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3)
― 박 선생. 재미 좋아?
은근히 시비조로 걸려온 전화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민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핸드폰으로 할 것이지 왜 내선으로 전화를 해?”
― 첫 출근 기념이다 인마!
“눈물 날 정도로 고맙구만.”
― 기분은 어때?
전화를 건 것은 민우의 라이벌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서강일이었다.
“어떨 거 같은데?”
― 하늘을 날아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보다 그렇게 감흥이 있지는 않아. 언젠가 이렇게 될 일이었으니까.”
― 무슨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상상되는 내 자신이 밉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서강일의 연락은 오랜만이었다.
최근 폴라리스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한 이후, 두 사람은 조금 격조해졌다. 서로 일이 바쁘다 보니 학회에서 만나지 않으면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쌓아 올린 우정과 신뢰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가 발표한 저서를 읽으며 교감하고 있었다.
학문을 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 시간 괜찮으면 오늘 한잔 어때?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다소 무게감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민우가 물었다.
“무슨 일 있냐?”
― 별일은 아니고…… 그냥 본 지도 오래되고 해서 하소연 좀 하려고 그러지.
“제수씨하고 요즘 안 좋냐?”
― 안 좋은 건 아니고. 서로 정신없지 뭐. 주말에 가끔 보는 정도야.
서강일과 강민희는 여전히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결혼은 할 생각이 없단다. 평생 연애만 할 거라나 뭐라나.
탁상 달력을 들어 스케줄을 확인한 민우가 답했다.
“다음 주부터는 나도 바쁘니 이번 주밖에 시간이 안 나겠네. 좋아! 인심 썼다. 오늘 봅시다. 내가 한일대로 갈까?”
― 그래 주면 고맙고.
“오케이. 그럼 이따 저녁에 보자고.”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조금 걱정이 들었다. 지금까지 서강일이 술 한잔하자고 할 때는 뭔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강일이 녀석, 곧 계약 기간이 끝나는구나.’
지금 서강일은 모교인 한일대에서 초빙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초빙교수는 계약직이기 때문에 안정적이라곤 할 수 없다. 연봉도 굉장히 낮다.
이제 계약 종료가 되면 더는 한일대에서 초빙교수로 일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대학에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거기에 생계도 있고 연구까지 병행하려니 삶이 고단해지는 것이다.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생각을 정리한 민우는 차민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옆 연구실로 향했다.
바로 옆인 320호는 다름 아닌 이수빈의 연구실이었다.
마그네틱이 ‘재실’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곤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가니 이수빈이 어떤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우가 멋쩍게 웃었다.
“손님이 있었네. 이따 다시 들를게.”
“아뇨. 말씀 나누세요!”
여학생이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왠지 미안했지만, 학생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의자에 앉으며 민우가 물었다.
“방금 누구야?”
“대학원 신입생. 지도교수 부탁한다고 찾아왔지 뭐예요.”
“역시 우리 이수빈 선생 인기 폭발이네.”
“민재는 아침부터 오빠 연구실에 갔었잖아.”
“봤어?”
“아침에 복도에서 만나서 인사했어요.”
이수빈이 책상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그런데 왜요?”
“아, 오늘 저녁에 강일이 녀석 좀 만나고 오려고. 한일대에서 보기로 했어. 늦게까지 술을 좀 할 것 같아서 윤아 좀 부탁해.”
“어머, 강일 오빠요? 그러고 보니 요즘 통 못 본 거 같은데.”
“그래서 좀 걱정이야.”
이수빈도 대학에서 오래 몸담은 사람이었다. 최근 서강일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좀 안타까워요. 강일 오빠, 능력 좋은 사람인데 모교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게다가 요즘 인문계 쪽은 학과 통폐합한다 어쩐다 정신이 없고, 정부에서는 강사법까지 밀어붙이고 있으니 분위기가 좋지는 않잖아.”
“그건 그래도…….”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팔짱을 낀 민우는 고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이수빈이 말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요?”
“글쎄. 아마도 폴라리스에서 물러난 이후가 아닐까 싶은데…….”
민우는 얼마 전 국제번역기구인 폴라리스의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창립자 신분을 유지한 채 일반 회원으로 돌아갔다.
서강일도 마찬가지다.
폴라리스에서 굵직한 일을 도맡아 하던 그도 민우와 함께 경영진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서강일은 폴라리스와 조금 거리를 둔 채 본업으로 돌아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민우처럼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대학에 자리를 잡고, 평생을 연구와 후학 양성을 위해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폴라리스를 좀 이용했다면 강일이 오빠도 좀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겠지. 애초에 그 녀석은 번역가도 아니었고. 비교문학을 하긴 하지만 결국 대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렇겠네요.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이야기 잘하고 와요. 안부 전해주고.”
“너무 걱정하지 마. 진지할 땐 진지하지만 유쾌할 땐 유쾌한 녀석이잖아.”
그제야 이수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아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주고.”
“응? 무슨 일 있어요?”
“아까 유치원 데려다줄 때 엄마 아빠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거든.”
사소하다면 사소한 약속이지만, 민우는 딸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이수빈은 그런 민우의 세심한 면모가 좋았다.
“윤아 걱정은 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미안해. 너도 오늘 강의하느라 힘들 텐데.”
“아유, 무슨 소리예요! 우리 사이에 서운하게. 대신 집에 사생팬은 끌고 들어오지 말아요. 그건 좀 곤란하니까. 아주 아까 강의 시간에 난리였다면서?”
