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2)
“교양학부에서 인문학 프로그램을 신설한다고?”
뜻밖의 소식에 민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소식을 전해온 것은 국제어학원 소속 교수인 한진섭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인데?”
“정확한 소스는 없는데, 카더라에 의하면 단과대 이상의 규모인 것 같다. 일반인 대상으로 열리는 정식 커리큘럼이야.”
“이 타이밍에?”
민우의 표정에 의혹이 맺혔다. 한진섭이 바로 물었다.
“벌써 내부 기획에 들어갔다는 소문이야. 너 이야기 못 들었어?”
“전혀.”
“뭐지? 명인대에서 인문학 프로그램이라면 너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거 아예 배제당한 거 아냐?”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한진섭의 말이 맞다. 참여하고 말고를 떠나서, 초기 기획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내부적인 알력이 작동했다는 의미니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한진섭이 소식을 가져오기 전에 민우가 알았어야 한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뭐가?”
“예전에 얘기했었지? 나 총장님 면담하고 내려왔었다고.”
한진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연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민우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벌써 견제가 들어간 건 아닐까 싶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더라고. 너를 견제한다고 대학에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오히려 명인대 쪽 강좌 듣는 사람들만 줄어들겠지. 그런데 굳이?”
“명인대 네임 밸류라면 수강생 모으는 건 일도 아니야.”
“그래도 무리야. 우리도 휴머니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우리 쪽은 아예 무료니까.”
입맛이 썼다.
무료와 유료가 중요한 건 아니다. 명인대라는 국내 최고 학부에서 교육 과정을 신설한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심장한 일이다.
일례로 수료증 같은 타이틀이 걸린 과정은, 일개 개인이 만든 단체보다 명인대를 선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대학 로고만 명함에 박아도 효과는 극대화되니까.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역시 서지훈 선생님 찬스 써야 하는 거 아니냐? 내부 알력은 서지훈 선생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
한숨을 내쉰 민우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노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서지훈 교수였다.
“역시 소문이 빠르네. 한 선생.”
“안녕하세요. 선생님.”
두 제자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손을 들어 괜찮다고 사인한 서지훈 교수가 조용히 말했다.
“박민우. 나 좀 보자. 연구실로.”
“네.”
민우는 한진섭을 뒤로한 채 연구실 밖으로 나와 서지훈 교수의 뒤를 따랐다.
서지훈 교수는 출입문에 달린 마그네틱을 움직여 ‘외출’로 바꾸었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괜히 방해받는 건 싫어서 말이지.”
“뭔가 일이 생기긴 했나 보네요.”
“앉아라.”
서지훈 교수는 민우가 좋아하는 커피를 직접 타서 테이블 앞에 놓았다. 하지만 민우는 섣불리 잔을 쥐지 못했다.
“한 선생한테 이야기는 다 들었지?”
“어디까지가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양학부에서 인문학 프로그램을 새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렇군.”
서지훈 교수는 민우의 ‘휴머니티 프로젝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민우는 실시간으로 결정 사항을 그에게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서지훈 교수가 깍지를 낀 채로 조금 머뭇거렸다.
민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야기가 좀 길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천천히 전부 해주세요. 선생님. 오늘은 강의도 없으니까요.”
“그럴까.”
서지훈 교수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금연한 지 꽤 됐다는 사실에 무안한 미소를 짓는다.
“일의 발단은 좀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정확히는 네가 <태엽시계>를 번역했을 때로 올라가지.”
“상당히 옛날이네요.”
“승현이에게 듣기론 그때 너와 경쟁했던 번역가가 있다고 하던데. 이름 기억하나?”
“김태현 씨일 거예요.”
“그 친구랑 사이 안 좋지?”
민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김태현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예전에 문광부에서 주관한 ‘번역가의 밤’이라는 행사가 있었어요. 그때 본 적이 있는데 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 같았어요.”
민우는 그때를 떠올렸다.
김태현은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다는 자신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었다.
― 당연히 분에 넘치시겠지요. 운이 좋았다고 할까요? 솔직히 내 번역본이 선택되지 않은 게 의외이긴 했는데…… 뭐 살다 보면 이런저런 변수가 있기 마련이지. 알고 보니 출판기획실의 송승현 실장이 학교 선배라면서요?
그때부터 배배 꼬여 있었다.
민우는 학연보다 무서운 게 실력이라고 반박했지만, 그는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당연하지. 너 때문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놓쳤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건 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은데요?”
“흥분할 필요 없다. 사람의 증오라는 게 한번 타오르면 금방 번져나가는 법이니까.”
물론 민우도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그 상을 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루카치의 유물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위업.
하지만 김태현의 그런 인식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서지훈 교수가 이어 말했다.
“거기에 <인문과학총서>의 번역까지 해냈지. 맨부커상 이후 너의 번역가로서의 행보는 실로 기적에 가까울 정도였어.”
“설마…….”
“그래. 이번 일은 김태현 번역가와 연관이 있다. 정확히는 그의 몰락과 관련이 있지.”
민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지금 명인대에는 실장급의 교육 플래너가 와 있다. 이름은 김명현.”
“김명현, 김태현…… 이름이 비슷하네요. 혹시?”
“맞아. 김태현 번역가의 친동생이다.”
