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03화 (303/500)

이름의 가치 (2)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 민우는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연구실은 좀 그렇지?”

“카페로 가요. 커피 당기는데.”

“그래.”

민우는 이수빈과 함께 인문관 지하에 있는 카페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학내에서는 물론, 미디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잘 어울렸고, 어딜 가나 주목을 받을 만한 아우라를 풍겼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팬입니다! TV 잘 보고 있어요.”

물론, 대부분은 이수빈의 팬들이었지만.

아무리 민우가 인기가 많다고 해도, 한때 국문과 여신이라고 불리웠던 이수빈의 인기를 따라갈 수는 없다.

한때라고는 해도 이수빈도 올해로 32세. 워낙 훌륭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20대 중반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이 선생. 사생팬 걱정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누가 애 엄마를 좋아하겠어요.”

“누가 널 애 엄마로 보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민우는 카운터로 가 음료를 주문했다. 곧 시원한 아메리카노 두 개를 들고 이수빈이 자리 잡은 곳에 앉았다.

“그래서, 기분은 어때요?”

“아직도 좀 믿기지가 않아. 나는 몰래카메라인 줄 알고 서지훈 선생님 연구실 이리저리 뒤졌다니까?”

“하하하.”

이수빈이 좋다며 웃었다. 민우는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래도 승현 선배가 오빠 되게 신뢰하는 거 같아요. 문학상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국내 최고의 출판사에서 제정하는 문학상이라면 그 무게가 다르잖아요? 사실 생존해 있는 사람의 이름을 따지 않는 이유가,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 때문에 그런 것도 있잖아요.”

“나도 좀 걱정했어. 서지훈 선생님도 마찬가지였고. 그래도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민우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 고정관념을 깨고, 나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오빠는 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하여간 신뢰의 아이콘이라니까? 그 깐깐하다고 소문난 승현 선배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그런가?”

두 사람이 따뜻한 눈빛을 교환했다. 만약 둘만 있었던 공간이었다면, 아무 방해도 없이 좀 더 대담한 애정표현을 했을 것이다.

“오빠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갑자기?”

“사실 노벨문학상 받을 때요, 그때가 정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계속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요.”

“아직 절반도 안 왔어.”

민우의 의미심장한 말에 수빈은 미소를 지었다.

“남은 절반이 어떻게 채워질지 기대된다. 그리고 난 그런 오빠가 멋진 거고.”

“신혼은 지나지 않았어?”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거 같더라. 오늘 밤에 기대할게?”

이번엔 수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헛기침을 한 민우는 애꿎은 빨대를 입에 물고 커피를 들이켰다. 얼굴이 금방 새빨개졌다.

“아무튼, 중대발표라고 할 만하네요. 섭섭이 오빠는 배 아프다며 뒹굴 게 훤히 보이고. 다들 부러워할 거 같아요. 이쪽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119 미리 불러놔야 할지도.”

“진짜루.”

“뭐 그것 말고도 다른 목적도 있으니까.”

“강일 오빠 일이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런데, 전에 강일이 만났을 때 진섭이도 합석했었거든. 우리 만난 지 되게 오래되지 않았냐고 하더라. 중간고사 기간 전에 한번 만나야지.”

“잘됐네요. 오랜만에 회포도 풀고 사는 이야기도 듣고. 그날은 꼭 시간 내야겠다.”

“같이 가자. 죄송스럽지만 장모님께 윤아 좀 맡겨 두고.”

“미리 얘기해 둘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

“선생님.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응.”

차민재가 종이를 하나 들고 책상으로 다가왔다. 곧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상단의 타이틀을 본 민우가 씨익 웃었다.

그것은 자신을 지도교수로 정한다는 석사과정 지도교수제청서였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내린 결정이야?”

“별로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럼?”

“충분히 생각할 정도였다면 굳이 명인대로 오지 않았겠죠. 선생님이 계셔서 이곳에 왔다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죠.”

맞는 말이었다.

민우는 펜을 들고 지도교수 서명란에 근사한 사인을 남겼다. 이제 이 서류를 조교실에 제출하면 지도교수가 확정된다.

“나중에 후회해도 모른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학부 때와는 또 느낌이 많이 다르겠죠.”

“느낌만이 아니야. 뼛속까지 확 와닿을 거다.”

민우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무게를 잡았다. 자연스레 차민재는 경청하는 태도로 섰다.

“친한 친구가 있어. 상당히 뛰어난 친구야. 논문도 잘 쓰고 강의력도 출중하지. 하지만 그 친구…… 아직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했어. 그 정도로 각박한 곳이야. 대학이라는 곳은.”

“상관없습니다.”

당돌한 대답이 나왔다.

민우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어떤 의미의 대답인지를.

“상관없다는 건 어떤 의미야?”

“교수가 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곳으로 취직을 하더라도 대학원 생활이 좋은 양분이 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교수가 되지 못해도 딱히 상관은 없다, 뭐 그런 건가?”

“네.”

민재의 집안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교수가 아닌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한다면, 학부 졸업 직전에 시도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선호하지 않으니까.

민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조언은 하지 않았다.

이 이상은 조언이 아니라 참견이다.

더욱이 지금 차민재가 내민 서류와, 질문에 대한 답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민재의 인생이다.

