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인 사람들 (6)
민우가 기자회견을 한 그 주의 일요일. 모두가 기다리던 팀 307호의 정기 모임이 열렸다.
민우와 이수빈은 함께 움직였다.
미리 주소를 받은 오피스텔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까부터 이수빈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다.
“그렇게 좋냐?”
민우가 물었다. 기지개를 한 번 켠 이수빈이 눈웃음을 짓는다.
“오랜만에 다들 모이는 거잖아요! 밀린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면 2박 3일도 부족하지.”
“그러면 자고 오든가.”
“어머, 그래도 돼요?”
“윤아는 내가 볼 테니 자고 와. 난 정말 괜찮아.”
이수빈이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민우를 은근히 올려다본다.
“마누라 밖에서 재우고 집에서 뭐 하려고?”
“뭐 하긴. 공부하지.”
“의학과 청강생 집에 들이는 건 아니고?”
그냥 지나가듯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수빈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알고 있었어?”
“벌써 소문 다 났다니까. 미모의 의대생이 오빠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다고.”
“야.”
이수빈이 생글거리며 웃었다. 농담으로 한 말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문제로 수빈이 신경 쓰는 건 원하지 않았다.
“다음에 한번 집에 데려와요. 밥이나 한 끼 먹게.”
“그래도 돼?”
“뭐 오빠가 제자 데리고 오는 거 하루이틀도 아니고. 민재도 같이 데려오면 짝 맞겠는데요?”
“그럴까.”
민우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소윤과는 묘한 이끌림이 있었다. 이성적인 이끌림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비슷했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띵동!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민우는 초인종을 눌렀다. 곧 고급스러운 문이 열리더니 편한 복장을 입은 정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이사 축하해. 새집에 필요한 것들 좀 사 왔어.”
민우가 봉지를 건넸고, 정연주는 기뻐하며 선물을 받았다.
“뭘 이런 걸 다 사 오셨어요. 몸만 오셔도 되는데.”
“어떻게 그래?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신세 많이 져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같이 하는 일인데요 뭐. 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정연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 활기찼다. 그만큼 기대가 큰 것이리라.
“우와…….”
안으로 들어간 민우와 이수빈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급 인테리어야 이미 예상했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넓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어림잡아도 50평은 넘어 보였다.
“엄청 넓네. 고급스럽고. 혼자 살기는 너무 넓은 거 아냐? 청소하기 힘들 것 같은데.”
“청소는 제가 안 하니까요.”
“아, 그렇지.”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정연주는 방을 거닐며 실내를 소개했다.
“어때요? 신경 좀 썼어요. 우리 아지트로 삼기 좋지 않아요?”
“아지트?”
민우와 이수빈이 동시에 되물었다.
“네. 아지트요. 아무래도 다들 가정도 있고 하니까 다 같이 모이기에 적당한 곳이 없잖아요. 마음에 드시면 나중에 여기에서 자주 모여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음식은 이쪽에 준비해 뒀어요.”
방 안으로 들어가니, 기다란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민우와 이수빈의 시선이 돌아갔다. 테이블 한옆에 셰프 모자를 쓴 남자 두 명이 보였다.
“설마 요리사까지 부른 거냐…….”
“제가 요리하면 다들 왠지 금방 가실 거 같아서.”
“솔직하네.”
“자! 이쪽에 앉으세요.”
민우와 이수빈은 정연주가 안내해주는 곳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고 멤버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반응은 처음 민우가 오피스텔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했다.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 오피스텔 맞아? 무슨 모델하우스 같은 느낌인데.”
“헐 대박!”
곧 한진섭과 주예린도 탄성을 내질렀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것은 하지은이었다. 정연주와 친한 친구였던 그녀는 가끔 여기에 놀러 온다고 했다.
지음사에서 일하고 있는 장철호와 라온북스에서 근무하는 이유리도 자리했다. 마지막으로 서강일과 강민희 커플이 합석하는 것으로 입장은 끝났다.
