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인 사람들 (4)
정신을 번뜩 차린 민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부족하긴요. 충분하고도 남아요.”
“그럼, 한 말씀 부탁드려요.”
민우가 마이크를 가까이하자 셔터 소리가 더욱 격하게 들렸다. 아마 이 장면이 신문 1면의 메인으로 올라가겠지.
아까 이사실에서 이런 기자회견은 이제 익숙하다는 말을 했었는데, 괜히 부끄러워졌다. 이런 가벼운 농담에 당황하다니.
민우가 입을 열었다.
“먼저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지음사 측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활동을 했지만, 이번 문학상 제정은 좀 특별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기자들이 하나같이 어떤 부분이 특별했냐고 묻는 듯했다. 민우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초를 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살아 있는 제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고난을 피하는 것보다는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이번 문학상 제정을 통해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또 세계의 문화를 우리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무수히 많은 손이 올라갔다. 이번에 사회자가 지목한 사람은 벽안의 사내였다.
그는 약간 어색하지만, 알아듣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한국어로 이렇게 물었다.
“프로페서가 설립한 ‘폴라리스’도 이번 문학상에 참여하는지 궁금합니다.”
민우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미리 사정 설명을 드려야겠네요. 일단 저는 설립자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일반 회원입니다. 이번 문학상에 대해 폴라리스 운영진과 합의된 부분은 없으며, 특별한 경우가 없다면 문학상 운영은 지음사 단독으로 진행될 겁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로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였다.
“경한신문 문화부 박윤지입니다. 박민우 교수님.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본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까지 만들어졌는데요. 간단히 소감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마 박윤지 기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질문이리라.
민우의 성장을 처음부터 지켜본 기자이기도 하니까.
미소를 지은 민우가 답변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보다 더욱 기쁘고 설렙니다.”
파격적인 한마디였다.
좌중이 술렁였다.
사실 대중의 인식에서 학술 분야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가 바로 노벨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진솔한 표정으로 그 상의 가치를 평가했다. 그것은 하나의 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기자들의 집중이 고조되는 순간, 민우의 말이 이어졌다.
“노벨상은 뭐랄까…… 노벨상이라는 거대한 역사 속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느낌이지만, 이번 문학상은 모든 역사에 제가 스며든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기자들의 타이핑 속도가 빨라졌다. 민우는 잠시 쉬었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냥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지요. 새로운 도전이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제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저 혼자서 어떻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이 상이 더욱 가치 있게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이고, 그러려면 저도 개인적으로 더 노력을 해야겠죠. 학술 분야든 사회공헌 분야든 가리지 않고 전력투구할 계획입니다.”
“그 계획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음, 그건 좀 난감한 질문인데.”
민우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감정에 휩쓸려 휴지를 둔 것은 아니었다. 민우는 이미 미디어를 다루는 방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애타게 하려는 것.
일종의 미디어 전략인 것이다.
“실은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프로젝트를 하나 기획하고 있습니다.”
찰칵! 찰칵찰칵!
엄청난 셔터음이 들렸다. 예전이라면 이 소리가 위축됐겠지만, 민우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인문학을 하면서 먹고살기 힘들다는 건 비단 오늘내일 일은 아니죠. 실제로 강사법 시행 이후로 일터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도 돌아가는 상황이죠.”
“그 말씀은, 현재 정부 정책과 대학 당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해도 됩니까?”
손을 들지 않고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사회자가 제지하려고 했지만, 민우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흥미로운 질문을 하셨네요. 비판으로 해석한다고 질문하신 저의는 뭘까요?”
“그러니까……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신 거냐는…….”
기자의 목소리가 점점 위축되었다. 민우는 자신 있게 웃었다.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정부든 개인이든 마찬가지겠지요. 저는 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비판처럼 느껴졌다면 비판이 맞겠죠.”
“말씀 감사합니다.”
돌발 질문을 던진 기자가 꼬리를 내렸다. 민우는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를 설립할 겁니다. 전용 공간을 확보하고, 인문학과 관련된 사람들이 편히 즐길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곳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게 한정적이라 죄송하지만, 조만간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계획을 공개하겠습니다.”
“박민우 교수님! 동료라고 하시면 구체적으로 어떤 분들입니까?”
“이번에도 대한그룹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민우는 웃을 뿐,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사회자가 능숙하게 나서 질문을 차단했다.
“주제와 벗어난 질문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이어서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세 분만 받겠습니다.”
좌중이 고요해지고, 다시금 질문과 답변이 반복되었다. 나머지 질문은 송승현 이사가 처리했다.
기자회견이 무사히 끝났다.
한숨을 돌린 민우는 송승현 이사와 함께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왔다.
“거기서 질문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어머, 혹시 지금 나한테 불만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아뇨, 그게. 놀랐잖아요. 게다가 제가 아는 송 이사님이라면 칭찬에 매우 인색한 분이시니까.”
민우가 다소 위축되어 말하자, 송승현 이사는 재밌다며 웃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 질문에 대답만 하는 건 구식이죠. 이제는 프레젠테이션의 시대지. 뭐든 자연스럽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예에. 이사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아무튼 고생했어요. 올라가서 차 한잔하고 갈래요?”