민우는 깜짝 놀랐고, 서지훈 교수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승승장구하는 사이 김태현 씨는 폼을 잃었지. 업계에서도 슬슬 일거리가 줄어들었고, 급기야 네가 세운 폴라리스라는 단체 덕분에 치명타를 입게 됐다.”
“하지만 그건…….”
“알아. 네 탓이 아니라는 건. 하지만 김태현 씨는 몰락했고, 함께 사업을 하던 동생 김명현도 회사를 닫아야 했지. 그리고 그 동생은 몇 년간 행방이 묘연하다 작년부터 우리 대학에서 일을 하고 있었더군.”
“총장 쪽 사람입니까?”
“굳이 따지자면? 미국 명문대에서 교육공학을 전공한 인재다.”
민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서지훈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교육 플래너라는 직종은 그리 흔한 직종은 아니야. 대학교육의 구조를 바로잡고 조언을 해주는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번 인문학 프로그램은 이 사람 작품이다.”
“저를 노리고……?”
“그렇다는 게 나와 몇몇 교수들의 추측이지.”
이제야 모든 퍼즐이 끼워 맞춰지는 듯했다.
서지훈 교수가 걱정스럽다는 듯 민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생각이다. 너뿐만이 아니라 너와 친한 교수들은 모두 이번 기획에서 배제됐으니까. 그러니 너는 이번 일을 못 들은 척, 그냥 넘어가 줬으면 하는구나.”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이 저 때문이라면…….”
“말했잖아. 네 책임이 아니라고. 너는 명인대에 임용된 지 이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어. 그러니 당분간은 얌전히 있어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서지훈 교수가 엄숙히 선언했다.
민우는 더는 반론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성공가도를 달릴 때 누군가는 처참히 몰락했다니.
“무엇보다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휘젓고 다니는 건 우리도 더는 못 보겠단 말이지. 그 철없는 친구가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하더군. 교육은 비즈니스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그 사실을 그 친구에게도 가르쳐줄 생각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서지훈 교수는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실에서 나가며 민우는 다시 마음을 바로잡았다. 궁지에 몰리면 안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할 수도 있으니까.
민우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
“그런 일이 있었구만.”
늦은 밤, 주예린 교수의 연구실에 팀 307호의 원년 멤버들이 모였다. 민우와 이수빈, 그리고 한진섭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민우는 서지훈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동료에게 모두 전했다.
당연히 탄식이 흘러나올 수밖에.
“분명 감주형 교수도 그쪽 편에 섰을 거예요. 민우 선배뿐만 아니라 서지훈 선생님도 싫어하잖아?”
주예린이 날을 세우며 말했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어차피 벌어진 일이야. 서지훈 선생님 말씀대로 해야지. 우리가 괜히 나서서 대립각 세울 필요 없다.”
“하지만 이건 약간 명예 문제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명인대의 인문학 프로그램인데 민우 오빠가 없다는 건…….”
“앙꼬 없는 찐빵과 다를 바 없지.”
“맞아요! 오히려 쪽팔리는 건 대학본부일걸? 어떻게 민우 선배를 뺄 수 있냐!”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니, 민우는 기운을 좀 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부터 좀 이상한 소문이 돌긴 했어요.”
“무슨 소문?”
먼저 말을 꺼낸 이수빈이 머뭇거렸고, 민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인문과학총서> 한국어 번역가로 내정된 사람이 사실 김태현 번역가였다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한진섭이 흥분했고, 민우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말했다.
“친한 친구가 번역학을 전공하거든요. 작년 무렵부터 그런 소문이 돌았대요.”
“그러니까, 내가 제임스 사장과의 친분을 이용해 작업을 가로챘다?”
“그건 잘 모르겠지만…….”
민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런 비슷한 헛소문이 지금까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우가 말했다.
“그냥 흘려들어. 우리는 우리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그런 소문에 일희일비하는 건 심력 낭비지. 그런데 다들 퇴근 안 해?”
“선배가 이 지경인데 어떻게 퇴근합니까?”
“월급은 못 나눠도 아픔은 나눠야 하지 않겠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 어서 퇴근합시다!”
민우는 이수빈과 함께 돌아왔다. 오늘은 어떻게든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우겨서, 민우는 그녀에게 운전석을 양보해야 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며 밤공기를 갈랐다.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새까맣게 타 있죠?”
“응?”
“오빠는 착한 사람이니까. 자기가 한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지경에 몰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겠지.”
“…….”
비슷했다. 새까맣게 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는 오빠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오빠 때문에 웃음을 되찾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잖아. 처음 대전에 내려가서 인문학 강의할 때도 그랬고, 아프리카 갔을 때도 그랬고.”
“감동이네.”
“그러니까 힘내요. 이번 일, 우리도 끝까지 도울 테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봉 위에 있던 수빈의 손이 민우의 왼손을 감싸 쥐었다. 기분 좋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덕분에 민우는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히려 코너에 몰린 건 내가 아니지. 나 혼자 버둥거리는 것도 아니잖아? 수빈이도 있고, 진섭이도, 예린이도 있고.’
민우의 눈에 다짐이 서렸다. 이번 휴머니티 프로젝트를 어떻게든 성공시키고 말겠다고.
그래서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다.
‘위기와 기회는 한 끗 차이다.’
그 한마디가 민우의 뇌리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