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1)
자정이 넘어서야 팀 307호 모임이 끝났다. 그간 쌓인 것을 모두 털어놓은 멤버들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오피스텔을 나섰다.
“아, 이렇게 헤어지려니 아쉽구만. 이제 다음엔 언제 모이지?”
한진섭이 물었고, 민우가 답했다.
“월에 두 번은 모이자. 급한 일은 톡으로 처리하고. 장소는 오늘처럼 연주네서 모이는 걸로 합시다. 어때. 다들 괜찮지?”
“저야 좋죠.”
정연주가 흔쾌히 승낙했다. 아까부터 표정이 밝았는데, 손님맞이에 새로운 취미를 들인 것 같다.
“그럼 우린 먼저 갑니다. 다들 다다음 주에 보자고.”
“조심히 들어가요!”
한진섭과 주예린이 차에 오르고, 나머지도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민우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로 걸어갔는데, 서강일이 불러세웠다.
“박민우. 잠깐 바람 좀 쐬자.”
“그래.”
민우와 서강일은 오피스텔 옆쪽에 있는 공터로 움직였다. 우뚝 선 전봇대에 걸린 가로등이 외로워 보이는 골목이었다.
서강일은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담배를 꺼냈다.
스마트한 이미지의 서강일이 담배라니. 왠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너 담배 안 피우지 않았어?”
“옛날에 끊었었는데 어쩌다 보니 다시 피우게 되더라. 도저히 견딜 수가 있어야지.”
“술이든 담배든 하나만 해. 우리도 건강 관리해야 할 나이야.”
서강일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연기를 들이마시고 허공으로 후 뱉는다.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오피스텔 앞에서 이수빈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민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씨익 웃는다.
“그런데 너. 교수 자리를 그렇게 함부로 걸어도 되는 거야? 누구는 자리 하나 보전 못 해서 빌빌거리고 있구만.”
“적어도 오늘 모인 사람들 중에 빌빌거리는 사람은 없지 않냐?”
“네 눈앞에 있잖아.”
“청문대 이사장님의 권유를 거절한 사람이 무슨 자리 타령이야? 그럴 땐 배부른 고민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다.”
민우가 농담조로 대답했고, 서강일이 웃음을 떨치며 한숨을 내쉰다.
“나, 학교에서 쫓겨났다.”
“뭐?”
“말 그대로 쫓겨났어. 얼마 전에 지도교수님이 부르시더니 계약 연장 어렵다고 말씀하시더라고.”
민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될 줄은 몰랐다. 아직 여름 방학까지는 5개월 정도 남았는데.
사실 계약 연장이 불가능하다는 정도로 대학에서 쫓겨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서강일은 자대생이고, 계약 연장은 상황에 따라 변수가 많으니까.
하지만 연장 불가 통보를 지도교수인 장소필 교수가 직접 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즉, 초빙교수 자리나 예산이 줄어든 게 아니라 대체할 만한 사람이 구해졌다는 의미다.
서강일은 이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대안도 안 주고 내치셨다고? 너무하네.”
“말로는 당분간 연구에 열중하고 나중에 자리가 나면 지원해 보라는데 그런 말은 학부 후배들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그래도 서강일은 그 원인 중 가장 큰 지분이 민우 너에게 있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민우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우가 자신보다 우월한 게 어떻게 탓이 될 수 있을까? 부족한 자신의 능력 탓이지.
“역시 내 깜냥으로는 한일대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거야.”
“애초에 문을 걸어 잠갔는데 문턱을 어떻게 넘냐? 문 자체가 열리지 않는데. 이건 너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지.”
“…….”
그런데 민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장소필 선생님이라면 내 이야기를 하셨을 거 같은데. 우리가 학회에서 맞섰던 토론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을 것 같고.”
“…….”
“옛날에 우리 처음 토론했던 겨울 학회 말이야. 그때 장소필 선생님께 혼났다면서?”
“민희가 그래?”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서강일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은 둘째치고, 민우에게 미안했다.
왠지 이 상황 자체가 민우를 탓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뭐, 솔직히 말해 그때는 분하고 억울한 면이 있었지만…… 결국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도 있어. 늘 당하긴 했어도 그게 큰 공부가 됐으니.”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네.”
“비꼬는 거 아니고 진심이야.”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거짓과 가식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서강일 선생이라면 대안을 준비해 뒀겠지?”
“당분간은 모교로 부임하는 내 꿈을 접어 둘 생각이다.”
“와우, 화끈한데?”
“민희 녀석이 그러더라고. 네 말 들어서 지금까지 손해 본 적 없다고.”
때마침 강민희와 눈이 마주쳤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서강일은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맞는 말이라 대꾸를 못 했지. 지금까지 뭔가 정신없이 끌려온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어쨌든 네 덕분에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으니까.”
“역시 괜한 걱정을 했네. 하하하. 그럼 이번 프로젝트도 잘 부탁한다!”
“맡겨 둬.”
민우가 뜬금없이 손을 내밀었다.
친한 친구와는 악수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서강일은 민우가 자신을 여전히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사람의 인간이자 학자로서.
서강일은 담배를 버리고 민우의 손을 꽉 잡았다.
***
다음 날, 민우는 다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연구실에 출근했다. 역시나 민재는 아침 일찍 나와 정리를 마쳐 놓은 상황이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차민재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민재 넌 좋겠다.”
