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07화 (307/500)

넌 다 계획이 있구나? (2)

“어떻게 왔어?”

주예린이 여기 모인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정연주가 생긋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제가 못 올 곳 왔나요? 저도 나름 이곳 졸업생인데…….”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바쁘신 청문대 이사장님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행차하셨냐 이거지. 적진 탐색? 아니면 세작 접촉? 아니면 박민우 교수 스카웃?”

마지막 한마디에 모두가 빵 터졌다.

연주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녜요. 실은 민우 오빠 연락 받았어요. 제가 보내드린 기획서 검토하신다고. 그래서 짬 내서 왔어요. 아무래도 직접 뵙고 설명을 드려야 좋을 것 같아서요.”

“역시 꼼꼼하구나.”

모두가 주예린의 평가에 동의했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자리를 좀 옮기자. 지금 연구실 비어 있는 사람?”

이수빈이 손을 슬쩍 들었다.

“제 연구실로 가요. 오늘 오후에는 스케줄 없거든요.”

“좋아. 가자.”

모두가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다 같이 연구실로 가다 보니 문득 대학원 시절이 떠올랐다.

옛날엔 이렇게 우르르 모여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서 노닥거리곤 했는데, 이제는 교직원식당과 연구실을 이용하는 편이다.

이수빈의 연구실에 도착한 멤버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은 민우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그는 냉장고를 열어 간단히 먹을 간식을 준비했다.

이수빈이 물었다.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니?”

“사실 좀 됐어요. 예전에 알 카흐파 의장님 초대로 아프리카에 갔을 때였을 거예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어요.”

“그거 꽤 오래전 아냐?”

이수빈이 되물었고, 옆에서 차를 준비하던 민우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때 연주가 그랬어. 자기도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고.”

“와, 대단하네…….”

“다 누구 덕분이죠.”

정연주는 수줍게 말했고, 멤버들은 민우를 바라보았다. 다과를 준비하는 그의 등이 여느 때보다 크고 넓게 보였다.

“민우 오빠는 오로지 학문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어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걸 보면서 용기를 얻었어요. 나도 할 수 있다고.”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수빈도, 한진섭도, 주예린도 민우에게 그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정연주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오빠처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이런 기획이 나왔죠.”

“돈을 뜻깊은 곳에 쓰는 것도 대단한 재능이야. 먹으면서들 이야기합시다.”

다과를 테이블에 놓으며 민우가 말했다.

약속했다는 듯 모든 멤버들이 민우가 아까 카페에서 나눠준 기획서를 꺼냈다.

정연주가 설명을 시작했다.

“요즘은 대학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겼어요. 국내에서도 대학의 권위가 많이 사라지고 있고요. 적어도 여기 계신 분들은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들이잖아요. 아마 다들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그렇지. 학위가 중요한 게 아니지. 배운 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 아닐까.”

한진섭의 한마디에 정연주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현실적으로 대학을 설립하는 건 쉽지 않아요.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니까. 하지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우리만의 캠퍼스를 만들면 어떨까요?”

“우리만의…… 캠퍼스?”

“학점과 취업에 연연하지 않고, 누구나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고, 전해주고 싶은 것들을 가르칠 수 있는 그런 지성 공동체.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여기에 모인 멤버들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듣고 허무맹랑한 꿈이라고 이야기했을 터다.

하지만 멤버들은 다르다.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년간 함께하며 그 기적을 경험했으니까.

민우가 은근히 물었다.

“이런 시기에 그런 기획을 꺼냈다는 건, 역시 강일이도 염두에 두고 있는 거지?”

“맞아요. 서강일 선생님도 이번 기획에 참여해서 많은 걸 얻어가셨으면 해서요.”

그건 아마 커리어가 아닌 깨달음과 같은 경험일 것이다.

정연주는 알려주고 싶은 거다. 모교가 아니라도 제자로 삼을 만한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을.

서강일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민우가 말하지 못한 것을, 정연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깨닫게 해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민우는 정연주를 다시 보게 됐다.

한없이 어리고 동생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사람을 살필 줄 아는 혜안이 있을 줄이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 걸까?

아니, 다른 영향도 있을 거다.

민우가 그 영향을 준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강일이가 들으면 굉장히 좋아할 거야. 무슨 짓을 하더라도 끼려고 할걸?”

“그럼 다들 승낙하신 걸로 알고…… 세부 계획을 논의해 볼까요? 초기 비용은 제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이라고 해도 액수가 엄청 크지 않아? 서울에 있는 건물을 매입하는 것부터가 어마어마한 일인데?”

“그래서 지난 몇 년간 발품 좀 팔았어요. 준비는 다 됐어요. 문제는 운영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이죠. 사용 규정이나 입학 근거도 마련해야 할 거고요.”

“후원을 받아도 좋지 않을까?”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좋아! 그럼 모인 김에 오늘 초안을 짜보자고!”

한진섭이 기합을 넣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수빈의 연구실은 젊은 학자들이 내뿜는 열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

뜻깊은 논의를 마치고 멤버들은 오후 늦게 이수빈의 연구실에서 나왔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팀 307호 총회 기대할게요. 오빠가 공지해 주시는 거죠?”

“내가 물어보고 적당한 날짜 잡아볼게.”

