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인 사람들 (2)
수강신청변경기간이 끝났음에도 민우의 강의는 만원이었다.
넓은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지난주와는 다르게 뒤에 서서 강의를 듣는 학생은 없었다는 점이다.
민우는 출석부를 펴고 펜을 쥐었다.
“자, 그럼 출석 부르겠습니다.”
민우는 다른 교수들과는 다르게 출석을 부르는 시간을 길게 잡는다. 이름을 부르고, 그 학생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른 교수들은 출석을 생략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하곤 하는데 민우는 이것도 수업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표정을 읽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민우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스승인 서지훈 교수가 그렇게 해왔기에 배운 것이다.
“허택.”
“네!”
민우는 웃음을 참았다. 허택이라는 학생은 다름 아닌 변장을 한 허윤이었기 때문이다.
씩씩하게 손을 들며 대답을 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웃긴지.
이어 민우는 다음 사람을 불렀다.
“이소윤.”
“예.”
흰 가운을 입은 이소윤이 대답했다.
이미 그녀는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아마 근사한 외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교양 강의에 가운을 걸치고 들어오는 경우는 보기 힘드니까.
곧 출석 체크가 모두 끝나고, 민우는 강단 앞에 섰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서두가 시작되자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민우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여러 방법 중 간단한 방법은 바로 기준점을 설정해서, 그 기준점과 대상의 관계를 파악하는 겁니다. 즉, 세계를 기준점으로 한다면, 그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살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고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민우는 미리 챙겨 온 사과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 손에 든 채 말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 이 사과를 봅시다. 이 사과를 제외하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저도, 이 강의실도. 그리고 여러분들도. 나아가서는 지구와 태양까지도.”
민우가 던진 화두는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상태로 민우가 계속 강의를 진행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과라는 물질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요?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면, 이 물질의 존재 의의는 없을 겁니다. 이 사과를 먹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사과라는 물질의 존재 의의가 성립하는 거죠. 그래서 기준점을 세우고 대상의 관계를 모색하는 작업은 중요합니다.”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의 반응을 한번 살펴본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이 작업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시기와 인물에 따라서 표현하는 용어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크게 말하면 관념론과 유물론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두 가지 논점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민우의 시선이 허윤을 향했다.
“저 혼자 떠드는 건 재미가 없으니 한번 질문해볼까요. 거기, 허택 학생?”
“……예?”
“관념론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어…… 그게…….”
사실 허윤은 연예인치고 독서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책을 좋아하기로도 유명해서 ‘독서의 밤’에 캐스팅될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어떤 용어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음…… 세상을 관념적으로 이해한다는 뜻 아닐까요?”
“하하하. 뭐, 비슷하긴 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웃었다. 허윤은 변장을 했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움은 금방 잊었다.
지금은 민우를 관찰하며 그의 행동과 말버릇 하나까지 모두 캐치해야 했으니까.
실제로 허윤이 준비한 노트에는, 민우의 강의 내용은 물론 그의 제스처나 말버릇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용어를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이 두 개념에 대해 모두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겁니다. 근사한 단어는 쓰지 않아도 되니 그냥 쉽게 설명해도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분께 질문해 볼까요.”
민우의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학생들이 긴장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이소윤 쪽이었다.
“우리 예비 의사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한번 들어볼까요. 이소윤 학생.”
‘예비 의사’라는 표현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이소윤은 살짝 긴장한 채로 예, 하고 대답했다.
“관념론은 정신과 영혼 등, 보이지 않는 감각을 우선합니다. 이 감각을 통해 외부에 있는 물질을 인식한다는 개념입니다. 원효 대사의 해골물 설화가 있는데요. 인식에 따라 사물의 본질이 달라질 수 있는 좋은 예시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고요.”
민우는 살짝 놀랐다.
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깔끔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네요. 그럼 유물론에 대해서도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유물론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의식 밖에 사물이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견해입니다. 제 전공을 살려서 비유해보면, 인간의 정신과 감정 작용이 뇌의 호르몬 분비 등의 화학적 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관점을 들 수 있겠네요. 어…… 조금 극단적인 예가 될 것 같은데, 사랑은 영혼의 교감이 아니라 호르몬의 산물이라는 입장입니다.”
“완벽하네요. 다들 박수 한 번 쳐볼까요?”
민우와 학생들이 박수했다. 이소윤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금 이소윤 학생이 제대로 설명했습니다. 물론, 시대의 흐름과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에 따라 좀 달라지긴 합니다만 근본 개념은 같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인간의 의식을 통해 사물이 인식되느냐, 아니면 사물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성립되느냐. 그 차이일 겁니다.”
큰 개념을 정리한 민우는 잠시 말을 끊고 학생들이 나름 정리하는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강의는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처음 얼어 있던 분위기가 해소되고, 학생들이 하나둘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한번 질문이 시작되자 물꼬가 트이듯 끊임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민우는 모든 질문에 충실히 답했고, 추가 자료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을 기약했다.
