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2)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다.
이번 강의는 3학점 강의로, 일주일에 한 번씩, 세 시간 동안 강의를 한다.
보통 3학점 강의는 한 시간 반씩 두 번으로 나눠 수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민우는 스케줄상 이번 강의를 세 시간 통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다음 수업은 수강신청변경기간이 끝난 다음이라 진도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인문학의 개념 정도를 설명하는 선에서 끝냈다.
“……때문에 인문학이란, 어떤 고유한 학문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에서 나타난 인간다움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 철학, 역사, 수학, 물리 등, 최근 학문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 본질은 같습니다. 그리고 떨어진 조각을 하나로 맞춰보는 것이 이번 강의를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이기도 하지요.”
준비한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민우가 웃으며 말을 거두자, 여러 학생들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강단에 서는 교수로서 보기 힘든 표정이다.
대부분 언제 끝나나 기다리는 학생들이 많으니까.
“자,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천천히 풀지요.”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고생했어요. 다음 시간에 봅시다.”
민우는 전원을 끈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학생들이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학생들도 많았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강단 쪽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주 교재를 손에 들고 있었다는 건데, 공통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교수님. 죄송하지만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팬이에요!”
여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미 여러 미디어에서 ‘뇌가 섹시한 남자’라는 호평을 듣고 있는 민우였다. 당연히 여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모습을 수빈이 보지 않아야 하는데.
“팬은 좀 난감하네요.”
“그럼 사생팬은 어떠세요?”
“하하하!”
학생들이 웃기 시작한다.
확실히 시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민우가 학부 때는 이렇게 대담하게 농담을 하는 학생들은 없었는데.
“그건 더 곤란하죠.”
“이수빈 교수님께는 비밀로 할게요!”
두 사람의 관계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유명한 부부 교수였으니까.
이러다 잡혀 사는 거 아니냐는 식의 엄한 말이 나올 것 같아 민우가 손을 뻗었다.
“일단 사인 정도로 타협하죠. 한 분씩 주세요. 여기에서 다음 수업 바로 있는 것 같으니 간단히 해드릴게요.”
민우는 요청을 물리칠 수 없어 펜을 꺼내 일일이 사인해 주었다.
책을 많이 내고 사인회도 자주 했기 때문에 이런 건 일 축에도 끼지 못한다.
사인을 마친 책을 모두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수빈 교수님께는 비밀로. 알죠?”
“넵!”
열 명 넘는 학생들을 상대한 다음 청강생들의 이름을 출석부에 올려주고 나니 진이 빠졌다.
그래도 즐겁다.
목표로 하던 곳에서 처음 강의를 마쳤으니까.
민우는 출석부를 덮고 가방을 챙겼다,
“저…….”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아직 교실을 떠나지 않은 학생 하나가 시야에 잡혔다.
아까 뒤쪽에서 시선을 끌었던 그 학생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여학생. 포켓이 달린 가슴께엔 이름이 적힌 명찰이 보인다.
이름은 이소윤.
아까 자리를 잡지 못해 구석에 서서 두 눈을 빛내고 있던 바로 그 학생이었다. 몸은 피곤해 보이는데 눈만 살아 있어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잠시 움찔한 여학생이 꾸벅,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청강생인가요?”
이름을 넣어주기 위해 민우는 다시 출석부를 펴고 펜을 쥐었다. 적어도 사인을 받으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손에 책이 들려있지 않았으니까.
이소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학기에 청강하려고요.”
“이소윤 학생이죠?”
“어떻게 아셨어요?”
민우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명찰을 가리켰다.
“거기에 적혀 있어서요. 무슨 과인가요? 실험 가운인 것 같은데.”
“아, 의학과예요. 4학년…….”
“의학과?”
민우는 깜짝 놀랐다.
명인대학교에는 의대가 있다. 예전에 석사 시절 쓰러져 신세를 졌던 병원이 바로 명인대 부속병원이었으니까.
그런데 의예과도 아닌 의학과라니.
명인대 의대는 의예과와 의학과로 구분된다. 보통 2년 과정의 예과를 의예과라고 부르고, 4년 과정의 본과를 의학과라고 부른다.
그 사실을 떠올린 민우가 물었다.
“본과 4학년이면 실습 다니느라 정신없지 않아요? 교양과목 들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특별히 허가를 받았어요. 교수님 강의는 꼭 듣고 싶었거든요.”
다소 허둥대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민우는 지금까지 여러 대학과 각종 단체에서 강의를 많이 해왔다. 진심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경험이 없지는 않다.
민우가 출석부에 학과와 이름을 적고 다시 이소윤을 바라보았다.
“꼭 듣고 싶다는 사람들이 드문 건 아니지만. 음…… 뭐 어려서부터 문학이나 철학을 좋아했다는 식의 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아.”
정곡을 찔렸는지, 이소윤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학생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어 다른 강의가 있는 게 분명했다. 민우는 일단 짐을 챙겼다.
“괜찮으면 잠깐 나갈까요? 뭔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네요.”
“아, 예!”
민우는 이소윤과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걸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음 강의는요?”
“강의는 없고, 옆에 병원에 실습하러 가 봐야 해요.”
“그럼 시간이 없겠네요.”
