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11화 (311/500)

다시 모인 사람들 (3)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인이 비행기와 연결된 게이트에서 나왔다. 레몬빛 머리를 찰랑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사진작가가 있었다면 셔터 타이밍이라고 외쳤을 그런 장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 멈추며 그녀를 응시했다.

“헐 대박! 연예인 아니야?”

“누구지? 외국인인데.”

“영화 홍보하러 온 건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 자유로웠다. 그 흔한 경호원도 없었고, 짐을 들어주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밖에서 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퍼스트 클래스가 아니라 이코노미를 이용했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일반인인 것이다.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뒤로한 채, 여권을 품에서 꺼낸 여자는 입국심사대에 섰다.

“방문 목적은 무엇입니까?”

“업무차 왔습니다.”

“숙소는 어디입니까.”

“골든팰리스 호텔.”

여자의 대답은 또렷했고, 발음은 정확했다. 그 누구도 외국인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한국어가 무척 유창하시군요. 어떤 업무를 하시게 되시죠?”

“비서 업무입니다. 아주 유명한 분을 다시 모시게 되었네요.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입국했네요.”

“유명한 분이라면…….”

“프로페서 박민우.”

“확실히 유명한 분이군요.”

쿵!

입국 심사원이 미소를 지으며 도장을 찍었다.

여권을 챙긴 레아 앤더슨은 출구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는 택시에 올라 숙소인 골드팰리스 호텔이 아닌, 명인대로 가 달라고 말했다.

***

똑똑.

노크가 들리자 민우는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들어오세…… 어? 레아 씨?”

깜짝 놀란 민우가 벌떡 일어났다.

한편 엄청난 미녀가 들어오자, 한쪽에서 공부하고 있던 차민재와 허윤도 눈을 큼지막이 뜰 수밖에 없었다.

레아는 단순히 외국인이 아니라 혼혈이었다. 그만큼 이국적인 매력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고, 차민재와 허윤도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성이었다.

구두를 또각거리며 다가온 레아가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잘 지냈죠. 그런데 한국에는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에요?”

“예? 연락이 없다니…….”

이번에는 레아가 놀랐다. 분명 센트럴 북스에서 자신이 비서로 파견될 거라는 연락이 갔어야 했는데.

전후 관계를 따져보던 레아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또 제임스 사장님이 장난을 치신 것 같네요.”

“장난이요?”

“저는 매니저님의 업무를 보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입국했어요. 앞으로 비서로서 매니저님 업무를 도울 겁니다. 그런데 발령 소식이 안 갔다는 건, 아무래도 제임스 사장님이 일부러 말씀을 안 하신 거 같아서요.”

“하긴, 제임스 씨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죠.”

제임스는 서프라이즈 파티를 좋아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의 맥락이 아닐까.

민우는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좀 앉으시죠. 커피 어때요?”

“감사합니다.”

민우는 아까 내린 커피를 두 잔 준비했다. 그중 하나를 레아의 앞에 놓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저는 센트럴 북스 측에 요청한 게 없는데. 프로젝트 하는 것도 없고요. 옛날이야 <인문과학총서>를 발간해야 했으니 레아 씨가 온 거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음, 그게요. 약간 제임스 사장님의 개인적인 지시기도 했어요.”

“개인적인 지시라면…….”

“아무래도 사장님께서 요즘 재미있는 소식을 들으신 거 같아서요. 매니저님 관련해서요.”

“아아.”

대강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민우가 잠시 시선을 돌리니, 아예 뒤돌아보며 이쪽을 주목하고 있는 두 청년이 보였다.

민우는 눈짓으로 경고를 보내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역시 그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네요. 하긴, 제임스 씨는 송승현 이사님과도 접점이 있으니까.”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자신의 이름이 걸린 문학상……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되지 않아요. 그뿐이 아니죠? 매니저님의 일생이 드라마로 펼쳐진다는 게 굉장히 설렙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짐도 안 풀고 바로 오신 거예요?”

민우는 레아가 끌고 들어온 캐리어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아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인사는 드리고 쉬어야죠.”

“집은 구했고요?”

“당분간은 호텔에 있을 예정이에요. 집은 천천히 구해볼 생각입니다.”

“뭐, 레아 씨는 한국 상황에도 밝으니까 별문제 없겠죠?”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뭔가 뜻밖의 선물인 것 같은데……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두 사람은 몇 년 만에 악수했다.

뒤에서 이 장면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허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예전에 레아를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그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변장만 하지 않았더라도 준수한 외모를 뽐내며 데이트를 신청했을 텐데. 하지만 민우 연구실에서 취재를 하는 건 비밀이었으니 밝힐 순 없었다.

레아가 물었다.

“그럼 내일 기자회견부터 준비하겠습니다. 오후 3시 지음사 프레스룸, 맞죠?”

“역시 레아 씨는 대단하네요.”

이수빈밖에 모르던 스케줄을 이미 꿰고 있었다. 싱긋 웃은 레아가 읽던 수첩을 닫았다.

“인문대 앞으로 차량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고마워요. 돌아가서 푹 쉬세요.”

프로다운 미소를 지은 레아가 공손히 인사를 남기고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그와 엇비슷하게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엔 이수빈이 들어왔다.

“누구야? 외국사람 왔다 나가는 거 같은데?”

“레아 씨.”

“어? 진짜?”

“인사 안 했어?”

“뒷모습만 봐서 긴가민가했지. 어쩐지 눈에 확 띄더라. 그런데 한국엔 왜 오셨대?”

