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다 계획이 있구나? (1)
술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다들 실컷 마시고 실컷 떠들었다.
하지만 예전만큼 마시지는 못했다.
다들 각자의 영역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 주말이라고 해서 허송세월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새벽 두 시쯤 자리가 파했다.
팀 307호 멤버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민우와 이수빈은 택시를 탔다.
그때 서강일로부터 카톡이 하나 왔다.
― 고맙다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민우는 그 한마디에 얼마나 큰 감정이 담겨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여러 말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다 그 한 단어만 살아남았을 거다.
씨익 웃은 민우는 간단히 답장을 남기고 핸드폰을 닫았다.
“누구랑 그렇게 웃으며 카톡을 하실까?”
“강일이.”
“뭐라고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고맙다네.”
이수빈이 싱긋 웃었다.
“다행이에요. 강일 오빠도 그렇고, 민희도 기운을 차린 거 같아서.”
“길을 잠깐 잃었을 뿐이지 뭐. 다들 한다면 하는 녀석들이잖아. 예전에 인문학 공모전 본선 기억 안 나?”
“나죠. 그 순간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럼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떠오를 텐데.”
“그래도, 그때는 대학원생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교수가 된 박사와 교수가 되지 못한 박사.
그리고 교수가 되는 것에는 학문적 역량 말고도 다른 변수가 많다. 교수 채용까지는 정말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
민우가 말했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지.”
“왜요?”
“강일이가 한일대에 제대로 자리를 못 잡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나거든.”
이수빈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민우 쪽으로 돌렸다. 민우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서울의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학원 시절, 학회에서 강일이하고 두 번 붙었잖아.”
“그랬죠.”
“한일대 국문과 장소필 선생님 알지?”
“국제비교문학회 회장님이시잖아요.”
“강일이 지도교수님이기도 하고.”
“아.”
그제야 이수빈은 장소필 교수에 대한 프로필을 머릿속으로 펼칠 수 있었다.
“장소필 선생은 오해하고 있는 거야. 강일이가 학회에서 나한테 두 번이나 패배했다고.”
“그게 왜 패배예요? 정당한 토론이었잖아요. 그렇다고 강일 오빠 논문이 그렇게 퀄리티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요.”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지는 법이거든.”
“억울하네요.”
“이해는 해. 만약 명인대와 한일대가 라이벌 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당시 민영환 선생님과 장소필 선생님의 사이가 좋았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그래서 요즘 강일 오빠 일에 좀 복잡해 보였구나.”
“그렇다고 너무 티 내면 동정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표정관리하기 어렵더라고.”
씁쓸히 웃은 이수빈이 민우의 손을 어루만졌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지만, 이번 일이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을 듯했다.
“언젠가 장소필 선생님도 진심을 알아주겠죠.”
“그랬으면 좋겠네.”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오빠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이니까.”
“아직도 콩깍지가 씌어 있는 거야?”
이수빈은 대답 대신 민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택시는 조용히 서울 밤거리를 달려나갔다.
***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먼저 가요. 윤아 잘 데려다주고.”
“그래.”
“오늘부터 윤이 연구실에 나오죠? 밥 잘 먹이고 너무 가혹하게 부리지 말아요.”
“아, 맞다.”
잠시 잊고 있었다. 오늘부터 허윤이 밀착 마크를 한다는 사실을.
계획은 대강 세워뒀지만, 조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알았으니까 이따 보자.”
늘 그렇듯 이수빈은 먼저 출근했다. 그녀는 아침 일찍 대학원 세미나를 연다. 그래서 윤아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는 것은 늘 민우의 몫이었다.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가사를 철저히 분담하고 있었다.
민우도 그렇지만 이수빈도 방송 출연 및 특강 등으로 상당히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중이다.
그래서 식사 준비와 청소 및 설거지 당번도 정해서 공평하게 나눠서 한다. 물론 어려울 때는 가사도우미를 쓰거나 엄마 찬스를 쓰곤 하지만.
