지.
허윤이 대본을 내밀었다.
“이쪽 지문 좀 읽어주세요.”
“별걸 다 시키네.”
민우는 허윤이 지목한 부분을 살펴보았다. 깨달음을 얻은 주인공이 송승희 실장을 찾아가 인문학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민우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자서전에서 상당히 강조한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이 부분, 중요하긴 하지. 잘 찝었네.”
“저도 승부처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거든요. 표정으로 나타나는 심리 표현도 중요하고요.”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허윤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자세를 잡았다. 민우가 지문을 읽었다.
“송승희 실장의 앞에서 자신 있게 선 박진수. 박진수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송승희 실장 앞에서 설파한다.”
동시에 허윤이 연기를 시작했다. 지적인 미소를 지은 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대사를 시작했다.
“인문학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우는 내심 감탄했다.
역시 연기자는 다르다. 흐름이 이어진 게 아니라 단편적인 장면으로도 이렇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니.
하지만 민우는 허윤의 연기에서 뭔가 이질감을 느꼈다. 훌륭하긴 한데, 이게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시네. 별로였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연기 자체는 훌륭했어.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조금 위화감이 들어서.”
그렇게 말한 민우는 그 이유를 떠올려냈다. 허윤의 연기에서 위화감이 들었던 이유가.
“너는 지금 나를 연기하는 거야, 아니면 작중 인물인 박진수를 연기하는 거야?”
“당연히 형님을 연기하는 거죠. 이건 형님의 자서전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 아닙니까? 고증에 철저해야죠.”
“그게 잘못된 건 아닐까?”
“예?”
허윤은 허를 찔린 듯 눈을 부릅떴다. 반면 민우는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웃는다.
“생각해 봐. 아무리 내 자서전을 기반으로 한다고 해도, 결국 극본은 달라. 작가의 창작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실제로 주인공 성격이 좀 다르잖아? 언제나 당당한 모습만 보여주는 사이다 캐릭터지. 하지만 자서전에서의 내 모습은 약간 찌질한 면도 없잖아 있단 말이지.”
“와우, 생각보다 솔직하신데요?”
“사실을 말한 거야.”
턱을 괸 허윤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형님 말씀이 맞긴 하죠. 그래도 형님의 본모습을 벤치마킹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오히려 역효과가 아닐까. 고증도 중요하지만 대본 해석도 잘하는 게 배우들의 임무니까.”
“대본 해석이라…….”
“겉은 따라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알맹이는 따라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배우가 가진 오리지널리티가 합쳐져야 극본의 인물이 개성을 갖는다고 생각해.”
그 한마디에 허윤이 깜짝 놀랐다.
“형님. 영화 평론도 하십니까? 엄청난데요.”
“내 와이프가 현직 비평가라는 거 잊었어?”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배우의 오리지널리티가 없다면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오지 않겠죠. 배우 송강후나 최민석만 보더라도 답이 딱 나오지 않나요?”
민우는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윤은 다시 대본을 잡았다.
“이번엔 제 캐릭터를 좀 살려보겠습니다. 가시죠!”
“송승희 실장의 앞에서 자신 있게 선 박진수. 박진수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송승희 실장 앞에서 설파한다…….”
동시에 허윤이 연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표정이 조금 달랐다. 두 눈에 별이 박힌 것 같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쾌활하게 말한다.
“인문학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우는 그제야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좋은 것 같아. 역시 연기 천재라는 수식어는 과하지 않은 것 같네.”
“으음, 역시. 그런 거였군요. 저는 30대 중반의 형을 바라보면서 연구를 했어요. 하지만 작중 인물인 박진수는 20대 중후반이죠. 나이에서 오는 괴리가 있었네요.”
“그것도 있고, 오히려 쾌활한 쪽이 네 오리지널리티랑 질 맞는 거지.”
“감사해요, 형.”
“감사하면 이따 점심때 맛있는 것 좀 사라. 나랑 민재 스테미너 보충 좀 하게.”
“좋습니다. 가시죠!”
민재는 신난다며 손을 흔들었고, 민우는 피식 웃으며 짐을 챙겼다. 이제는 강의실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연습해서 이따 한번 다시 보여 줘. 기왕 열심히 하는 거 배역 따게 도와줘야지.”
“넵. 다녀오십쇼.”
밖으로 나온 민우는 복도를 걸었다.
강의실로 가는 도중 하얀 가운을 걸친 여자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소윤이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래. 오늘 좀 피곤해 보이네?”