민우는 레아가 온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한편 그 모습을 보며 허윤은 소소한 깨달음을 얻었다. 민우는 축복받은 사나이라고.

이렇게 주변에 미인이 많다니.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닐까?

***

다음 날, 오후 3시가 되자 민우는 인문대를 나섰다. 약속한 대로 레아가 고급 세단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민우는 늘 그렇듯 조수석에 올랐다.

기어를 넣고 악셀을 밟으며 레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왠지 옛날 생각이 나네요.”

“그러게요. 그때는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잘 몰랐는데, 꽤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소중한 추억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레아는 프로였다. 티를 내지 않으며 묵묵히 운전을 이어갔다.

잠시 후 차가 지음사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귀찮은 손님이 몇 명 있는 것 같네요.”

“귀찮은 손님이요?”

“기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민우가 다시 전방을 살폈다. 확실히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몇 보였다.

“어쩔 수 없죠. 오늘 기자회견은 이미 공지된 거니까요.”

민우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박민우 교수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얼굴도 보였는데, 그래도 죄를 지은 게 아니라 기자들은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먼저 나선 것은 민우가 아니라 레아였다.

“이곳에서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부탁드려요.”

“드라마 관련하여 한 말씀만…….”

“룰을 지키지 않으면 프레스룸에서 질문을 받지 않겠습니다. 방금 질문하신 기자분, 어디에서 오셨죠?”

칼 같은 경고 한마디에 기자들이 움찔했다. 레아가 없었다면 속절없이 붙잡혔겠지. 제임스 사장이 왜 그녀를 보냈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언론과 척 져서 좋을 건 없다는 게 민우의 판단.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섰다.

“자자, 이따 회견장에서 말씀들 나누시죠. 여기는 장소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잠시 실례.”

민우는 인파를 헤치고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전에 송승현 이사와 간단히 사전 협의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민우는 이사실로 바로 움직였다. 레아는 이사실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사실 안에서 송승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오느라 고생 좀 했죠?”

“말도 마세요. 지하주차장에까지 기자들이 다 깔린 것 같더라고요.”

“하나도 아니고 두 건이나 일을 추진하려니까 그렇게 된 거죠.”

“마치 제 잘못인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능력이 출중한 것도 죄예요.”

“하하하하.”

민우는 굳이 겸손을 떨지 않았다. 시원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인터뷰는 문학상 제정 건이지만, 음. 역시나 드라마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안 그래도 지하주차장에서 누가 묻더라고요. 드라마 관련해서 한 말씀만 해달라고.”

“대답했어요?”

“위에서 이야기하자고 했죠.”

송승현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오늘 드라마 관련 질문은 모두 차단할 거예요. 문학상 제정에 외신들도 관심을 갖고 여러 기자들이 왔어요. 그러니 한 주제에만 집중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외신까지 초빙하셨어요?”

“물론이죠. 특히 미국, 영국에서 관심이 많았어요. 민우 씨 이름은 거기에서 특히 유명하니까.”

미국에서는 센트럴 북스와의 협업으로 유명했고, 영국에서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이후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탓에 유명했다.

번역가로 박민우 이름이 올라가 있으면 일단 사보는 팬층도 꽤 두껍다.

“알겠습니다. 그럼 드라마 건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을게요.”

“아마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기자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우리 회사가 총대 멜 테니까, 개인 인터뷰보다는 우리 쪽으로 넘기는 게 서로 편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게요.”

“추가 질문은?”

“없는 거 같네요. 어차피 이런 기자회견은 익숙하니까요.”

“마음에 드네요. 자, 그럼 갈까요?”

두 사람은 일어나 프레스룸으로 움직였다.

지음사는 민우와 송승현 이사 덕에 세계적인 출판사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프레스룸을 따로 꾸밀 정도로 대외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50명은 족히 넘는 기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국적까지 다양했다.

찰칵! 찰칵찰칵!

플래시 세례가 퍼부어졌다.

살짝 미소를 지은 민우와 송승현 이사는 준비된 자리로 가 차분히 앉았다. 곧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행사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올리며, 지금부터 박민우 문학상 제정에 대한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질문을 짧고 간단하게 부탁드리며, 주제에 관련된 질문만 받겠습니다.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으신 다음 질문해 주십시오.”

동시에 무수히 많은 손이 올라갔다. 사회자가 젊은 남성을 지목했다.

“안녕하세요. 한세신문의 정철 기자입니다. 먼저 송승현 이사님께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박민우 문학상 제정 목적이 무엇입니까?”

“목적이라면, 의의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맞습니다.”

송승현 이사가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자 다시금 카메라 셔터음이 프레스룸 안을 가득 메웠다.

“일단 가칭 ‘박민우 문학상’은 단순히 문학에만 국한된 상이 아닙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학술과 예술 등 넓은 분야를 대상으로 하지요.”

한창 설명을 이어가던 송승현의 오른손이 민우를 가리켰다.

“여기 계신 박민우 교수님은 그 모든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굳이 교수님의 커리어를 여기서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그건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시간 낭비죠.”

이런 금칠은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민우는 쑥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송승현의 브리핑이 계속 이어졌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학과 학문은 충분히 자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박민우 교수의 이론과 그의 손을 거친 번역물이 새로운 한류를 만들어내고 있는 시점이지요. 그것이 이 상의 제정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승현 이사의 당당한 목소리가 프레스룸을 울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 그런가요? 박민우 교수님.”

뜻밖의 질문에 민우가 흠칫 놀랐다.

그 모습을 영악하게 바라보던 송승현 이사가 조용한 오조로 속삭였다.

“왜요. 칭찬이 부족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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