“슬슬 나도 가볼까? 윤아야! 유치원 가자!”
“웅!”
민우는 윤아의 손을 잡고 아파트를 나섰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지하철을 타고 명인대로 향했다. 가는 도중 알아보는 학생이 있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명인대입구 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게 되면 모든 학생들이 알아본다. 명인대는 캠퍼스 내로 버스가 드나들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버스에서 한 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교수님 자서전 드라마화된다고 기사 봤는데, 축하드려요. 주연은 누구인가요?”
“아, 벌써 소문이 났나요?”
“주말에 인터넷에 떴어요!”
토요일은 모임 때문에 통째로 날렸으니, 인터넷을 뒤질 시간이 없었다. 민우는 웃었다.
“주연은 잘 모르겠어요. 오디션으로 뽑는 거라서, 그날 가봐야 알 거 같네요.”
“혹시 생각해 두신 배우라도……?”
학생이 집요하게 물었다.
민우는 이해했다. 가상 캐스팅 같은 것도 최근까지 유행하곤 했으니 어떤 배우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궁금하겠지.
“글쎄요. 딱히 생각해 둔 사람은 없어요.”
“허윤 어때요? 인터넷에서는 교수님 역으로 허윤이 제격이라는 평이에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꼭 우리 윤이 오빠 뽑아주세요!”
허윤 팬이었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민우는 학생과 작별 인사를 하고 인문관으로 들어섰다.
그 길로 연구실로 올라가니 차민재가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손님 오셨습니다.”
“아, 벌써 왔냐?”
“형님!”
모자를 쓴 사람은 허윤이었다.
피부를 약간 검은 톤으로 바꾸고, 점을 찍었다. 거기에 수염을 붙이니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 어때요? 변장 잘됐죠?”
“괜찮네. 요즘 기술 많이 좋아졌어. 그런데 매번 그렇게 하면 안 불편하냐.”
“하는 법을 대충 배워놔서 괜찮습니다. 다른 버전도 있지요.”
“기대되는데? 여장 버전은 없냐? 너 곱상하게 생겼으니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당연히 있습니다. 톱스타를 우습게 보지 마시죠!”
묘한 말이 오가자 민재가 이쪽을 주목했다. 그제야 아차 싶은 민우가 민재를 불러 사정을 말했다.
“……그런 사정으로 앞으로 나와 함께 다닐 거야. 아마 한 달 정도 연구실을 같이 쓸 거 같은데 잘 챙겨 줘라.”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나야말로!”
두 사람이 악수를 했고, 민우는 허윤을 데리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지음사에서 주연 배우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네 소원대로 공개 오디션으로 해달라고 했어. 그리고 어제 제작 감독한테 연락 왔다. 오디션 일정 아직 안 나왔나?”
“아직이요. 곧 나올 겁니다.”
“잘해 봐.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돕겠지만, 나를 따라다니는 것만으로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충분해요. 그 이상의 것은 배우인 제가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운을 뗀 허윤은 민우의 스케줄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일단 그가 필요한 건 강의, 학회, 회의 같은 공식적인 일정.
“그리고 가끔 댁에서 숙식 좀 하고 싶은데.”
“그건 왜?”
“제가 또 <프로페서>는 다섯 번 정독했잖습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니까, 수빈 누나랑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도 눈으로 봐야죠.”
“음, 전에 와이프가 사생팬은 절대 집으로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하하하! 이번엔 좀 봐 주세요!”
민우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딸인 윤아도 허윤을 무척 좋아하니까 겸사겸사 좋을 듯했다.
“필요한 책은?”
“제가 여기에서 필요한 거 꺼내 볼게요.”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도서관에 있는 건 민재한테 부탁하면 될 거다. 공짜로 부탁하지 말고. 알았지?”
“음, 연말 공연 VIP 티켓 정도면 되려나?”
순간 차민재의 귀가 쫑긋해졌다.
