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가치 (4)
기다리던 토요일이 찾아왔다. 윤아를 처가에 맡긴 민우는 이수빈과 함께 명인대입구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술을 제법 할 것 같아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프로페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수빈이 물었다.
“제작진 쪽에서는 연락 왔어요?”
“어제 왔어. 감독이 직접 연락했는데, 캐스팅 일정 잡고 싶다고 하더라고.”
“언제 하는데요?”
“일단 대본이 좀 나와야 해서, 아마 한 달 정도는 걸릴 거라고 하더라.”
“그럼 윤이가 오빠 졸졸 따라다니면서 연습할 시간은 충분하겠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윤은 다음 주부터 연구실로 출근하기로 했다. 모든 스케줄을 미룰 정도로 탐을 내는 배역이니 아마 설렁설렁하진 않을 거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윤이가 오빠 연구실에 어슬렁거리는 거 학생들이 알면 좀 시끄러워지지 않을까요?”
“다 방법이 있다더라고.”
“뭔데?”
“특수분장을 하고 오겠대. 좀 불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아. 그거 무투브에서 본 적 있어요. 그렇다고 막 할아버지로 분장하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사진 찍어서 평생 이불킥하게 해줘야지.”
두 사람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약속장소인 호프집에 도착했다. 개강한 직후라 학생들로 북적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한진섭과 주예린이었다.
“웬일이냐? 정시에 재깍 와서 자리 잡아놓고 있고. 철들었네.”
“궁금해서 요 며칠 잠을 못 잤단 말이지.”
“그 정도로?”
진섭이 한숨을 내쉬었고, 뒤이은 말은 주예린이 대신했다.
“선배가 중대발표라고 하니 저도 너무 궁금했던 거 있죠. 아무리 털어도 정보는 없고, 윤아 동생 건이 아니면 대체 무슨 일이죠?”
“하하하. 아직 멤버들 다 안 왔잖아. 이따 천천히 이야기 풀어보자고. 모이기 전에 먼저 한잔하고 있을까?”
“좋지.”
세 사람은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켰다.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으니 서강일과 강민희가 나타났다. 뒤이어 출판계에서 한창 동분서주하고 있는 장철호와 이유리까지 자리했다.
상당히 오랜만에 모인 자리라 다들 반갑게 인사했다.
다소 힘겨워 보였던 서강일과 강민희도 금방 제 컨디션을 되찾고 대화에 적극 참가했다.
민우가 멤버들을 한차례 살폈다.
“어디 보자. 오늘 지은이는 못 온다고 했고. 연주는 미국에 가 있으니 못 올 거고. 그럼 다 온 거네?”
“그런 거 같은데요.”
주예린이 대꾸했고,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맥주잔을 들었다.
“그럼 오랜만에 모인 기념으로 거국적으로 한잔하자고.”
“자, 그럼 건배…… 어?”
주예린이 흠칫 놀랐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어, 멤버들의 시선도 하나둘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정연주!”
멋진 여성복을 입은 정연주가 다소 숨을 가쁘게 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주예린이 반갑다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이사장님! 여기야! 여기!”
주예린의 목소리를 들은 정연주가 재빨리 이쪽으로 달려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어떻게 온 거야? 전에 톡할 때 미국이라고 하지 않았어?”
“일정 하나 취소하고 바로 귀국했어요.”
옆에 있던 진섭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던졌다.
“너도 궁금해서 잠 못 이뤘나 보구만.”
“아…… 좀 그렇긴 했죠. 오빠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아서. 직접 듣고 싶었어요.”
“일단 앉아서 숨 좀 돌려. 사이다 시켜줄까?”
“아뇨. 맥주로!”
정연주의 주량을 알고 있는 민우와 다른 친구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연주는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즈니스 차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술이 좀 늘었어요. 맥주 한두 잔 정도는 마실 수 있어요.”
“강해졌구나.”
“덕분에요.”
옛날, 삼겹살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술주정을 늘어놓던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피식 웃은 민우는 벨을 눌러 맥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곧 모두가 잔을 들었고, 민우의 간단한 건배사와 함께 잔을 부딪쳤다.
“저 사람 박민우 아니야?”
“이수빈 교수도 있는데?”
“대박이네! 정연주 씨도 있어!”
“옆에는 주예린 작가 아냐?”
“헐! 나 지금 가방에 세계수 1권 있는데 사인받을까?”
주변에 자리한 몇몇 손님들이 그 장면을 보고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민우와 이수빈은 이미 유명한 교수였고, 주예린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다. 거기에 정연주는 뉴스에도 자주 나오는 재벌집 영애다.
이런 조합을 대학 근처에 위치한 호프집에서 보는 건 상당히 낯선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민우의 테이블에 다가가기 어려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테이블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한참 후, 그 적막을 깬 것은 바로 한진섭의 목소리였다.
“말도 안 돼…… 박민우 문학상이라고? 네 이름을 따서 문학상이 제정됐다는 말이야? 그것도 지음사에서?”
민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 나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너희들한테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거 나도 아는데 나한테 뭐라고 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습니다. 솔직히 나도 아직 안 믿겨.”
민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팀 307호의 구심점이었다. 그가 속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잘 안다.
“그래서 톡으로 이야기하기 곤란하다고 하셨군요.”
정연주가 한마디 덧붙였다.
진섭조차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의 일이다. 실제로, 출판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장철호와 이유리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서강일은 달랐다.