서로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기본적인 운영 방침은 나왔어. 이제 나머지는 연주에게 맡기면 되려나.’

정연주는 모기업의 재단으로 가서 끌어올 수 있는 금액을 확인해 보겠다고 말했다. 거기에 사재까지 털겠다고 했으니 초기 자본은 걱정할 게 없다.

그리고 단체 이름은 임시로 ‘휴머니티(Humanity)’로 정해졌다.

본래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인간주의를 뜻하는 ‘휴머니즘’과 공동체를 뜻하는 ‘커뮤니티’를 합친 말이기도 했다.

민우의 아이디어였는데, 아주 절묘한 의견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기대된다. 설레기도 하고. 이런 기분은 오랜만인데?’

이제 연구실로 돌아가 남은 팀 307호 멤버들에게 오늘 정해진 사항에 대해 공유하는 일만 남았다.

‘이 소식을 들으면 바쁘더라도 일 팽개치고 달려오겠지.’

가벼운 고양감을 만끽하며 민우는 연구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는 차민재 홀로 있었다.

“윤이는 어디 갔냐?”

“답답하다고 잠깐 바람 쐬러 갔어요. 아, 선생님. 아까 민영환 선생님 오셨다 가셨습니다.”

“민 선생님이? 무슨 일로?”

“글쎄요. 그거 까지는 잘…… 오시면 연구실로 와 달라고 하셨어요.”

“오케이.”

민우는 다시 복도로 나가 민영환 교수 연구실 앞에 섰다. 가볍게 노크하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 박 선생. 어서 와.”

석사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연구실 밖이나 소파에서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는데, 이제는 대우가 달라졌다.

민영환 교수는 민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는 여전했다. 굳게 다물어진 입과 고집스럽게 접힌 주름살은 그가 얼마나 엄한 교수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이제 그는 교수가 아니라 선생이었으니까.

“강의는 할 만해?”

“그냥 그렇죠 뭐. 역시 학기 초라 그런지 힘드네요. 수강 인원도 많고요. 거기에 지도교수 제청한 원생들도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섭니다.”

“뭐? 지금 인기 많다고 자랑하는 게야?”

“하하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엄살이죠.”

민영환 교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와 이렇게 마음 편히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줄은.

민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까 찾으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이 있긴 하지. 으음, 그게 말이야. 박 선생. 자네 요즘 학회 하는 거 없지?”

“회원 말고 임원 말씀인가요?”

“그래.”

대강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감이 왔다. 편집이사나 연구이사직을 권하려는 것 같다.

학회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직원을 고용하지 않는다. 대부분 교수나 대학원생이 자리를 맡아 학회지 발간에 관여한다.

“아직은 없습니다. 사실 권유는 좀 받았는데 제 쪽에서 사양하고 있어요. 요즘 워낙 일이 좀 많아서요.”

“문학상에 이름 좀 내준다고 벌써 바쁜 척을 하고 있어?”

“알고…… 계셨어요?”

“알다마다. 송승현 이사가 나한테까지 와서 물어보고 갔었지. 해도 되는지 말이야. 흥,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어쩌겠나? 노벨문학상이 무슨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말이지.”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뜻밖의 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이번 일은 솔직히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아무튼, 그럼 자네도 좋은 대답을 들려줬으면 하는데. 이번에 내가 현대문학연구학회의 회장으로 취임하게 됐어. 와서 좀 도와주게.”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일단은 연구이사직으로 시작하지.”

이사직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전혀 없다.

보수 같은 것도 없는 봉사 개념의 일이다. 연구이사는 테마 연구나 특별 연구 기획을 수립하고 논문 심사에 관여한다.

민우가 섣불리 대답하지 않자, 한숨을 내쉰 민영환 교수가 어울리지 않는 우는소리를 한다.

“요즘 연구실적 쌓기가 좀 힘든가? 교수 임용에 통과하려면 연에 다섯 편 이상은 써야 하니 다들 질보단 양 쌓기에 주력하고 있지. 그래서 투고되는 원고가 배는 늘었어.”

“그건 저도 체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양이 많이 늘었더군요.”

“대학의 구조적인 병폐지.”

민영환 교수의 말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 임용에는 서류 전형과 면접 및 시범 강의, 그리고 총장 면접. 이렇게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서류 전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연구업적 부분이다.

학술지의 등급과 게재한 논문 수가 당락을 가를 정도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물량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민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의외인데? 바쁘다고 거절할 줄 알았더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영환 교수의 눈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알기 쉬운 선생님이라니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민우가 답했다.

“제가 석사 때부터 신세 진 곳이니까요. 랑느 박사님을 만난 곳이기도 하고. 어려울 때 바쁘다고 외면하면 도리가 아니죠.”

“후후. 든든하군.”

“그런데 다른 이사 후보는 생각해 두셨습니까?”

“아직 인선 중이야. 그래도 대강 생각해 두었지. 이재환 선생, 최민식 선생, 강예진 선생. 이 셋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훌륭한데요.”

모두가 민우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원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강예진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여전히 열심히 출강하고 있다.

“조만간 모여서 회식이라도 한번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가 봐. 바쁜 사람 너무 오래 붙잡아 뒀군.”

“하하하. 먼저 가보겠습니다.”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민우는 장문의 메일을 썼다. 수신인은 팀 307호 멤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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