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13화 (313/500)

다시 모인 사람들 (5)

저녁 늦게 일을 마친 민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8시가 넘은 시각.

민우가 안으로 들어오자 딸 윤아가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온다.

“아빠!”

“웃차! 우리 윤아 잘 놀고 있었어?”

“엄마랑 숙제하고 있었어!”

“그래? 숙제하기 싫어서 아빠 마중 나왔구나?”

“아닌데…….”

뒤늦게 나온 이수빈이 싱긋 웃었다.

“요즘 윤아 숙제 열심히 해요.”

“와, 그래? 우리 윤아 대단한데?”

품에 안은 딸을 내려놓았다. 윤아는 바로 소파로 달려가 앉아 TV를 켰다. 방금 이수빈이 했던 말과는 조금 다른 행동을 하면서.

“오빠 오기 전까지 공부 많이 했으니까 잠깐 보게 해줘요. 어차피 뉴스 할 시간이니까.”

“알았어.”

민우는 안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이수빈도 따라 들어왔다.

“오늘 인터뷰는 어땠어요?”

“그냥 그렇지 뭐. 아, 보니까 KBC에서도 촬영 나왔던데 오늘 뉴스에 나올 수도 있겠구나.”

“기자들 많이 왔죠?”

“어마어마했지. 외신에서도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라고. 나올 때 조슈아 씨 만났어. 가디언에서도 나왔더라.”

“이야, 하여간 울 오빠는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오빠 꽉 잡고 사는 사람이 더 대단한 사람이지 않나?”

“뭐예요?”

두 사람은 실없이 웃었다.

다른 분야라면 모를까, 민우는 결혼 생활만큼은 대부분 져주는 스타일이다. 물론 이수빈이 애초에 그런 상황을 잘 만들지 않는 타입이긴 하지만 말이다.

“저녁은?”

“대충 때웠어. 좀 출출하긴 한데, 간단히 먹을 거 없을까?”

“야식 만들어줄게요.”

“배 나온다고 구박할 땐 언제고.”

“남편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니는데 가만히 앉아서 손 놓고 있는 건 좀 그렇죠.”

“그럼, 부탁해.”

“간단히 라볶이 만들어 볼게요.”

민우는 웃으며 옷장을 닫았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고 나오니 윤아가 TV를 향해 집중하고 있었다.

“뭐 재미있는 거 해?”

“아빠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보고 있었어.”

때마침 뉴스 화면이 전환되고, 민우의 사진이 오른쪽 위 박스에 담겼다. ‘박민우 문학상 제정’이라는 서브 타이틀이 붙어 있다.

“아빠다! 아빠 나온다!”

주방에서 재료를 꺼내던 이수빈도 따라 나와 TV를 시청했다. 앵커가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침체되어 있던 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려는 모양입니다. 오늘 지음사 프레스룸에서 박민우 문학상 제정 인터뷰가 열렸는데요. 박민우 교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도 유명하죠. 현장 연결합니다.”

화면이 전환됐다.

지음사 프레스룸이 커다랗게 잡히며 천천히 클로즈업되는 구도였다. 윤아가 좋다며 옆에서 웃었다.

“진짜 아빠다!”

윤아가 가리킨 화면엔 민우가 가득 차 있었다. 윤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민우의 인터뷰를 시청했다.

잠깐 소개하는 뉴스라 길게 방송되지는 않았다.

다른 테마로 넘어가자, 가만히 윤아를 지켜보고 있던 민우가 물었다.

“윤아 너 무슨 이야긴지 알아들었어?”

“아빠는 유명한 사람이라구.”

“하하하. 제대로 이해했네.”

하긴, 아직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문학상이라는 개념을 알기엔 이르긴 하다. 그래도 딸이라고 아빠 듣기 좋은 말을 해주니 내심 기뻤다.

“저건 아빠 이름을 딴 상이야. 일 년에 한 번씩 공부 열심히 한 사람한테 주는 상이다?”

“그래? 그럼 나도 받을 거야!”

“그러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는데?”

그 말에 윤아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곤 책상에 앉아 숙제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이다 뭐다 공부시키기 어렵다고 하던데, 윤아는 알아서 척척 하는 편이라 가르치기가 수월했다.

사실 민우나 이수빈이나 큰 욕심은 없었다.

그저 하나밖에 없는 딸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즐겁게 살기만을 바랄 뿐.

“오빠는 윤아 공부시키고 싶어?”

“대학원까지?”

이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도 가끔 생각하던 문제였다. 책과 공부를 좋아하니까 대학은 물론 대학원도 갈 거다.

“본인이 희망한다면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그때는 교육 방식이 지금과는 좀 다를 것 같지만.”

“나는 솔직히 대학원은 안 갔으면 좋겠어.”

“왜?”

“열심히 쓴 논문 분리수거통으로 들어가는 수모를 겪고 싶게 하지 않아서요. 그런 건 우리 대에서 끝내야지.”

“하하하하.”

대학원생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요즘은 대학원생 인권이다 뭐다 해서 다들 신경 쓰는 분위기지만, 여전히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한 곳이기도 했다.

명인대에 들어온다면야 잘 챙겨 줄 수 있지만, 다른 대학에 간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

게다가 같은 계통으로 진학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이수빈의 걱정도 이해가 가는 바가 있었다.

“그건 뭐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아직 윤아가 뭐 하고 싶은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뭔가 좀 조바심이 들기도 하고.”

“천천히 가자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윤아도 자기 인생에 대해 충분히 생각을 해본 다음 고민해도 늦지 않아.”

“오빠는 참 만사태평이다.”

“그게 성공의 비결이지.”

수빈은 뭐라 반박하고 싶지만 활짝 웃는 남편의 모습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주방으로 돌아가 가스불을 올렸다.