허윤은 만능 엔터테이너다.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어서 연말에 콘서트를 여는데, 표를 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VIP 티켓이라면 수십만 원을 줘도 구하기 힘들다.
“뭐, 그건 알아서 하고. 가장 중요한 건 네 정체를 들키지 않는 거야. 그랬다면 오디션 과정이 공평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생길 수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 허윤입니다. 연기자라구요. 어떤 상황에서든 탈주할 자신 있지요!”
“오히려 그러니까 더 걱정되는데…….”
민우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허윤을 더는 나무랄 수 없었다.
“아무튼 한 달 동안 잘 부탁한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부터 자리 잡고 공부해. 책상은 민재 옆에 있는 거 쓰면 될 거다. 그리고 대학원의 기본적인 것들은 민재에게 물어봐. 그걸로 해결이 안 되면 나한테 오고.”
“넵!”
기합을 단단히 넣은 허윤은 자리로 돌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짐을 풀기 시작했다.
민우도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메일함을 켜니, 정연주가 보낸 메일 한 통이 시야에 잡혔다.
‘뭐지?’
궁금증이 든 민우는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 제목을 클릭했다.
***
“이야! 역시 우리 정 이사장님 추진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이런 기획서를 보낸다고?”
한진섭이 혀를 내둘렀다.
팀 307호의 수뇌부가 카페에 모였다. 민우와 수빈, 그리고 진섭과 예린이었다.
네 사람은 손에 프린트물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것은 정연주가 민우에게 보낸 기획서였다.
민우는 기획서를 읽자마자 세 사람을 카페로 호출한 것이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일 거야. 기획서를 보니 상당히 디테일했어. 하루 이틀 생각한 걸로 나올 수 있는 디테일이 아니야.”
민우는 그렇게 평가했다.
오전에 정연주가 보낸 것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협회 같은 조직을 만드는 게 어떠냐는 기획서였다.
당연히 그 시작점은 서강일과의 대화였다.
민우는 그를 격려하기 위해 팀 307호 멤버를 소집해 술자리까지 마련했다. 그 모든 것을 간파한 정연주가 행동에 나선 것.
한진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하긴, 언젠가 하려던 일이긴 했었지. 요즘 학문후속세대 지원도 시원찮고, 강사법도 애매해졌잖아. 민우 너도 계속 걱정하던 일이고.”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야. 어쨌든 협회이라고 해도 모든 사업에는 자본이 필요해.”
“네 중동 친구 힘 빌리면 그만 아닌가?”
“우리나라 학문후속세대를 지원하는 일이잖아. 가능하면 우리 힘으로 해야지.”
“그건 그러네.”
그사이 기획서를 끝까지 정독한 이수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긍정적인 의미였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사무실 몇 개 임대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전용 건물을 만드는 거네요.”
정연주의 계획은 간단했다. 인문학 관련 전공자들의 ‘놀이터’를 만들어주자는 것이 계획의 골자다.
카페부터 시작해 열람실, 세미나실, 강의실 등 필수 공간과 체력단련실도 만들어 건강까지 챙기려는 포괄적인 계획이었다.
인문학 전공자들은 열람실에서 공부하고, 자신 있는 주제로 강의실에서 강연을 열 수도 있다.
한마디로 ‘인문학 생태계’를 조성하려는 것.
빌딩을 세우기엔 여러 제약 조건이 많으니, 통으로 건물을 매입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겠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턱을 괸 한진섭이 말했다.
“하긴…… 우리 같은 평범한 교수들이 서울 시내에 빌딩을 세울 생각이나 하겠어? 연주처럼 큰돈을 만지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발상이지.”
“그래서, 다들 어떤데? 의견을 줘 봐.”
“해서 나쁠 거 없는 사업이지. 사업자금을 우리 정 이사님이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거 같고. 자세한 건 본인의 설명을 좀 들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거라면 제가 직접 설명해 드릴게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곳엔 정연주가 웃으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