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4)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서강일 말고도 대부분의 대학원생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이다.
기본적으로 교수라는 직업은 교육과 연구를 병행한다.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교수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두 가지 개념 중 ‘교육’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
정확히는 학생들의 숫자.
이미 오래전부터 대입 정원이 지원자보다 많을 거라는 전망이 나왔고, 2021년에 그 전망이 실현된 바 있다.
지방대 입학 정원 미달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관례처럼 다가오는 상황.
서강일은 그 상황을 어느 때보다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입학 정원이 줄어들면, 자연스레 대학에서는 교수 채용을 줄여버리곤 하니까.
민우가 물었다.
“다른 덴 좀 알아보고 있어?”
“전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아니냐. 요즘은. 아니…… 하늘의 별 따기라면 그나마 좀 쉽겠네.”
서강일은 다시금 잔을 비웠다.
이번에도 원샷이다.
천천히 마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민우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서강일이 멋쩍게 웃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만. 미안하다. 다음 주면 서로 바빠지니 그 전에 한번 보자고 한 거야. 윤아는 잘 크고 있지?”
“벌써 여섯 살이야. 강일이 삼촌 언제 오냐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
“다음에 한번 가야겠네.”
“민희랑 같이 와. 저녁이나 먹자고.”
서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무렵, 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한진섭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 서강일 선생!”
“왔냐?”
손을 흔들며 재빨리 합석하는 한진섭.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술잔부터 쥐었다.
“크! 이게 얼마만의 술인지 모르겠다니까. 초대해 주셔서 감사!”
“와이프한테 용케 허락받았나 보네.”
“대신 주말에 빡세게 집안일 해야지 뭐. 자자, 우울한 집안일 이야기는 이쯤하고 짠 합시다!”
세 사람의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힌다. 서강일이 은근히 물었다.
“진섭이 너도 오늘 첫 강의였지? 어땠어?”
“강의? 음, 그냥 그랬지 뭐.”
“그래도 정교수 달고 한 첫 강의일 거 아냐. 뭔가 새롭지 않았나?”
파전을 우물거리던 한진섭이 씨익 웃었다. 강일의 질문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다.
“뭐, 엄밀히 말하면 교수는 아니지. 국제어학원이니 강사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난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니까. 교수가 되는 게 중요한 건 아니고.”
거기까지 말한 한진섭이 슬쩍 서강일의 눈치를 살폈다.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반응을 보고 말을 계속 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교수가 되고 싶어. 가능하면 민우처럼 모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쉽게 안 돼서 말이야.”
“초빙교수라도 강의는 할 수 있잖아? 전임만큼은 아니겠지만 따르는 제자들도 있을 거고.”
“계약이 끝나면 부질없게 되는 법이지.”
이미 서강일은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오래 해 왔다. 계약이 끝나고 제자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이름으로 된 연구실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년째 해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간강사 시절이 있었던 민우와 진섭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그렇게 진솔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좀체 기회가 안 오네. 갈수록 설 자리는 좁아지는 것 같고…… 솔직히 민우가 노벨상을 받아서 좀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말이지.”
“하하하. 상 하나 받았다고 세상이 바뀌면 세상에 고생할 사람들이 있겠냐?”
“그건 그렇지.”
한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한 서강일과 한진섭이 다시 잔을 채웠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한진섭이 말했다.
“옛날 생각나네. 민식 선배 박사논문 프로포절한 날이었나. 박민우 너 기억나지? 지각해서 엄청 혼난 그날 말이야.”
“한 선생 흑역사는 내가 다 기억하고 있지.”
“그날 밤 뒤풀이 때 너 끌고 나가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 대학원 그만둔다 어쩐다…… 뭐, 지금은 흑역사로 남았지만 그렇게라도 주변에 이야기를 하니까 마음은 편해지더라.”
그렇게 말한 한진섭이 잔을 서강일 쪽으로 내밀었다. 서강일도 다시 잔을 들어 응했다.
“그러니까 너도 우리를 잘 이용하라고. 생각해보니 팀 307호 요즘 안 모이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그러네.”
“파티룸 하나 빌려서 예전처럼 질펀하게 놀아보자!”
“질펀하게? 큭큭큭.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야.”
이제야 서강일이 본래의 미소를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모인 지 좀 됐구나…….”
민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각자의 가정이 생기고, 또 생업을 이어가다 보니 만날 기회가 적었다.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모여도 좋지 않을까, 민우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런 민우를 지켜보던 두 팀원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럴 때 팀장님이 나서 주셔야지? 다음 주 소집령 한번 내리시죠?”
“한번 스케줄 잡아볼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주가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어. 전에 얼핏 듣기로는 계속 해외에 나가 있는 것 같더라고.”
“좋아! 아무튼 이번 잔은 서강일 선생의 미래를 위하여 건배!”
세 사람이 실없이 웃었고, 우정과 격려로 뭉친 술잔이 허공에서 청아한 소리를 냈다.
그렇게 오랜만에 풀린 이야기보따리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민우는 이수빈 대신 윤아를 데리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어제 엄마랑 뭐 했어?”
“꼬기 먹었어. 꼬기.”
“무슨 꼬기?”
“돈까스!”
집 근처에 있는 단골 돈가스집에 다녀온 모양이다. 민우는 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어젠 미안해. 아빠가 일이 갑자기 생겼지 뭐야. 다음엔 꼭 아빠랑 같이 가자. 알았지?”
“응!”