“예? 왜요?”
“젊으니까. 아우,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민우는 그저 웃으며 겉옷을 벗고 책상에 앉았다. 차민재가 커피를 컵에 따라 가져다주었다.
“요즘 일이 워낙 많으시니까 제대로 못 쉬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냥 나이 들어서 그런 거지 뭐. 요즘 운동을 좀 소홀히 해서 그런가 체력이 달리네.”
“선생님 아직 젊으시잖아요. 이제 서른 중반이신데.”
“그래 봐야 20대 체력에 비하겠냐. 거기에 애도 하나 딸려 있는데. 그런데 윤이는?”
“아직 안 나왔어요.”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컴퓨터를 켜고 오늘까지 도착한 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논문 집필을 위한 자료를 검토했다.
10시가 지날 무렵, 문이 열리더니 허윤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형님, 대박 사건!”
“무슨?”
“<프로페서> 오디션 공지 떴어요! 3월 23일 토요일입니다!”
“얼마 안 남았구만.”
민우는 허윤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 살펴보았다. 지원 자격과 배역, 그리고 연기 테스트 항목 등이 서술되어 있었다.
‘지정 연기와 자유 연기를 구분해서 볼 정도면, 대본이 어느 정도 나왔다는 얘긴데.’
한번 대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서전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이다 보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이름이 박진수인가?”
“박민우라고 할 순 없으니까요. 이름 느낌만 살짝 비슷하게 했나 봐요.”
“박진수 역에 지원할 생각이지?”
“당연하죠.”
허윤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시시한 조연을 할 거였다면 변장을 하며 매일 연구실로 출근하는 고생은 하지 않았을 거다.
민우는 살펴본 종이를 다시 허윤에게 돌려주었다.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 철저히 준비해.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히고 있는데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쪽팔린 일이지.”
“걱정 붙들어 매십쇼. 주인공 역은 제 껍니다!”
허윤은 의지를 불태우며 자신의 자리를 돌아갔다. 그리고 평소 민우를 관찰하며 메모해뒀던 내용을 다시 복습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선샤인 프로덕션’이라는 곳에서 온 메일이었다. 민우도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메일을 클릭해 내용을 읽었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메일이었다.
‘캐스팅 심사 요청이네. 그리고 대본 파일도 있어.’
예전에 송승현 이사가 귀띔해준 것이 있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모델이 어느 정도 관여하는 것은 제작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굳이 윤이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은 민우는 답장 버튼을 클릭하고, 심사에 참석 가능하다고 회신했다.
‘윤이도 그렇고 강일이도 이번 기회를 통해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그런 소소한 희망을 걸며 민우는 다시 연구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명인대 총장실에서는 그와는 다른 은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자네, 커피 어때?”
“괜찮습니다. 오늘 미팅이 많아서 위장이 출렁거리고 있네요.”
“하하하. 그렇구만.”
포마드 스타일의 머리를 한 사내가 점잖게 사양했다. 정장 핏이 무척 잘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나이는 서른 후반 정도로 보였다.
백성웅 총장은 비서실 직원에게 뜨거운 녹차 한 잔을 주문했다.
비서가 나가고 둘만 남자 백성웅 총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자네가 온 뒤로 대학 분위기가 좀 더 활기차진 것 같군.”
“별말씀을요. 이게 다 총장님께서 도와주신 덕분 아닙니까. 매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혼자 기능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지표가 좋아지면 예뻐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백성웅 총장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파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서류엔 ‘2023년도 명인대학교 교양강좌 결산보고서’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다.
즉, 작년 명인대학교에서 열린 교양강좌에서 얼마나 수익이 났는지를 보고하는 데이터였던 것이다.
그 자료에서 확실한 성과를 보인 남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현대 교육은 비즈니스입니다. 비즈니스의 법칙을 따른다면 수익을 내지 못할 것도 없지요. 교육과 경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명언일세. 하지만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백성웅 총장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의 심복이기도 한 남자는 두 눈을 빛냈다.
“역시 박민우 교수를 염두에 두신 겁니까.”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매스컴은 모두 박민우 교수 편 아닌가?”
“인문학 공동체라는 기이한 프로젝트를 하려는 것 같더군요.”
“전에 불러다 놓고 한마디 꺼내긴 했는데 영 신통치 않단 말이지.”
“박민우 교수…….”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의 표정에 불길한 미소가 걸렸다. 민우는 사내를 알지 못했지만, 사내는 민우를 잘 알고 있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불세출의 학자. 그리고 지금까지의 업적보다 앞으로의 업적이 더욱 찬란할 거라는 게 세간의 객관적인 평가지요.”
“쯧. 그 재능을 비즈니스에 펼쳐주면 얼마나 좋나.”
“글쎄요. 그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뜻밖의 반문에 백성웅 총장의 눈매가 좁아졌다. 남자는 허리를 펴고 정중히 말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습성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특히나 박민우 교수는 자아가 매우 곧고 바르기로 유명한 사람.”
그렇게 말을 끊은 남자가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의 비즈니스 모델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으려고 자네를 부른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저도 슬슬 대응을 시작해야겠지요.”
“방법이 있나?”
“나름 설계해 둔 계획이 있습니다. 박민우 교수가 그 프로젝트를 우리 대학에서 하지 않는다면, 우리 대학 자체로 뭔가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군요.”
백성웅 총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고 있겠네.”
“맡겨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