팔짱을 낀 이수빈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다. 민우는 흠칫 놀랐다.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갔냐…….”
“그런 건 금방이죠. 사방에 제가 깐 첩자들이 있으니 모쪼록 조심하시길.”
“무슨 공산당도 아니고.”
“더하면 더했지!”
민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영악하게 웃는 이수빈의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걸렸다.
***
일과를 마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떠 있었다. 이렇게 일찍 연구실을 나서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문득 찾아온 옛 추억을 떠올리며 민우가 인문관을 나서려던 그때, 누군가 옆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벌써 퇴근해?”
한진섭이었다. 그도 강의가 끝났는지 한쪽에 책을 끼고 있었다.
“약속 있거든. 오랜만에 강일이한테 연락이 와서. 지금 한일대 가는 길이다.”
“오, 강일이? 요즘 뭐 한대? 단톡방에서도 조용하드만.”
“좀, 이런저런 일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서일까. 진섭이 두어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뭔 일 있대?”
“초빙교수가 힘들면 뻔하지.”
“아, 강일이 곧 계약 끝나나?”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괸 진섭이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음, 뭔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나도 껴도 되냐?”
“주님이 허락하실까?”
“오랜만에 남자들끼리 뭉친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그렇게 호기롭게 말하면서도, 진섭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주예린에게 허락을 구하는 톡을 보내고 있겠지.
피식 웃은 민우가 물었다.
“바로 갈 거냐?”
“나 자료 좀 정리하고. 먼저 출발해. 나는 이따 택시 타고 갈 테니까. 장소 톡으로 좀 알려주고.”
“알았다.”
“아 참!”
인문관 안으로 들어가려던 진섭이 돌아섰다. 그러더니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아까 그 처자는 누구야?”
“처자?”
“오늘 아침에 인문관 뒤쪽에서 오붓하게 커피 마시고 있던데. 엄청 미인이던데? 누구야? 국문과 학생은 아닌 거 같더만.”
오늘따라 뭔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재미있는 친구가 하나 나타났어. 의대생인데, 내 수업을 듣고 싶다고 하더라고.”
“의대생이 왜 니 수업을 들어?”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될 테니까, ‘인간다움’이 뭔지 알고 싶다고 하더라고. 내 수업을 들으면 왠지 알 것 같다고.”
“키야!”
진섭이 감탄을 내뱉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그의 리액션은 여전했다.
“아직 건재하구만. 박민우 선생! 이렇게 또 추종자가 늘어나는 건가?”
“추종자는 무슨. 그냥 그 친구를 통해 내가 또 무엇을 배우게 될까 하는 설렘뿐이지.”
“부럽네. 나중에 근사한 전문의가 되면 아픈 거 걱정 안 해도 되겠군.”
“필요하면 다리 놔 줄게.”
“하하하. 좋아. 한번 잘해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진섭이 시계를 힐끗 보더니, 손을 흔들며 인문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싱겁게 웃은 민우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날 저녁, 민우는 한일대 근처에 위치한 술집에 들어섰다. 꼬치구이집이었는데, 가게가 한적하고 좁아서 분위기가 아늑하니 좋았다.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강일은 한쪽 구석에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래 기다렸냐?”
“방금 왔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맘대로 안 되네. 차는 왜 또 그렇게 막히는지.”
“바쁜 척은 다 하는구만.”
민우는 조금 늦었다. 뒤늦게 회의에 소집돼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따 진섭이도 온다는데 불러도 되지? 아까 학교에서 나오다가 만났거든.”
“오, 한 선생도? 술자리에 사람이 많으면 나야 좋지.”
“그나저나 살이 그냥 쪽 빠졌네. 다이어트하냐?”
실제로는 더했다. 피부도 거칠어 보였고,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듯했다. 마치 논문학기 중인 대학원생을 보는 듯했다.
피식 웃은 서강일은 빈 잔을 민우의 앞에 내려놓고는 소주를 부었다.
“밥 벌어먹기가 어지간히 쉬워야지. 못 먹고 다니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겸사겸사 살 좀 빠지면 좋고. 나이 먹었더니 배가 들어가지를 않아요 아주.”
“그건 그래.”
“수빈이가 구박하지?”
“뭐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새 잔을 가득 채운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 시원하게 입으로 털어 넣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게 얼마만의 술자리인지.
“크으! 오늘 술이 달다구리하네.”
“작작 마셔라. 내일 강의 없어?”
“있습니다요.”
“초빙교수면 21학점 기본으로 깔고 들어갈 텐데 무슨 깡이야?”
“술이 안 들어가고 배기냐? 논문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탁!
서강일이 다소 세게 잔을 내려놓았다. 유쾌했던 분위기가 물을 먹은 것처럼 착 내리깔렸다.
민우는 말없이 빈 잔을 다시 채웠다.
서강일의 독백이 시작됐다.
“너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앞으로 쭉쭉 나가고 있는데…… 하하.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서강일도 팀 307호 멤버였다.
그중 잘 풀리지 않은 사람은 서강일과 강민희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짝도 잘 풀리지 않아 더욱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멤버들은 그들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민우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괜한 동정은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언제는 시간 문제라면서?”
“버티고 버티면 언젠가는 될 줄 알았지. 하지만 지금 상황이 뭐야? 인구 절벽이니 뭐니 해서 이제는 대학원에 올 사람도 점점 없어지는 추세잖아. 이렇게 되니 기다려도 되나 싶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