“이렇게 교수님 수업을 듣게 된 업보라고 할까요. 어제 실습 보충이 있었거든요.”
“너무 무리하지 마. 의사가 되고 난 이후에 내 수업을 듣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때는 더 바쁠 거예요.”
하긴, 인턴 생활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고 하니까. 민우는 이소윤과 간단한 잡담을 나누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여느 때와 같이 출석을 부르던 민우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못 보던 사람이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냥 학생이었다면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을 텐데, 그는 근사한 정장을 걸친 데다가 나이도 학생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느 대학생이 정장 풀셋에 포마드 머리를 하고 강의실에 앉아 있단 말인가.
“못 보던 분이 계시네요. 저 뒤쪽에, 양복 입으신 분. 청강생인가요?”
민우가 그를 지목했다. 그러자 양복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만 교수님 강의를 청강하고 싶습니다.”
“오늘만요?”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거든요. 박민우 교수님께.”
“특이한 학생이군요. 전공과 이름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김명현입니다. 지금은 명인대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딱히 전공은 없습니다만, 미국에서 교육공학을 전공했지요.”
민우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졌다.
김명현이라는 이름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서지훈 교수가 연구실에서 해줬던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했으니까.
명인대 직원에 교육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바로 그가 맞을 거다.
“반갑습니다. 김명현 학생. 오늘만 청강한다는 게 좀 아쉽지만…… 다음에 생각나면 얼마든지 들으러 오세요.”
“직원인 제가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교육공학은 교육 활동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교육 과정을 설계, 개발, 관리, 평가하는 학문을 말한다.
게다가 그는 교육 플래너라는 다소 독특한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자신이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학생이 불편하면 강단에 설 수 없었겠지요. 저는 누구든 환영합니다. 물론 제가 허락하는 강의 정원에 한해서겠지요.”
민우가 간접적으로 지적하자, 김명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학생들은 두 사람이 연출하는 기묘한 분위기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늦기 전에 민우가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예고했던 대로 우리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계속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학문의 입문 과정에는, 그 학문이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는 부분이 있지요. 우리는 그 인식의 역사를 살펴보며…….”
유창하게 강의를 이어가는 민우의 모습을 보며, 김명현은 팔짱을 끼고 앉아 강의를 들었다.
그러다 한참 후 김명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군.’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면 모를까, 아는 상황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강의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멘탈에 전혀 타격이 없는 건가?’
김명현의 눈빛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고, 민우가 강의를 마무리했다. 강의가 종료되기까지 민우는 몇 번이나 김명현과 눈을 마주쳤지만 조금의 내색도 없이 멋지게 강의를 마무리했다.
‘난 사람은 난 사람인 모양이군.’
김명현은 씨익 웃었다. 앞으로 재미있는 게임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민우가 마이크를 가까이 댔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조금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다들 잘 따라와 줘서 고맙네요. 지각 처리 필요한 분이나 질문 있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몇몇 학생들이 앞으로 나갔고, 민우는 성실히 그들의 요구에 응해주었다. 잠시 후 민우는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소윤과 함께 돌아가지 못할 듯싶었다.
김명현이 앞문을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박민우 교수님. 역시 명성이 괜히 생긴 게 아니군요.”
김명현이 뚜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쉬운 강의, 명쾌한 딕션, 완급조절이 가능한 표현력까지. 거기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식이 더해지니…… 이거 뭐. 반칙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과찬이십니다. 명인대 선생님들께 제대로 배운 덕이죠.”
“거기에 겸손까지. 정말 흠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분인 것 같네요. 교수님은.”
마지막 말은 다소 노골적으로 배배 꼬여 있었다. 흠을 잡고 싶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민우는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이유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분께서 명인대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나설 수 없다는 건 유감입니다.”
민우가 빙긋 웃었다.
갑작스런 표정 변화에 김명현은 재밌다며 미소로 맞섰다.
“대학본부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명인대에는 저 말고도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모든 강의에 제가 참가할 수는 없는 거죠.”
“하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신 교수님께서 참여하셨다면 좀 더 좋은 강의가 되지 않으셨을까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당히 소감을 밝힌 민우가 김명현을 지나쳤다. 그리곤 잠시 멈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좋은 강의는 교수자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학생의 참여는 물론, 기관의 후원과 관심까지 더해져야 하지요.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성립됩니다. 교육공학을 전공하신 분께서 그걸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군요. 좋습니다. 박민우 교수님.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하지요. 자, 그럼.”
그 한마디를 남긴 김명현은 앞서 그랬던 것처럼 멋대로 자리를 떠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