“점심 전까지는 돌아가야 해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민우도 다음 강의는 없었다. 지금은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잠깐 산책하는 정도로는 크게 문제 될 것 없다. 어차피 일찍 들어가 봐야 차민재의 독서만 방해할 테고.
민우는 인문관을 나서 뒤쪽에 있는 휴식 공간으로 향했다.
“커피 좋아해요?”
“네!”
자판기 앞에 서서 즐겨 먹는 커피를 뽑았다. 그리고 캔을 하나 이소윤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앉을까요?”
민우와 이소윤은 옆에 놓인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대학원 시절, 한진섭과 자주 와서 푸념을 늘어놓던 바로 그 자리였다.
“이거 맛있네요. 처음 마시는데.”
“학부 때부터 자주 마시던 커피예요. 연구실 냉장고에도 잔뜩 있고.”
“그렇구나…….”
흰 가운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돌렸다.
“실은요. 인간다운 것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보고 싶어졌어요.”
“인간다운 것?”
“저는 곧 의사가 되잖아요. 물론 국시를 패스해야 하긴 하지만, 저는 의사로서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러려고 의대에 온 거고요. 그러다 보니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소윤은 잠시 말을 줄였다. 하루 이틀 한 고민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민우는 그 고민을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일까. 환자를 돌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의사는 단순히 직업인 걸까? 이런 물음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물론 의대에서도 그런 것들을 배울 기회가 있긴 했지만 깊지는 않아서요.”
“교수님이나 선배들에게 엄청 혼났겠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민우는 피식 웃었다.
“본과 4학년이면 임상 실습 들어가고, 국시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딴생각이나 하고 있으니까.”
“맞아요.”
그럼에도 이소윤은 침울해하지 않았다.
가는 길은 완전 다르지만, 문득 민우는 그녀의 두 눈에 흐르는 눈빛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좋은 의사가 되겠네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해부실습 때 동맥이랑 정맥도 구분 못 하는 낙제생이었는데요.”
“저랑 비슷하네요. 저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구분 못 할 때가 있었으니까. 이것도 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거든. 대충 비슷한 거 아닐까요?”
이소윤이 웃었다.
이제 그녀의 진심은 확인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청강생이 있었지만, 이렇게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방금 수업 시간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근 학문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 본질은 같다…….”
때마침 이소윤이 그 말을 꺼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의학에서도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어떤 본질에 가까운 그런 개념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추측형이네요.”
당돌한 되물음에 민우가 이소윤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하자 이소윤이 입을 가리며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저는 의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청강을 하다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느새 캔을 비운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분리수거 통을 향해 캔을 휙 던졌다.
포물선을 그린 캔은 빨려 들어가듯 통에 쏙 들어갔다.
“오늘은 운이 좋으려나. 하하하. 아무튼 나중에 그 해답을 찾게 되면 공유해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저도 궁금하니까.”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지어야 할 시간이었다. 이소윤도 일어났다.
“교수님 연구실에 가끔 찾아가도 될까요?”
“그럼요. 인문관 321호에 있어요. 오피스 아워는 강의계획서 보시면 나와 있을 거고요.”
“말씀 편히 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다음을 기약하며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봄바람이 살랑 스치고 지나갔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소윤은 민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제자 차민재와 점심을 먹은 민우는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후식으로 커피를 내렸다.
두 사제는 테이블을 마주하며 앉았다.
“지도교수는 정했냐?”
지나가듯 민우가 묻자, 차민재가 흠칫 놀랐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을까요?”
“하하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대학에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잖아. 당장 눈만 돌려봐도 서지훈 선생님이나 설예라 선생님도 계시고. 굳이 내가 아니라도 지도교수님으로 청할 선생님은 많잖아.”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도교수는 선생님으로 정했습니다.”
“신중히 생각해.”
“그럴 거였다면 제가 상아대를 그만두고 청문대로 재입학하지도 않았겠죠.”
민우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민우는 차민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청문대에서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님 덕분에 명인대에서 공부하게 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리고 청문대에 있을 때도 졸업할 때까지 잘 봐주셨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면야 고맙지만. 아무튼 명인대에 들어온 건 네 실력이지 내 덕은 아니다. 명인대 대학원 입시가 좀 쉬운 것도 아니고.”
“그거 은근히 선생님 본인 자랑하시는 거 같은데.”
“자랑 좀 하면 안 돼?”
“하하하하.”
넓은 연구실에 두 사제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선생님. 저 오늘부터 여기 방돌이 해도 되죠?”
차민재가 조심스레 물었다.
‘방돌이’는 쉽게 말해 지도교수의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는 학생을 의미한다. 수제자가 아니라면 넘볼 수 없는 특권이기도 하다.
이미 차민재는 청문대 시절 민우의 연구실 방돌이를 한 적이 있었다.
일부 교수들은 방돌이를 개인 조교로 전용하지만, 민우는 좀 달랐다.
개인적인 심부름은 일체 차민재에게 시키지 않았다.
“음…… 글쎄다.”
민우는 고민했다.
“좀 그럴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도 그렇지만 나도 오늘 첫 출근이거든. 거기에 대해 생각해보진 않았어. 그리고 요즘 교수 갑질 때문에 시끄럽잖아. 그러니 좀 조심스러운 건 있지.”
“그것도 그러네요. 아무래도 명인대는 더 주목받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보자. 연구장학금 형식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면서 하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따르르릉!
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커피캔을 내려놓고 책상으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