“질문이 많이 나와서 좋네요. 강의의 기본은 질문과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질문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손을 들어주세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민우는 오늘 설명한 것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말을 맺었다.
“다음 시간에는 관념론의 역사와 핵심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예습해 오시면 좋을 것 같네요.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민우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몇몇 학생들이 앞으로 나와 지각 처리를 하고, 모든 준비물을 가방에 넣은 민우는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고생하셨어요. 교수님.”
이소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는 웃으며 답했다.
“골탕 먹이려고 질문한 거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라.”
“아니에요. 갑자기 질문이 와서 좀 떨리긴 했는데 그래도 아는 내용이었어요.”
“평소에 책 많이 읽나 봐?”
“딱히 취미랄 게 없어서요. 틈나는 대로 읽고 있어요.”
두 사람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민우는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이고, 이소윤은 명인대 부속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람을 위한다는, 같지만 조금 다른 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정신은 어디에 기인한다고 생각해?”
민우의 질문에 이소윤이 살짝 웃었다.
“혹시 성적에 반영되는 질문인가요?”
“너 청강생이잖아.”
“저 시험도 볼 생각이에요. 물론 과제도 할 거고.”
열성 청강생들은 과제도 하고 시험도 본다. 이소윤은 그런 부류에 속하는 듯했다.
“이런, 일거리가 늘었네.”
“어…… 부담되심 하지 말까요?”
“아니. 편한 대로 해. 그냥 의사로서 생각을 듣고 싶어서 물어본 거야. 테스트가 아니고 궁금증 정도? 나는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내가 좋아하는 강의는 내가 학생들에게 배울 게 있는 그런 강의야.”
이소윤이 다시금 웃었다. 청강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저는 의대생이니까, 아무래도 뇌의 화학적 변화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호르몬이 인간의 감정과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호르몬 같은 화학물질만으로 인간의 정신세계가 완성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요.”
“영혼의 존재를 믿는 거야?”
이소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시선을 멀리 던지며 입을 열었다.
“믿고 싶을 때가 있긴 해요.”
“언제?”
“얼마 전 실습 때였어요. 음…… 병실에서 코드 블루가 떴는데, 의료진이 몰려오고 씨피알을 했죠. 저는 실습생 신분이라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제발 눈을 떠 달라고.”
민우는 더는 물어보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뇌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에게 눈을 떠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그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거 같아요.”
“아직 결론을 얻은 건 아니구나.”
“좀 더 살아가다 보면 결론이 나오겠죠.”
살다 보면 때로는 이론보다 경험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의사로서 경험을 쌓다 보면, 이소윤은 충분히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그 환자분은 어떻게 됐어?”
“의식을 차리셨어요. 아직 중환자실을 벗어나진 못하셨지만.”
“다행이네. 쾌유를 빌어야겠다.”
“감사해요.”
그렇게 대답하며 이소윤은 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갈림길에 섰다. 이소윤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고, 민우는 연구실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 교수님. 다음 강의 때 뵙겠습니다.”
“오늘도 고생해.”
“네.”
민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연구실로 돌아왔다.
안에는 허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민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질문을 던져서 삐친 것 같다.
“형! 거기서 질문을 하시면 어떡해요?”
“와, 청강생이 질문한다고 뭐라 하는 건 생애 처음이네. 민재야.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민재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허윤이 두 손을 들었다.
“차민재! 형 편을 들어야지 지금 웃고 있을 때야?”
“애꿎은 사람 잡지 말고, 질문이 싫으면 강의에 안 들어와도 돼. 안 말려.”
민우는 허윤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허윤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쪽팔려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한테 괜히 주목받을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뭔 소리야? 그거 걱정되면 내 연구실에 있으면 안 되지. 지금까지 손님 몇 명이나 왔는지 아는 사람이 그래?”
하긴, 맞는 말이었다.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손님들이 오고 갔으니까.
심지어 그중 절반 이상은 민우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아 참, 윤아.”
“넹?”
“좀 뜬금없는 질문인데, 너는 인간의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
“와 진짜 뜬금없네요. 형 요즘 믿는 종교 생겼어요?”
“그런 건 아니고.”
물론 허윤은 농담으로 던진 거다.
그는 민우의 질문이 오늘 수업 내용의 연장선상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나름 교양이 있는 배우였으니까.
“저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이 없다면 뭔가 좀 아쉽지 않을까요? 그런 관점이 없었다면 <사랑과 영혼>이라는 명작이 탄생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냥, 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서.”
“싱거운 분이시네.”
“싱거우면 소금 더 치든가.”
피식 웃은 민우는 수업 전에 보다 만 논문을 다시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