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다 계획이 있구나? (3)
한일대학교 인문대 초빙교수 연구실.
서강일은 일찍 연구실에 출근해 오늘 강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강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관록이 쌓인 상황이다. 누구보다 연구에 매진했고, 학생들에게 밤새 들려주고 싶을 정도의 많은 결과를 얻었으니까.
실제로 그의 연구실적은 정량적인 측면에서 교수들 중에서도 탑이었다.
하지만 서강일은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았다.
출세욕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새로운 것을 전해주고 싶은 그런 본질적인 욕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년에 했던 동일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사이 발표된 새로운 학술적 발견이나 내용을 빠짐없이 찾아보고 있었다.
띠링!
그때 메일 수신음이 울렸다.
‘민우가 보낸 메일?’
발신인에 민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강일은 보던 논문을 치우고 메일을 클릭했다.
내용이 상당히 많았다. 첨부파일까지 있었는데, 일단 서강일은 내용에 집중했다.
‘인문학 공동체를 만든다고? 휴머니티라…….’
이미 코어 멤버들이 모여서 논의를 끝냈고, 나머지 사람들도 의견을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메일이 마무리되었다.
서강일은 첨부파일을 열었다.
정연주가 지난 몇 년간 준비한 내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서강일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내용에 빠져들었다.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있었구나. 왜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지?’
흥미가 동했다. 인문학의 길을 걷는 학자로서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곧 현실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온 파도가 모래성 같은 희망을 부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먼바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걸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그 시간에 논문을 한 편이라도 더 쓰면…….’
다시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그래서 메일 답장 버튼을 눌렀음에도, 서강일은 쉬이 그 내용을 채우지 못했다. 그의 손은 키보드 위에서 우뚝 멈춰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민우 녀석하고 만났던 그때였다면 이렇게 고민도 안 하고 바로 하겠다고 답장했겠지?’
진한 한숨이 나올 무렵, 문이 열렸다.
멀쑥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초빙교수 연구실을 같이 쓰고 있는 박용진 교수였다.
“오셨어요?”
“이야. 오늘도 아침부터 부지런하구만! 서강일 선생.”
박용진 교수는 문학 파트 중 시 분과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일대 출신은 아니지만 나름 능력이 출중했다.
소설 분과인 서강일과는 전공이 좀 다르지만, 그래도 마음에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라 지난 1년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박용진 교수의 손에는 커피가 들어 있는 캐리어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커피 하나를 꺼내 서강일에게 건넸다.
“자자, 카페인 충전하면서 일해야지. 한잔 드시라고.”
“아, 늘 감사합니다. 선생님. 매번 얻어먹기만 해서 어떡해요?”
“괜찮아 괜찮아! 좋은 게 좋은 거지.”
서강일은 두 손으로 커피를 받았다.
나이 차이가 좀 나기도 했고, 왠지 삼촌 같은 느낌에 서강일도 박용진 교수를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는 커피만이 아니라 집에서 싸온 과일이나 간식 같은 것들을 나눠주곤 했다.
초빙교수라면 살림도 넉넉하지 않을 텐데 어디서 이런 여유가 나오는 걸까. 게다가 결혼도 하고 애도 둘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그를 보면 가끔 걱정되면서도 부럽다는 묘한 감정이 들곤 했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었으니까.
“가만 보면 이렇게 연구실 같이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단 말이지. 커피 나눠 마실 사람도 있고 말이야.”
“매번 사 오시는 거 부담되지 않으세요? 차라리 연구실에 드리퍼라도 놓고 내려 마시는 게 경제적으로 좋을 거 같은데.”
“음, 그게. 드립 커피는 나랑 좀 안 맞아서. 하하하. 부담 갖지 마! 학교 근처에 저렴한 커피점을 찾았거든.”
“저야 감사하지만…….”
박용진 교수의 웃음엔 가식이 없었다.
서강일은 커피를 마시며 문득 시선을 돌렸다.
박용진 교수 책상 위에는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 있다.
‘참 가정적인 사람이야.’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놓여 있다. 각 위치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각도로.
성품도 온화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걸 보면, 아마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 거다.
실제로 점심을 먹을 때나, 쉬는 시간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편인데 그때마다 가족 자랑이 끊이질 않는다.
막연한 부러움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은 늘 여유가 많으신 거 같아요. 그래서 부럽네요.”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요즘 좀 생각이 많아져서요.”
물끄러미 서강일을 바라보던 박용진 교수가 빙긋 웃었다. 그가 의자에 몸을 기대니, 끼기긱 하는 소리가 나며 뒤로 기울어졌다.
그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나도 서강일 선생처럼 조바심이 나서 이것저것 일을 벌리던 때가 있었지.”
“진짜요?”
“그 무렵엔 다들 비슷하지 않아? 나 갓 대학원 졸업했을 때였나. 그땐 지금하고 완전히 달랐다고. 이렇게 여유 같은 건 못 부렸지.”
서강일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왠지 그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전임 자리를 구해보려고 여기저기 쏘다녔어. 정말 촌에 들어선 대학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차비도 안 나왔지. 강의료가 쌀 때였으니까 말이야.”
그런 경우도 종종 있다.
지방 아주 먼 곳들은 재정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강사료를 많이 지급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면 적자가 나는 케이스가 나오는 거다.
그래도 거절할 수 없다.
이 바닥에서 인문학 관련 전공자가 강의할 수 있는 곳은 굉장히 한정되어 있으니까. 거기에 국문학이라면 더더욱.
“제 아는 선배들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경력이 없는 강사를 써주는 대학은 많지 않으니까.”