***

다음 날, 뜻밖의 전화가 민우의 연구실로 들어왔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총장실입니다.

“아, 네.”

― 오늘 총장님께서 잠시 뵙자고 하시는데요. 오전에 잠깐 건너오실 수 있는지요.

민우는 스케줄을 살폈다. 강의가 하나 있긴 한데, 잠깐 다녀오는 건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10분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 네, 교수님. 이따 뵙겠습니다.

조만간 부를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어제 문학상 소식이 공중파 뉴스까지 탔으니 대학 당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국립도 아닌 사립대학이니 숟가락을 올리려고 하겠지.

“형님.”

민우가 나갈 준비를 할 무렵, 허윤이 슬쩍 다가왔다.

“이번 주 일요일에 모인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겠어요. 지은이한테지.”

하지은과 허윤은 평소에도 가끔 만나는 것 같았다. 하지은의 집안도 굴지의 대기업이라 스캔들이 난 적도 있었지만 아직은 친구 사이인 것 같다.

“저도 슬쩍 껴도 됩니까?”

“안 돼. 중요한 회의 있다.”

“아 형! 저는 형님의 모든 것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입장이라구요. 그런 건 좀 감안해 주셔야지. 오히려 그런 중요한 장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민우는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은 오디션 통과하고나 하세요. 누가 들으면 내정자인줄 알겠네.”

“매정하시네.”

“중요한 얘기라 담에 껴. 그때는 내가 먼저 초대해 줄 테니까.”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곧장 총장실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총장실 비서가 민우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신임 총장인 백성웅이 직접 일어나 환대했다.

백성웅은 덩치가 무척 큰 사람이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였지만 체구가 큰 탓에 매우 정력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거 이거 미안합니다. 바쁘실 텐데 오라 가라 해서요.”

“아닙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민우는 백성웅 총장과 독대했다. 총장실 안은 무척 조용해서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였다.

“요즘 좀 어떠십니까? 이런저런 일로 바쁘신 거 같은데요. 들려오는 이야기도 많고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죠. 그래도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바라는 거라든지, 그런 게 있을까요?”

“지금도 잘 해주셔서 딱히 없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게 있다면 역시 등록금이겠네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총장님께서 힘을 좀 써 주시면 좋을 텐데요. 학생들의 부담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민우가 웃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등록금 문제야말로 대학에서 가장 핫한 이슈 중 하나다.

허허 웃은 백성웅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저도 공감하고 있는 바입니다. 요즘 대학들이 장사를 하니 어쩌니 말들이 많지만, 교육 기관이라는 기본을 잊으면 곤란하겠지요.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지요.”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비서가 차를 내왔다. 두 사람은 여유롭게 차향을 즐겼다.

대화가 계속되었다.

“어제 뉴스는 잘 봤습니다. 박민우 문학상이 제정되었다고 하더군요. 실로 문학계의 경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역시 큰일을 하시는 분답게 좋은 말씀을 해주셨네요. 보통이라면 우리 대학의 경사라고 했을 텐데 말이죠.”

“학계가 살아야 대학도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겉으로 칭찬을 했지만 민우는 살짝 긴장했다. 보통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던 것이다.

“듣기로는 문학상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도 조직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벌써 소스가 들어간 모양이군요.”

“아는 기자가 기자회견장에서 들었다고 하더군요.”

인문학 공동체 ‘휴머니티’ 이야기일 것이다. 민우가 대답하지 않자 백성웅 총장이 선수를 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업, 우리 대학에서 유치할 수 있겠습니까?”

“유치라고 하신다면, 공동체 설립을 대학에서 주도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고개를 끄덕인 백성웅 총장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조용히 민우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큰돈이 들어가는 사업이 될 테고, 지속적인 관리도 중요할 거라고 봅니다. 그 사업을 혼자서 설계하기에는 역부족일 겁니다. 아아, 물론 박 교수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바쁘시니 시간적인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혼자 준비하는 건 아니니까요. 자본에 대한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됐습니다.”

“그렇습니까? 누가 투자를 하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적은 돈이 아닐 텐데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백성웅 총장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연주가 이번 일에 개입하고 있는 걸 알고 있구나. 꼬투리를 잡겠다는 거 같은데…….’

민우는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정연주는 대한그룹의 일원이지만, 한편으로는 청문대 이사장이기도 하다.

즉 정연주가 자금 부분을 맡는다는 것은 ‘휴머니티’가 청문대의 투자기관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이야기.

내부에서 아무리 해명을 해도 외부의 선입관은 쉽게 떨쳐지지 않을 거다.

“대한그룹 쪽에서 투자를 받을 것 같습니다.”

“청문대가 아니고요? 정연주 이사장이 재무를 맡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청문대 재단의 돈을 이용하진 않을 겁니다. 공익사업에 가깝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는 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명인대 교수가 주관하는 사업에 청문대에서 돈을 댄다…… 뭔가 그림이 너저분하지 않습니까?”

민우의 눈이 꿈틀했다.

너저분하다는 것은 그림을 뜻하는 게 아니다. 바로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비판적인 표현이었다.

“설명해도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어떤 증거를 내밀어도 소용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박 교수의 말을 신뢰합니다.”

백성웅 총장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미소를 보였고, 총장실의 기류를 단번에 바꾸었다. 한마디로 밀당의 귀재였다.

“그래도 다시 한번 고민해 보셨으면 합니다. 본인의 포지션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승적으로 말이죠.”

그렇다고 물러날 민우도 아니었다.

“고민은 충분히 했습니다.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죠. 대학은 물론 학계가 하지 못한 일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생태계를 구축해보고 싶네요.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박 교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백성웅 총장은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선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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