그는 쿨한 미소와 함께 진심을 담아 한마디 던졌다.
“또 해냈구나. 박민우.”
“솔직히 나도 이게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다들 알잖아. 누군가의 이름이 걸린 문학상이라는 게 결코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거.”
“그렇긴 하지. 그래서 보통 사후에 그 이름이 붙는 거기도 하고.”
다들 우려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서강일은 이렇게 말했다.
“옳고 그름을 따지려면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다…… 이건 네 지론이기도 했잖아?”
“그렇지.”
“그럼 부딪쳐 봐야지. 도망가는 건 네 취향이 아닐 거고.”
민우는 피식 웃었다. 테이블을 손으로 탁 치고, 잔을 든 서강일이 대표로 말했다.
“우리 팀장님이 한 건 크게 하셨는데 건배나 합시다!”
“아, 그 전에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
“뭐?”
“또 뭔데! 대체 요즘 나 몰래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사촌이 땅을 사 배가 아픈 한진섭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민우는 며칠 전 지음사에서 체결한 그 계약 건을 입에 올렸다.
“내가 낸 자서전, 드라마화하기로 했어. 얼마 전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드라……마?”
“정말요?”
“허…….”
박민우 문학상 제정 건보다는 조금 약했지만, 그래도 축하를 받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소설도 아닌 자서전을 바탕으로 드라마 제작이 된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민우의 학문적 노정이 드라마틱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정말 혼자서 다 해 먹는구만. 신은 불공평해. 왜 나를 세상에 보내고 박민우를 탄생시킨 거지?”
“누가 들으면 2인자인 줄 알겠네.”
“아니었어?”
“응. 아니야.”
“크흑!”
그 이후로 멤버들은 문학상과 드라마에 대한 질문을 쉴 새 없이 날렸다. 특히 주예린은 제1회 박민우 문학상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어쨌든 한국형 판타지의 대모라고 불리는 입지에 있으니까.”
“대모라고 하니까 뭔가 좀 늙어 보이지만, 상을 주신다면 한번 눈감아드리죠.”
“너무 뻔뻔한 거 아니냐?”
“하지만 직속후배인 제가 상을 받지 않는다면 누가 받을까요? 학연 지연 흡연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선배는 흡연을 안 하니, 학연 지연을 모두 충족하는 저를 수상자로 선정해 주셔야.”
“음, 고민해 보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민우의 사업 이야기가 끝났다. 민우와 한번 시선을 주고받은 정연주가 화제를 돌렸다.
“서강일 선생님하고 강민희 선생님은 아직 한일대에 계세요?”
“저야 아직 한일대 초빙으로 있고, 이 녀석은 지방대 시간강사로 뛰고 있죠.”
“강민희 선생님도 그렇지만 서강일 선생님 정도면 전임으로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민우는 담담히 정연주의 말을 경청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타이밍에 이런 주제로 화제를 전환했다는 것은 정연주도 오늘의 모임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증거였다.
정연주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청문대에 자리를 좀 마련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연구교수로 몇 년 계시면서 다음 자리를 준비해 보시는 건 어때요?”
“예?”
서강일과 강민희가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정연주는 청문대 이사장이었다. 사립재단의 이사장인 그녀의 말 한마디면 안 될 것도 없다.
하지만, 서강일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 다른 곳을 생각하고 있진 않아요.”
한진섭이 끼어들었다.
“아니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 너 정도라면 아래로 눈 좀 돌리면 자리 잡을 수 있잖아.”
“수도권이냐 지방대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모교 아니면 의미가 없어. 나한테는.”
그렇게 말을 끊은 서강일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강민희도 잔을 들고 맥주를 홀짝였다.
서강일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짓는다.
“뭐 허무맹랑한 생각이다, 현실 직시를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곤 있어. 자리가 나면 바로 찔러보고 움직여야 하는데…… 역시 그래도 모교로 부임하고 싶은 생각은 지울 수가 없더라.”
서강일이 문득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넌 어때? 어떻게 보면 너도 학부 모교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 케이스니까.”
“글쎄다.”
민우는 일단 그렇게 말을 받았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잠시 침묵했다.
“누구에게나 목표라는 게 있잖아. 그만큼 다양한데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지. 네 말대로 나는 모교인 상아대를 버리고 명인대로 왔어. 하지만 이후에는? 내가 명인대에서 정년을 보낼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침묵 속에서 민우는 술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잔을 내려놓은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다.
“모교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든 내 제자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언젠가 명인대를 떠날 수도 있겠지. 물론 이게 정답이라는 건 아냐. 이건 내 목표일 뿐이니까. 네 목표는 다를 수 있지.”
“맞아요. 저도 두 분이 꼭 원하는 곳에서 자리 잡으시길 응원할게요.”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정연주와 주예린도 힘주어 덧붙였다.
각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사람들의 격려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서강일은 문득 대학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바로 박민우라는 존재.
언젠가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존재.
‘선의의 경쟁자’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래, 그때는 그런 느낌으로 경쟁했었지. 학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문득 잊고 있었던 목표가 새록새록 떠오른 것 같은 느낌에, 서강일의 표정이 극적으로 밝아졌다.
“기다려 봐. 곧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까. 자!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한잔하자고. 그래서 민우랑 수빈이는 둘째 계획이 어떻게 되는데?”
맥주를 마시던 민우와 이수빈이 하마터면 술을 뿜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