“좋아! 그럼 이제 행정상으로도 지도교수가 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민우는 서명한 서류를 차민재에게 돌려주었다.

두 사제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석사과정 동안 어떤 재미있는 일이 있을지 기대되면서.

서류를 챙긴 차민재가 꾸벅 인사했다.

“전 그럼 이거 조교실에 제출하고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

“저녁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드세요.”

“오냐.”

차민재가 연구실을 나가고, 민우도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어 재킷을 걸쳤다.

그의 목적지는 중앙도서관이었다.

논문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다. 보통은 제자들을 시켜 자료를 모아오라고 하는데, 민우는 가능하면 직접 자료를 찾았다.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직원과 눈인사를 한 그는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 인문사회 열람실로 이동했다.

검색 컴퓨터에서 자료의 위치를 확인하고 서가를 거닐며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전에 랑느 박사님이 추천해 주신 책.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이제는 루카치의 유물이 없지만, 그의 외국어 실력은 이미 완성되었다.

오히려 모국어 화자들보다 훨씬 더 정교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찾았다!’

두꺼운 원서를 하나 꺼내던 바로 그때, 책이 치워지고 드러난 맞은편 공간에서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어?”

“앗?”

그리고 그 익숙한 얼굴의 주인공도 살짝 놀랐다.

“교수님?”

“이소윤 학생?”

“안녕하세요.”

이소윤이 반갑다며 고개를 숙였고, 민우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실습 끝났어? 한창 바쁠 때 아닌가.”

“오늘 일정은 끝났어요. 머리 좀 식히려고 도서관에 왔어요.”

“보통 머리 식히려면 밖으로 나가지 않아?”

문득 동질감이 들었다.

민우도 휴식을 취할 때는 책을 펴곤 했으니까. 몸담은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그런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저는 책 읽으면 힐링되더라구요.”

“책을 좋아하는구나.”

“책보다는 뭐라고 할까…… 책에 있는 이야기가 좋아요. 그중 누군가의 삶이 담긴 이야기요.”

“사람이 좋다는 건가.”

“말하자면 그래요.”

서가는 넓고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화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미 청강 신청할 때부터 느꼈지만, 이소윤은 굉장히 특이한 학생인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탐구하려고 노력하는 학생은 백 명이라면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법이니.

‘이런 사람이 의사가 된다면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

거창하게 인류애 같은 걸 들먹이지 않아도, 이렇게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할 수밖에 없을 거다.

직업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아마 그리 많지는 않겠지.

“근데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그래 보여?”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약간 그런 기운도 느껴지고.”

촉이 상당히 좋구나.

문학상 제정 소식에 들뜬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티를 내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소윤의 직감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신기하네. 그게 보여?”

“아무래도 그런 것들도 환자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기술이기도 하니까요.”

“좋은 일 있는 거 맞아. 아마 조만간 알게 될 거야.”

“뭔진 모르겠지만 미리 축하드려요.”

“고맙다.”

고개를 가볍게 숙인 이소윤이 책을 들고 열람실로 향했다.

원하던 자료를 찾은 민우도 도서 대출을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교직원증을 제시하며, 왠지 긴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옆구리에 낀 민우는 바로 주차장으로 가 귀갓길에 올랐다.

***

띠리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내비게이션 액정을 보니 뜻밖의 전화였다. 민우는 차 핸들에 연결된 블루투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웬일이야?”

― 아 형님. 왜 이렇게 냉정해졌어요? 웬일이냐니. 좀 더 살갑게 안 됩니까?

“설마 방송 녹화 중인 건 아니지?”

― 아니에요. 그런 건 미리 섭외 전화 가잖아요.

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건 것은, 일전에 ‘독서의 밤’에서 인연을 맺은 허윤이었다.

아역 출신 배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허윤은 민우를 만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했다. 최근엔 할리우드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최근에 촬영이다 뭐다 이런 저런 일로 연락을 거의 하지 못했는데, 뜻밖에 연락이 온 것이다.

“우리 대배우님 목소리 듣기가 좀 쉬워야 말이지.”

― 에헤이! 그래도 톡은 자주 보내잖아요.

“한 달에 두어 번이 자주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우는 웃었다. 동생이 없던 터라 민우는 허윤을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싹싹하고 잘 따르니까.

― 그래서 이렇게 전화했잖아요.

“뻥 치지 말고 용건부터 말해. 형 지금 운전 중이야.”

― 크! 역시 우리 형님 눈치 한번 빠르시다니까. 역시 노벨상 수상자는 다르긴 다르군요. 존경합니다.

“또 게스트 출연이냐?”

―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형님 바쁜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뭔데?”

―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찾아뵙고 말씀드려도 됩니까? 그러고 보니 윤아 용돈 준 지도 오래됐네요.

“계좌이체 하면 되잖아. 나한테 보내. 윤이 삼촌이 줬다고 전해줄게.”

― 하하하. 형님. 그래도 용돈은 얼굴 보고 줘야죠.

“그래서, 언제 오려고?”

― 사실 지금 형님 집 앞이에요. 근처에 스케줄이 있다가 들렀습니다.

“그래? 그럼 먼저 들어가 있어. 나도 거의 도착했으니까.”

― 감솨함다!

전화가 끊겼다.

신호등에 걸린 차를 천천히 세우며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집에까지 찾아온 걸까.

왠지 긴 하루가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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