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04화 (304/500)

이름의 가치 (3)

“삼초오온!”

활짝 웃은 윤아가 팔을 벌리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선물을 한아름 안고 들어온 허윤은,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고 윤아를 안았다.

“아이구 우리 윤아! 잘 놀고 있었어?”

“응!”

그때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이수빈이 앞치마를 두른 채 거실로 나왔다.

수빈은 이미 민우에게 연락을 받아 허윤이 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많은 반찬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우리 윤아 얼굴이 아른거려서 한달음에 달려왔죠!”

“안 그래도 촬영 때문에 바쁜 사람이 무리를 하고 그래?”

“뭐, 민우 형님에 비하면야 바쁜 축에도 못 끼죠.”

윤아를 바닥에 내려놓은 허윤이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곤 5만 원 권을 손 가는 대로 집더니 윤아에게 건넸다.

“자! 용돈. 지난번에 세뱃돈 못 줘서 미안해. 아껴 써야 한다? 엄마 아빠한테는 절대 맡기지 말고.”

“으응!”

“이상한 거 가르치고 있네. 윤아야. 삼촌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감사합니다아!”

허윤은 윤아의 머리를 쓸어 만지며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방문한 것처럼.

“오랜만에 왔는데 변한 건 하나도 없네요. 가만, 이게 무슨 냄새지? 혹시 갈비찜 하셨습니까?”

“맞아. 아직 저녁 전이지? 오빠 오면 같이 저녁 먹자.”

“좋죠! 하하하.”

“외투 걸고 식당으로 와. 윤아 너도 손 씻고.”

“네~”

허윤과 윤아는 사이좋게 식탁에 앉았다. 누가 보면 친조카라고 생각할 정도로 두 사람은 잘 놀았다.

한편 수빈은 국을 뜨고 반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섯 살배기 윤아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가 뜬 국과 반찬을 식탁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곤 허윤이 감탄했다.

“이야, 조기 교육 끝내주게 하셨나 보네요.”

“뭐가?”

“벌써 이렇게 알아서 식탁을 차리다니. 나중에 아주 일등 신붓감이 되겠는데요?”

“삼촌한테 시집가도 돼?”

윤아의 물음에 두 사람이 빵 터졌다.

“하하하! 그건 안 돼. 너희 아빠가 엄청 화낼지도 몰라.”

“왜애?”

“그건 이따 아버지 오시면 물어봐!”

윤아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도어락 소리가 들리고, 민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일 먼저 윤아가 달려나갔다.

“아빠! 삼촌 왔어 삼촌!”

“그래?”

민우는 모른 척 윤아의 볼에 뽀뽀해 주었다. 허윤이 재빨리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오랜만이다? 별일 없었어?”

“촬영 현장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빼고는 특별한 일 없었죠 뭐.”

“하긴, 톱스타니까 어딜 가든 잘 해주겠지.”

“그건 형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민우는 피식 웃었다.

“너도 슬슬 장가가야 하지 않아? 언제까지 독신으로 살려고.”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주십쇼.”

대충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안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간단히 씻고 돌아오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네 명이 도란도란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들 드세요.”

식사가 시작됐다.

허윤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민우가 한소리 던졌다.

“야. 천천히 좀 먹어라. 그러다 체할라.”

“마음 같아서는 병원에 한 달 정도 누워 있고 싶은 심정이에요. 스케줄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 정도로? 괜찮은 거야?”

“그럼요! 저는 누구와는 다르게 아직 20대인데요 뭐.”

“쯧, 서른 금방이다.”

허윤은 민우와 근황을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이어갔다. 허윤이 너무 저녁을 맛있게 먹는 탓에, 민우는 일부러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저녁을 다 먹고, 윤아는 방으로 들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곤 허윤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벌써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네요. 이러다 윤아도 국문학도가 되는 거 아닙니까?”

“글쎄. 책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게 우리를 따라하려는 건지 아니면 진짜 좋아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독서의 밤’에서 그런 주제로 다룬 적 있었죠. 부모가 책을 많이 읽으면 자녀의 독서량이 늘어난다고.”

“그래서 별로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진 않아. 요즘은 워낙 미디어가 잘 나오고 있잖아. 굳이 활자가 아니더라도 스토리텔링이 들어간 콘텐츠는 많으니까.”

허윤이나 이수빈이나 모두 콘텐츠와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잔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허윤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 있는 거야?”

“생각보다 늦게 물어보시네요. 아까 밥 먹을 때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

“내가 거절하면 괜히 너 체할까봐 그랬지.”

민우가 씨익 웃었고, 허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쉽지 않은 형님이라면서.

“그게요, 음. <프로페서>와 관련된 일입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민우가 살짝 놀랐다.

프로그램 출연일 줄 알았는데 책 이야기라니. 그것도 자신의 자서전이.

“그게 왜?”

“아직 지음사에서 연락 못 받으셨죠?”

“연락 받은 건 있긴 한데 <프로페서>와 관련된 일은 못 받았지.”

“그렇군요. 실은 <프로페서>를 기반으로 드라마 제작 준비 중입니다.”

그 말에 민우는 물론 이수빈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야? 하지만 그건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인데…….”