그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아가 정중히 인사했다. 송승현 이사도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미소로 화답했다.
민우가 답했다.
“죄송하지만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요. 그 제안은 킵해뒀다 다음에 써먹을게요.”
“그래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레아 씨도 다음에 또 봐요.”
“예. 이사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송승현 이사와 헤어지고 레아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차 앞에서 익숙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아는 경계하는 모습이었지만, 민우는 달랐다.
바로 가디언지의 조슈아 벨라미였다.
「조쉬!」
두 사람이 가볍게 포옹했다. 조슈아는 민우의 등을 다독였다.
「오늘 기자회견 멋지더군요.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느낌이던데.」
「어? 왔었어요? 안 보이는 거 같던데.」
「구석에서 얌전히 구경하고 있었죠.」
「왜 그랬어요? 손 들었으면 제가 직접 지명했을 수도 있었는데.」
조슈아는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저야 프로페서의 개인 인터뷰를 딸 수 있는 입장이니까, 굳이 경쟁할 필요 없잖아요?」
「영악하군요.」
「그런데 이 미녀분은 누구? 민우 씨가 이혼했다는 기사는 못 본 거 같은데요.」
조슈아의 유머에 레아가 손을 내밀었다.
「레아 앤더슨입니다. 박민우 교수님의 비서입니다.」
「와우, 반가워요. 저는 조슈아 벨라미입니다. 지금은 가디언에 있고요. 싱글이죠.」
묘하게 싱글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순순히 넘어갈 만큼 레아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지하주차장으로 여러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민우가 엄지로 차를 가리켰다.
「나가는 길이실 테니 일단 타시죠. 누가 보면 곤란하니까요.」
「좋습니다. 나가는 길에 강남역에 내려 주시면 더 좋고요.」
「가시죠.」
세 사람이 차에 올랐다. 민우와 조슈아는 뒷자리에 앉아 밀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나눴다.
「그럼 아직도 가디언에 있는 거예요?」
「집에서 가까운 직장이 거기라서요. 아직 딱히 옮기고 싶은 생각도 없고.」
「앞으로 계획은요? 한국에 왔으니 좀 쉬다 가셔야죠.」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그냥 민우 씨 만나서 이야기나 하려고 했죠. 그런데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던데.」
「인문학 공동체 이야기요?」
「맞아요.」
조슈아는 습관적으로 메모장과 펜을 쥐었다. 그리고 물었다.
「제가 아는 대한민국은 인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먼, 그런 실적 위주의 사회잖아요? 전쟁 이후 고도성장기를 겪었으니 당연한 사회 현상이죠. 그런데 어떤 젊은 학자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인문학 공동체를 만든다고 하니 관심이 가더군요.」
「하하하.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게 칭찬처럼 들리네요.」
「뭐, 반쯤은 그렇죠. 거기에 대해 약간의 코멘트를 부탁해도 될까요?」
원래라면 정중히 거절해야 옳다.
하지만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을 때 조슈아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빚을 졌다. ‘폴라리스’가 성공적으로 오픈한 것은 그의 공이 컸다.
앞으로도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민우가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이라면 얼마든지.」
「어떤 분들과 함께 하십니까? 혹시 예전에 말씀하신 그 팀 동료분들인지.」
「맞습니다. 정확히는 팀 307호 멤버들이죠.」
「꽤 유서 깊은 클럽이 되었네요.」
「앞으로도 그렇게 만들 생각입니다. 아마 이번 프로젝트가 가동되면 팀 이름도 바뀌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팀 307호는 명인대 석사 연구실인 인문관 307호에서 따온 팀명이다. 그때는 명인대생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쓴 거지만, 지금은 비명인대생들이 훨씬 많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계획을 왜 세우게 됐을까요? 물론 민우 씨라면 예전부터 세워 둔 계획이었겠죠. 하지만 시기가 좀 갑작스럽다는 느낌이라서.」
「친한 친구가 있는데, 이번에 대학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됐습니다. 아마 조쉬도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한국에선 요즘 강사법이니 비정규직이니 시끄럽거든요.」
「음, 그래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편히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하시는 거군요. 이야, 나도 나중에 은퇴하면 언론사 하나만 차려주시죠.」
「그건 좀 고민해 볼게요.」
두 사람의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조슈아는 녹음기를 켜는 대신 바쁘게 대화를 글자로 옮겼다.
「좋아요. 제 질문은 이쯤 마무리하고 싶네요. 음, 테마기사를 하나 써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 거죠?」
「내용을 들어보고요.」
「민우 씨 이야기보다는, 뭔가 한국의 대학교육 구조에 대한 기사를 내보고 싶군요. 사실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거라면 좋습니다.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조쉬를 편애하면 다른 분들이 질투하니까.」
그때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어느새 차는 강남역에 도착했다.
조슈아가 빠르게 짐을 챙기며 문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끝내주는 기사 기대하시고!」
「잘 가요.」
조슈아는 윙크를 남기고 지하철역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