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09화 (309/500)

다시 모인 사람들 (1)

얼마나 방황했을까.

문득 정신을 차린 서강일은 자신이 강사연구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엔 집처럼 쓰던 곳이었지만 전용 연구실이 나온 이상 이곳에 올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끔 강민희에게 용건이 있을 때 오는 정도.

한숨을 내쉰 서강일이 돌아설 무렵, 때마침 강민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왜 멍 때리고 있어?”

강민희는 입에 메로나를 물고 천천히 다가왔다. 늘 변하지 않는 그 모습에 서강일은 픽 웃고 말았다.

아마 그녀는 정교수가 되더라도 메로나를 입에 물고 있을 거다.

한편으로는 그런 변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그제서야 서강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았다.

“그냥.”

“그냥이 아닌데? 무슨 일 있었남? 아주 그냥 나라 잃은 표정인데?”

“…….”

“아~ 역시 계약 연장 불발됐구나.”

“어떻게 알았어?”

“표정도 못 구별할 정도면 동거인 자격이 없지…… 읍! 읍읍!”

서강일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동거하는 것은 아직 비밀이었다. 알려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푸하! 숨 막혀 죽을 뻔했네! 그러니까 그냥 혼인신고 하자니까? 내 종신보험 타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고!”

“얘가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와악!”

어쩔 수 없이 서강일은 강민희를 끌고 문리대 건물을 나섰다.

건물 옆 휴게 공간에서는 학생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3월의 초입.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복작거렸다.

대부분 후배였고, 모교에서 강의를 하는 입장이라 두 사람은 으슥한 곳으로 빠졌다.

“뭐 마실래?”

“됐네요.”

서강일은 강민희를 벤치에 앉힌 다음 음료수를 뽑아왔다.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쉽사리 캔을 따지 못했다.

보다 못한 강민희가 미간을 좁혔다.

“사람이 뭐 그런 걸로 풀이 죽어 있어? 어차피 계약 안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잖아. 요즘 과 분위기도 어수선한데. 이 상황에서 무리수 두겠어?”

“짐작하곤 있었는데 현실이 되니까 아픈 걸 어쩌냐…….”

기운 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강민희의 표정도 따라 우울해졌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래도.”

“…….”

캔을 딴 서강일이 대꾸 없이 음료를 쭉 마셨다. 그러다 뜻밖의 이야기가 옆에서 흘러나왔다.

“변했어. 오빠는.”

“푸후!”

“윽! 더러워!”

그러면서도, 강민희는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으로 서강일의 입을 닦아주었다. 음료수를 뿜은 서강일은 연신 기침을 해댔다.

“쿨럭, 쿨럭! 야이, 그 상황에서 변했느니 어쩌느니 그런 얘기가 나와?”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혹시 찔리심?”

“말을 말아야지. 어휴!”

기침을 가라앉힌 서강일이 캔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곤 두 손으로 벤치를 짚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무심하리만치 쾌청했다.

“예전에는 그냥 공부만 미친 듯이 파던 시절이 있었지.”

“철 지난 옛날 이야기해서 뭐 하냐.”

“그냥. 왠지 그때의 오빠 모습이 떠올라서.”

그땐 참 멋있었는데.

그 말은 속으로 삭였다.

이번에는 강민희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맑은 구름이 고즈넉이 지나간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서강일을 응원하고 있던 강민희였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눈을 돌려 다른 길을 찾아보자.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를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것 같아서.

“장소필 선생님은 뵙고 왔어?”

“당연하지. 면전에서 계약 연장 어렵다고 이야기 들었다.”

“설마 대든 건 아니지?”

“어떻게 그래. 억울하지만 참아야지. 이 바닥 좀 좁냐? 좀 울컥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선생님도 이해해 주시겠지.”

“또 뭐라고 하셨어?”

“당분간 쉬면서 연구에 몰두해보라고 하더라. 자리가 나면 그때 지원해 보라고.”

그래도 쉴 수는 없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한일대를 제외한 다른 대학에 강의 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선생님 말씀대로 다음 학기는 좀 푹 쉬어. 강의는 한 학기 쉬고. 생계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어떻게 그러냐. 강사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조금 굶더라도 쉬는 게 좋아 보여. 요즘 오빠, 너무 조급해 보여.”

그런 이야기는 며칠 전에도 들었다. 민우와 한진섭, 이렇게 세 명이서 모여 술을 마실 때였다.

“살다 보면, 알고 있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더라.”

“지금처럼?”

그렇게 되물은 강민희가 활짝 웃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에 물려 있는 메로나는 스틱만 남았다.

“오빠, 아까 메일 온 거 봤지? 휴머니티인가 뭔가 하는 거. 할 거야?”

“일단 한다고 답장하긴 했어.”

“그럼 다음 학기엔 강의 좀 줄이고 그거에 집중해보는 건 어때?”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시야를 조금 돌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 마침 좋은 기회가 오기도 했고.

잠시 뜸을 들이던 서강일이 말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뭐 기회가 되면 해봐야지.”

“좀 더 절실하게.”

“뭐?”

서강일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시선을 강민희 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

“나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근거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까지 그 아저씨 말 들어서 손해 본 건 없잖아.”

“그 아저씨? ……아.”

강민희는 아직도 민우를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처음엔 서먹한 데다 약간의 적대심이 있어서 그랬던 거였는데, 지금은 그냥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가끔 아저씨라고 그만 부르라고 버럭하는 민우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지. 지금까지 민우가 한 일엔 다 이유와 그럴듯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실제로 호승심에 벌였던 두 번의 토론에서, 서강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박민우였다.