“자서전이긴 하지만 젊은 학자의 치열한 고민과 열정이 녹아든 멋진 책이니, 소설화하기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고 해요. 지금 각본 작업 중이고요.”

“그런데 왜 지음사에서는 오빠한테 연락을 안 했을까요? 오늘 오전에 송 이사님 학교에 왔다고 했었잖아요.”

수빈이 물었고,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프로페서>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금도 없었다. 문학상에 관련된 이야기만 했었다.

“아무래도 준비 중이라 그런 것 같은데? 괜히 미리 나한테 이야기 해봐야 설레발밖에 안 될 테니까. 송 이사님 신중하시잖아.”

“맞아요. 아직 극비리에 준비하고 있는 거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죠.”

“그런데 넌 용케 알고 있네.”

“하하하. 제가 누굽니까? 저 허윤입니다. 허윤. 마침 <프로페서> 각본 맡은 작가님이 저에게 살짝 귀띔을 해주셨죠.”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민우는 허윤이 찾아온 목적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출연하고 싶은 거냐? 그 드라마에.”

“예. 제가 아니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윤이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민우도 웃음기를 지웠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누구보다 형님 근처에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했잖아요. 산 증인으로서 이번 드라마도 멋지게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음.”

민우는 잠시 말을 줄였다. 허윤이 말한 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팀 307호 모임의 단골 손님이기도 했고, 민우와 함께 사회공헌 활동도 많이 하곤 했다.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면 캐스팅을 해야 할 텐데. 주연으로 뽑아달라고 부탁하려고 온 거야?”

“그럴 리가요.”

“그럼?”

“오디션은 봐야죠. 저는 소속사나 이름값이 아니라 제 실력으로 배역을 따내고 싶어요.”

의외의 발언에 민우와 이수빈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 허윤 쪽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당분간 형님 좀 따라다녀도 됩니까? 강의도 듣고 연구실에도 좀 있어 보고, 학회에도 좀 나가보고 싶네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민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가 배역을 부탁했다면 들어주었을 거다. 그만큼 역량이 있는 배우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히 경쟁해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좋아. 그러면 편한 대로 해. 연구실에는 자리 하나 만들어 두라고 하마.”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케줄 괜찮겠어? 너 바쁘잖아.”

“미리 준비해 뒀지요. 형님이 허락하시면 한 달 정도 스케줄 쉴 생각입니다.”

“그래. 알았다.”

민우는 웃으며 커피를 후르륵 마셨다.

왠지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허윤으로부터 전해 들은 <프로페서> 드라마도 기대되는 일이었다. 기획이 확정된다면, 좀 더 바빠지지 않을까.

그렇게 오랜만에 모인 세 사람은 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워 나갔다.

***

며칠 후, 민우는 지음사 본사 건물로 들어섰다.

민우는 지음사의 VIP였기 때문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달려 나와 민우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교수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우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송승현 이사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실장실보다 훨씬 넓고 쾌적한 곳이었다. 하지만 인테리어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분히 실용적이고 모던했다.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좀 중요한 이야기라서.”

“아닙니다. 온 김에 인문사회팀에 들러 인사도 하려고 했어요.”

“커피 두 잔.”

비서가 꾸벅 인사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민우가 먼저 물었다.

“혹시 문학상 관련해서 뭔가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문학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쁜 일은 아니니 긴장할 거 없어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얼마 전 허윤에게 들었던 <프로페서> 드라마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예전에 민우 씨가 낸 자서전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별로 놀라지 않는데?”

“요즘 콘텐츠 2차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잖아요. 그 정도는 예상 범위 내에 있죠.”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라지겠네. <프로페서>를 드라마화할 겁니다. 민우 씨만 오케이 해주면, 바로 제작 들어갈 거예요.”

“하겠습니다.”

“그럼 계약서 좀 검토해 볼래요?”

송승현 이사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굉장히 두꺼웠는데, 민우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었다.

특별히 문제 되는 조항은 없었다.

판권료도 납득 가는 수준이었고, 게런티 항목도 추가되어 있어 해외 진출 시 수익을 크게 가져갈 수 있는 구조였다.

철저히 실적 위주의 계약서인 것이다.

펜을 꺼내든 민우는 서명했다. 너무나도 쉽게 계약이 완료되어 송승현 이사는 다소 김빠진 표정이었다.

“깐깐할 줄 알았는데.”

“이사님께서 알아서 잘해주시겠죠. 그리고 애초에 바로 영상화할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잖아요. 중간에 각본도 들어가야 하니까 쉽지 않을 거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일류 각본가를 붙여뒀으니까.”

그러다 보니 며칠 전에 허윤이 집에 찾아와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캐스팅에 참여해서 주인공 역을 차지하고 싶다고.

“캐스팅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주인공급 배우들은 민우 씨가 추천해 주면 좋겠다는 게 제작사의 입장이에요. 아무래도 학자의 시선이라는 게 그리 일반적이진 않잖아요?”

“음.”

잠시 생각하는 척하며, 민우가 답했다.

“그냥 오디션으로 진행하시죠. 대신 제가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요즘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괜찮겠어요?”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을 다룬 이야기잖아요. 제가 직접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당당한 민우의 말에 송승현 이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대답이었어요. 그럼, 민우 씨가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해 보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