“다들 모인 것 같네. 일단 건배부터 할까?”
민우의 말에 모두 잔을 들었다. 민우가 정연주에게 눈짓했다.
“건배사는 집주인이 해야지.”
“제가요? 음…… 그럼, 휴머니티를 위하여.”
“위하여!”
열 명의 멤버들이 음식을 먹으며 근황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대박, 대박 맛있다!”
“그쵸? 아까 인사드린 분들 백제호텔 셰프분들이에요. 오늘 특별히 모셨어요.”
고개를 끄덕거린 주예린이 폭풍 흡입을 시작했다.
백제호텔은 대한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호텔이다. 초일류 호텔의 셰프를 데려왔다니. 새삼스레 정연주의 힘이 실감 났다.
민우가 주예린을 향해 핀잔을 던졌다.
“넌 교수면 좀 교수답게 행동해. 먹는 게 그게 뭐냐? 학부 시절 버릇을 아직도 못 버렸네.”
“아니 뭐 우리끼리 있는데 직함을 따져요? 꼰대네.”
“뭐?”
“하하하하!”
일동이 소리 내어 웃었다. 특히 한진섭은 배를 움켜쥘 정도였다. 역시 박민우의 천적은 주예린밖에 없다면서.
한진섭이 부추겼다.
“박 선생도 한물갔네! 꼰대 소리나 듣고 말이야. 강의실에서 ‘라떼는 말이야’ 하는 거 아냐?”
“쯧.”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는다아…….”
남이 싸우거나 말거나, 주예린은 눈을 감으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전에 뉴스는 봤다. 기자회견 한 거 같더만. 정말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게 뉴스에 나온단 말이지.”
서강일이 부럽다는 듯 말했고, 민우가 씨익 웃었다.
“송승현 이사님이 그러시더라고. 능력이 출중한 것도 죄라고.”
“중죄지. 주변 사람들 피곤하게 하니까.”
“피곤해도 땀 흘리고 나면 보람차지 않아?”
민우의 비유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막 시작하려 하는 ‘휴머니티’ 프로젝트도 힘든 일이 많을 거다.
하지만 바짝 땀을 흘리고 나면 보람찬 순간이 오겠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식사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백제호텔에서 온 셰프들은 이번엔 직접 만든 디저트를 제공했다.
“배도 부르고, 이제 슬슬 일 이야기 좀 해야지?”
한진섭이 분위기를 환기시키자 잡담을 나누던 멤버들이 민우를 주목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할 말이 있는데. 얼마 전에 백성웅 총장하고 면담했었어.”
“백성웅 총장이라면…… 명인대 총장이잖아?”
“총장이 왜?”
팔짱을 낀 민우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명인대에서 휴머니티 프로젝트를 유치하고 싶다고 했어.”
“무슨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평소에 이런 쪽으로는 조금도 관심 없더니만. 매스컴 탔다고 바로 숟가락질이야? 양심에 브라질리언 왁싱을 해줘야겠어.”
가장 흥분한 건 한진섭이었다.
한때 그는 자대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학과 정치상의 이유로 강의를 모두 취소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본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곱진 않다.
“사실 그 정도야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야. 문제는 투자금인데…….”
그렇게 말을 줄인 민우가 정연주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
“혹시 저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백 총장은 청문대가 휴머니티에 투자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 우리 팀에 연주가 있으니까.”
“뭐라고요? 듣자 듣자 하니까 노답이네 증말!”
주예린도 폭발했다.
아무래도 명인대에 적을 두고 있는 멤버들이 흥분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줄곧 인문학을 찬밥 취급해오다 먹음직스러운 게 놓이니 손을 뻗다니. 그 이해타산적인 행동에 분통이 터진 것이다.
민우가 말했다.