서강일은, 언젠가 민우가 학회 토론이 끝나고 했던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내가 만든 무대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무대야. 그러니까 네 몫 잘 챙겨 가라.

어느새 서강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럼 염치 불고하지만 다음 학기엔 좀 신세 져볼까?”

“대신 집안일은 오빠가 다 하삼.”

“오케이!”

오랜만에 나온 쾌활한 느낌의 오케이 사인이었다.

***

노크가 들렸다. 논문 자료를 살펴보던 민우가 외쳤다.

“네, 들어오세요.”

“교수님!”

찾아온 손님은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였다. 연락도 없이 오는 경우는 드문데,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아니,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연락도 없이.”

“근처에 볼일 있다가 잠시 들렀어요. 그나저나 대학은 참 좋은 거 같아요! 아무 때나 찾아와도 만날 수 있고요.”

“하하하. 시간 맞춰 찾아온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민우는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손수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근데 진짜 잠시 들른 거예요? 그것치고는 눈동자가 너무 반짝거리는데요.”

“역시 우리 교수님!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와 함께 박윤지가 핸드폰을 슬그머니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지금까지 박윤지와 함께 한 시간이 길다. 석사 때, 정확히는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인터뷰할 때 처음 만났으니, 어림잡아도 한 8년은 된다. 그래서 그 동작의 의미를 잘 안다.

민우가 그녀의 핸드폰을 집었다.

“일단 어떤 걸로 오셨는지부터 듣고 결정할게요.”

“지음사에서 엄청난 소스가 들어왔어요. 사실인지 확인 좀 하려고요.”

“지음사라면…….”

소스는 두 개다. 문학상 건과 드라마 건. 어느 쪽이든 정보를 주기가 조금 난처하다.

“어떤 소스를 들으셨죠?”

“<프로페서> 드라마화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일까요?”

그 말에 한쪽에 자리잡고 있던 허윤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책을 읽었다.

“음, 그거라면 오프 더 레코드로 하겠습니다. 아직 출판사와 협의 중인 부분이 많아서.”

“알겠어요.”

박윤지 기자는 녹음 정지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민우가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일단 제작하는 건 사실이고요. 정확한 일정은 나온 게 없습니다. 근데 윤지 씨는 문화부 기자 아닌가요? 연예부는 따로 있지 않나.”

“그게, 아무래도 교수님하고 친분이 있다 보니 선배한테 부탁받았어요. 사실관계만 확인하면 기사 내보내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캐스팅은 어떻게 됐을까요? 마음에 두신 배우라도 있으신가요?”

그 질문에 민우는 슬쩍 허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도 귀를 쫑긋하며 이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민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캐스팅은 제작사에서 결정할 문제고, 지금 각본 작업 중인 것을 제외하면 제가 아는 건 많지 않아서요.”

“판권료는 대충 어느 정도나 받으셨을까요?”

“노 코멘트입니다.”

다소 단호한 대답이었음에도 박윤지 기자는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감은 어떠실까요?”

“걱정 반 기대 반입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건 양날의 검과 같거든요. 조심스러우면서도, 때로는 그 결과가 궁금해지죠.”

“자세한 이야기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준비되는 대로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인터뷰는 짧게 끝났다. 속보를 내보내기 위해 박윤지 기자는 자리를 먼저 떴다.

‘사전 협의되지 않은 인터뷰는 하지 않는다고 문밖에 붙여둬야 하나? 왠지 몰려들 것 같은데.’

그렇게 잠시 고민했지만, 괜히 뒷말이 나올까 싶어 그만두었다.

딩동!

그때 메일이 도착했다. 민우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서강일과 강민희가 거의 동시에 메일을 보냈다.

‘어디 보자…… 좋아. 두 사람도 참가 의사를 밝혔구나. 그럼 모두 동의한 거네?’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

팀 307호 멤버는 총 10명. 각자 전문분야가 따로 있지만, 서로 같은 꿈을 품고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몸처럼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이제 정기적으로 모여서 디테일을 쌓아가면 되겠어.’

민우는 멤버들이 보내온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취합해 스케줄표를 만들었다.

‘다 되는 시간은 이번 주 일요일 저녁. 이때로 해야겠구나.’

민우는 바로 단톡방에다 모임 공지를 올렸다. 읽었다는 숫자가 하나둘 사라질 때마다 격하게 반기는 멤버들의 톡이 올라왔다.

그때 의외의 톡이 올라왔다.

정연주: 그날은 저희 집에서 모이는 거 어때요? 최근에 이사했는데, 집들이 겸해서요!

섭섭한애: guazuaaaaaaaa!!

내무부장관: 와! 진짜? 이사했었구나. 필요한 거 없어? 가는 길에 사 갈게~

주님: 굳이 사 갈 필요가 있나? 남친 빼고 다 있을듯

메로나: 저 메로나요

정연주: 하하하;; 남친은 됐구요~ 메로나는 잔뜩 준비해 놓을 테니 다들 오세요!

하지은: 잘생긴 남자도 준비해주나~?^^

섭섭한애: 누가 나 부름?

주님: 미친

주님: 아죄송

만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민우는 톡을 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때 차민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선생님?”

“어? 아, 미안. 너무 웃었나?”

“아뇨. 그게…… 수업 안 가세요? 곧 시작인데요.”

“헉! 깜빡했다!”

즐거운 일을 계획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민우는 후다닥 일어나 수업 교재와 출석부를 챙기고 강의실로 향했다. 차민재는 그런 지도교수의 모습을 보곤 미소 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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