“맞아.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그냥 공부 때려치우고 막노동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했었지. 그런데 그게 쉽나. 글밥 먹던 사람이 다른 밥을 먹으면 체하는 법이지. 막노동판에서 며칠 구르다 다리를 다치고 말았어. 그 길로 한 달 정도 입원했었나. 그런데 어느 날 간병하던 와이프가 이러더라고. 자긴 괜찮으니 좀 천천히 살자고. 여유와 건강이 최고라고.”
말이 잠시 끊겼다.
천장을 바라보던 박용진 교수는 추억에 잠긴 미소를 짓고 있다.
“그래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와이프 말대로 해봤는데, 이거 웬걸. 정답이었어. 천천히 가보니 못 보고 지나쳤던 것들이 보이더라고. 그리고 인생의 진짜 행복을 알게 됐다 이 말씀이야.”
“정말 좋은 분을 만나셨네요.”
“하하하. 남들은 픽션이다 뭐다 하지만 진짜 있었던 일이야.”
서강일이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 같아, 박용진 교수는 박수를 한 번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서 선생! 이게 정답이라는 건 아냐. 독신인 사람도 있고, 뭐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는 다른 거 아니겠어?”
“아, 그렇죠.”
“하지만 이건 분명해. 가는 속도를 조금 줄이면 못 보던 게 보인다는 거.”
“속도를 조금 줄인다…….”
“서강일 선생도 천천히 걸어가 봐. 아직 젊잖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아이쿠. 미안미안! 꼰대같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놨네. 대충 듣고 흘려.”
“아뇨.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감사해요.”
씨익 웃은 박용진 교수는 테이크아웃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하지만 서강일에게는 여운이 남았다.
‘속도를 조금 줄여보라고?’
잠시 생각에 잠긴 서강일은 모니터를 다시 주목했다. 메일을 쓰는 창이 출력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고 답장을 하려고 했었다. 지금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때니까.
하지만 박용진 교수의 말을 듣다 보니, 뭔가 생각할 게 많아졌다.
조금 천천히 걷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한번 해볼까.’
결심을 내린 서강일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메일을 보냈다. ‘휴머니티’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메일을 보내고 나니 가슴이 조금 후련해졌다.
이런 기분, 얼마만에 느껴보는 걸까. 서강일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울 무렵.
드르르륵!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무심결에 발신자를 확인한 서강일은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지도교수 장소필의 전화였던 것이다.
“네, 선생님. 서강일입니다.”
― 그래. 지금 바쁜가? 시간표를 보니 강의 시간까진 좀 남은 것 같은데.
“아뇨.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실까요?”
― 시간 되면 잠시 내 연구실로 좀 건너오지.
“바로 가겠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장소필 교수가 이렇게 직접 연락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통 어떤 일이 결정되었을 때 전화를 하곤 했는데, 오늘이 그랬다.
‘혹시…… 초빙교수 계약 연장 건으로?’
하지만 설레발은 금물이다.
옷매무새를 바로 한 그가 바로 장소필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절도 있게 노크한 그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앉지.”
깊게 우린 차향이 가득했다.
하지만 장소필은 차 한 잔 내주지 않고 서강일과 마주 앉았다.
“강의는 할 만한가?”
“매일 즐겁습니다. 학생이긴 하지만 제 후배이기도 하잖습니까. 유대감이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니…… 강일이 너는 여기에 자리 잡는 게 꿈이었지.”
“예.”
“하지만 사람은 꿈만 꾸면서 살 수는 없는 법.”
씨익.
장소필 교수가 웃었다. 순간 서강일은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지막 말이 너무 불길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번 학기가 아마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예?”
“잘 못 들었나?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할 수 없다는 말이야.”
멍하니 있던 서강일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정신을 차린 그가 조심히 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설마, 나에게 반항하겠다는 건가?”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강의평가나 연구업적이 준수한데 왜 계약 연장이 안 되는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순진한 척을 하는군.”
장소필 교수가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았다. 그런 삐딱한 시선에서 서강일의 눈을 노려보았다.
“강의평가와 연구업적은 단순 참고 자료야. 결국 계약을 연장하는 건 그 사람이 우리 과와 학교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로 따져야 하지. 바꿔 물을까. 그래서 자네는 나에게 무엇을 해줬나?”
“…….”
서강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도교수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를 위해 한 일은, 학부 시절부터 따진다면 책 한 권으로 묶어도 될 만큼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버려지는 건가?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이건 아니다. 서강일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저는, 선생님을 위해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겠나. 너는 늘 박민우 선생에게 당하기만 했지. 두 번의 토론에서 두 번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어. 명인대 선생들이 나를 비웃었겠지. 특히 민영환 선생은 더더욱.”
팔걸이를 쥐고 있는 장소필 교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내쳐지는 게 박민우 선생 때문이라는 겁니까?”
“여러 이유 중 하나일 뿐이야. 그리고 내쳐지다니! 이 사람,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말게. 계약 연장을 못 했다고 내쳐진다면 매해 대학에서 내쳐지는 사람만 수백이겠어.”
“선생님.”
서강일이 울분을 꾹 참아 말했다. 장소필이 태도를 바꿔 달콤히 회유했다.
“그리고 아예 물러나라는 것도 아니잖나. 응? 이번에는 학과 사정상 계약 연장이 어렵지만, 나중에 자리가 나면 지원하면 되는 거겠지.”
“…….”
“그러니 잠시 쉬고 있게. 이 기회에 연구에 몰두해보는 것도 좋겠군.”
민우의 메일을 받고 좋았던 기분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먼저 그것을 깬 것은 서강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서강일은 연구실을 나왔다.
문이 닫혔다.
하지만 쉬이 발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