다행히 윤아는 토라지지 않은 것 같다.
아직 윤아의 동생을 만들어줘야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하나라도 애정을 쏟아서 키우고 싶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민우는 자신이 우등생이 아니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건강하게 자라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된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따 저녁에 보자.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놀고.”
“아빠 빠빠이!”
딸애를 뒤로 하고 민우는 곧장 명인대로 향했다.
연구실에 들어오니 익숙한 커피향이 났다. 아침 일찍 문을 연 것은 수제자인 차민재였다.
“첫날부터 열심히 하네.”
“선생님 연구실에 들어오실 때 커피향이 나면 좋아하셨잖아요. 그래서 신경 좀 썼습니다.”
“이수빈 선생님 앞에선 그런 말 하지 마라. 괜히 질투할라.”
“하하하하. 한잔하실 거죠?”
“좋지.”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차민재가 준비해 준 커피잔을 쥐었다. 막 내린 커피는 구수하니 맛있었다.
오늘은 딱히 수업이 없다.
하지만 학회에 청탁받는 논문 집필도 해야 하고, 대학원 지도교수 제청과 관련한 면담을 진행해야 했다.
다른 대학과 달리 명인대는 국문과 대학원 진학자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게다가 노벨상 및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라는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한 사람이기 때문에, 국문과를 비롯해 여러 어문학과에서 민우를 지도교수로 제청하고 싶은 학생들이 몰리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면담을 해서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을 선별하려는 것이다.
민우는 어제까지 접수된 서류를 훑었다.
‘어마어마하네.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20명이나 신청했어?’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몇 명이나 학위논문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신중히 검토해 보기로 했다.
따르르릉!
그때 내선이 울렸다. 민우는 한창 읽기 시작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나다.
“아,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지훈 교수였다. 딱히 목소리를 구별하지 않아도, 내선전화로 ‘나다’라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그밖에 없다.
심지어 부인인 이수빈도 그렇게 편하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는 눈을 의식하는 편이다.
― 음, 아침부터 좀 미안한데. 잠깐 내 연구실로 와 줄 수 있냐? 널 보고 싶어하는 손님이 계셔서.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를 내려놓은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리 연락받은 건 없는데 뜬금없이 손님 이야기를 해서 누군가 싶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수제자가 차민재인 것처럼, 서지훈 교수의 수제자는 바로 민우였다. 서지훈 교수의 지인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할 수도 있는 상황.
“민재야. 잠시 서지훈 선생님 연구실에 다녀온다. 늦어질 수도 있어.”
“네!”
그렇게 서지훈 교수 연구실로 자리를 옮기니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근사한 여성 정장을 걸친 미모의 여성은 바로 지음사의 송승현 이사였다.
“아침부터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다. 이제 너도 어엿한 명인대 교수인데.”
“괜찮아요. 손님이 송 이사님이라면야 강의도 하다 말고 튀어와야죠.”
민우의 한마디에 송승현 이사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 실장이었던 그녀는, 이제는 지음사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어머, 그건 좀 반가운 소리네요. 별일 없었죠? 소식은 남편 통해서 많이 들었는데.”
“잘 지냈습니다. 선배님은 어떠셨어요?”
“나도 잘 지냈죠.”
곧 서지훈 교수가 자리를 권했고, 세 사람은 연구실 가운데 놓인 소파에 자리했다.
“지음사는 요즘 어때요?”
“정신 없어요. 센트럴 북스 쪽 프로젝트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고, 덕분에 미국 오가느라 항공사 마일리지가 가득할 정도죠.”
“제임스 사장님은 잘 계시죠?”
“여전히 유쾌하죠.”
예전에 민우가 완성한 <인문과학총서>를 기점으로 지음사와 센트럴 북스는 본격적으로 제휴 업무를 시작했다. 즉, 민우가 뿌린 씨가 풍년을 이뤄낸 것이다.
그 성공을 바탕으로 출세한 건 민우와 송승현만이 아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제임스 마렛은 센트럴 북스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출판사에 한번 놀러 오라고 남편 통해서 계속 전달했는데…… 그게 잘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에요?”
“에헴!”
지레 찔린 서지훈 교수가 헛기침했다. 씨익 웃은 민우가 답했다.
“요즘 틈이 안 났어요. 그리고 뭔가 가기가 좀 어려운 게…… 가면 뭔가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나와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서.”
“슬슬 원고 줄 때 됐잖아요. <프로페서> 이후로 우리 쪽하고 단행본 하나도 안 했으면서.”
“누가 들으면 제가 이사님께 원고 맡겨 놓은 줄 알겠는데요?”
“아니었어요?”
“하하하하.”
하여간 입심은 여전히 대단했다. 약간의 주름살이 늘었을 뿐, 오히려 송승현 이사는 실장 시절보다 더욱 젊게 일하고 있다.
“논문집이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하나만 줘요. 모 교수님께 들으니 논문집 하나 나올 만큼 연구논문 쌓였다던데?”
민우가 고개를 슬쩍 돌려 서지훈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모 교수’는 명인대 서지훈 교수겠지.
‘잡혀 사는 인생은 어디나 마찬가지구나.’
왠지 동업자 정신이 발휘되어, 민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찾아오셔서 부탁하셨는데 드려야죠. 좋습니다. 이번 논문집은 지음사에서 내도록 할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고마워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논문집 출간 건 때문에 민우 씨를 오라고 한 게 아녜요.”
“네?”
허를 찔린 듯, 민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