“아마 앞으로도 견제가 들어올 것 같아. 그렇다고 투자금을 유치하지 않을 수는 없어. 어쨌든 공간이 필요하고, 그 공간을 사들일 돈이 땅을 파서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 뜻을 모아 온 연주의 성의이기도 해. 그걸 무시하고 넘어갈 순 없어.”
“…….”
정연주가 고개를 떨궜다.
자신이 추진하려던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 주눅이 든 게 아니다. 자신의 포지션 때문에 민우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던 것.
한진섭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다가 네 자리도 위험해지는 거 아냐?”
“글쎄.”
민우가 가벼이 대꾸했고, 이번엔 서강일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막장인 대학이라도 노벨상 수상자를 내쫓는 곳은 없어. 게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인데 무슨 자리가 위험해?”
“하지만 그만큼 정신이 나가 있는 게 사립대학이기도 하지. 온갖 비리가 만연한 곳이니.”
“네 말대로 문제가 없으면 다행이지만, 민우가 그걸 버텨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우리가 좋은 프로젝트라며 추진한다고 해도 우리 중 누군가 피해를 보는 그림이 나오게 되면 그건 하지 않는 게 옳은 거 아닐까?”
서강일이 상황을 깨끗이 정리했다.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서강일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교수직에 얽매이지 않을 거야. 그쪽에서 자리를 걸라고 하면 나는 얼마든지 자리를 걸 생각이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
“명인대가 아니라도 내가 배우고 가르칠 곳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어.”
민우의 한마디에 서강일이 움찔했다. 그 옆에 있던 강민희가 눈매를 좁혔지만 민우에게 따질 수 없었다.
그들에겐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 서강일이 처한 상황을 민우도 잘 알고 있다. 괜히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서강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너도 깨닫는 순간이 올 거야. 자리에 연연하게 되면 더 위로 나아갈 수 없다고.’
민우는 일부러 서강일을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정하는 건 라이벌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니까.
민우는 이 어려운 시기를 서강일 스스로가 잘 헤쳐나가길 바랐다.
동료이자 친구로서.
“아무튼, 견제가 들어오는 건 걱정하지 말고 진행하자.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너희들에게 도움을 청할 테니까.”
“견딜 수 없게 됐을 때 이야기하면 늦어. 그 전에 미리 공유해라.”
“맞아요. 그게 좋아요.”
“나도 찬성!”
멤버들이 말을 모으자 민우는 그 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할게. 약속하지. 그럼 이제 서로 준비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정연주. 공간 확보는 어떻게 됐어?”
“서울에 위치한 7층 건물을 인수할 수 있게 됐어요. 상당히 면적이 넓어요. 이건 대한그룹 쪽에 있는 재단에서 인수하고, 휴머니티에 임대하는 방식으로 할 생각이에요.”
“좋아. 시작이 나쁘진 않네.”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공간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그게 해결된다면 나머지는 속전속결이다.
“내부 인테리어까지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3개월…… 나머지 운영자금은 그 안에 여러분들께서 유치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민우의 지휘가 시작됐다.
“일단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 투자금을 유치하자. 한진섭. 너는 지음사 인문사회연구소에서 출자 가능한지 알아봐. 철호 도움 받으면 될 거야.”
“오케이.”
“주예린 너는 센트럴 북스에 압력 좀 넣어. 정 안 되면 차기작 계약이라도 걸고. 유리랑 같이 움직여.”
“넵!”
“수빈이는 출판사 관계자들을 좀 만나줘.”
“알았어요.”
대강 정리가 끝났다.
그때 부름을 받지 못한 하지은이 손을 들었다.
“저는 뭐 할 거 없나요?”
“지은이는…… 그래. 휴머니티 건물 안에 채울 그림을 그려주는 건 어때? 이미 그려놓은 것도 상관없는데.”
“그것보다는 그림을 좀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는 건?”
“둘 다 하면 딱이네.”
“에휴, 하여간 욕심쟁이라니까. 알았어요!”
남은 시간 3개월.
민우는 궁금했다. 과연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팀원들과 함께 어떤 마법을 부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