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1)
캠퍼스의 봄은 여전히 푸르렀다.
여러 학생이 지나가는 소소한 풍경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얼굴에도 봄처럼 산뜻한 미소가 걸려 있다.
수빈이 지나가듯 말했다.
“목표를 달성한 기분이 어때요?”
“갑자기?”
“예전부터 명인대 교수가 되는 게 목표였잖아요. 오빠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소감이 어떠냐는 거죠.”
그렇게 말을 매듭지은 수빈이 예쁘게 웃는다.
그녀를 바라보던 민우는 싱거운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가슴이 두근거려. 이번엔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아~ 정말. 하여간 천상 교수라니깐. 머릿속엔 온통 공부랑 제자들 생각밖에 없죠?”
“당연히 하나 더 있지.”
은근히 웃는 민우를 보며, 수빈이 기대 섞인 표정으로 묻는다.
“뭔데?”
“우리 윤아.”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이수빈이 입을 샐룩했다.
“나는 뒷전이지?”
“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인데.”
“됐네요! 신성한 연구실에서 애정행각을 시도한 내 잘못이지. 아무튼, 곧 수업 시작하니까 강의 열심히 해요. 노벨상 수상자의 위엄을 보여주라구.”
“똑같은 말을 하네.”
뒤돌아서려던 수빈이 다시 몸을 돌린다.
“누구랑?”
“아까 오면서 서지훈 선생님 만났거든. 선생님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씀하시더라.”
수빈이 싱긋 웃었다.
“그만큼 기대가 되는 게 아닐까요?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강의요. 그건 선생님도, 나도 그렇지만 오빠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도 마찬가지겠죠.”
“옳으신 말씀.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철저히 준비해 볼까?”
“첫날부터 너무 힘 빼지 말고요.”
수빈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민우는 홀로 남은 연구실에 앉아 오늘 강의 시간표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보니 이번 학기에 받은 강의를 전체적으로 훑어보게 되었다.
‘이번 강의는 학부 두 과목, 대학원 석사과정 하나 박사과정 한 과목이구나.’
‘강사법’이 시행되기 전보다 수업 시수가 확 늘었다.
강사법이란 쉽게 말해 대학교 시간강사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골자인 개정법이다.
지금까지 시간강사들에겐 교원에 준하는 자격이 없었다. 거기에 방학이 되면 임금도 지급받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다. 전용 연구실도 배정받지 못하고, 고용 형태에 대해서도 불안정한 게 많았다. 4대보험은커녕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교육계에서는 법률로 처우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오랜 진통 끝에 법률이 제정되어 시행된 것이다.
얼마 전 시행된 강사법으로 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각 대학에서는 시간강사에게 할당된 강의를 전임교수에게 돌리거나, 겸임교수나 초빙교수의 수를 늘리는 식으로 꼼수를 부렸다.
그 결과 많은 시간강사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시간강사들을 위한 개정법률이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보통 전임교수들은 한 학기에 한두 과목 맡는 것이 전부였지만, 강사법의 여파로 민우는 네 과목을 맡게 됐다. 모두 3학점짜리 강의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임교수가 한 학기에 12학점 이상을 강의한다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민우는 강의가 많아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자신에게 강의가 집중된 탓에, 다른 강사가 기회를 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강의 자리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고, 강의를 받지 못한 학문후속세대들이 동력을 잃게 될 텐데…….’
민우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학문을 하는 것도 돈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생계는 이어가야 하니까.
왠지 이름 모를 시간강사들의 권리까지 빼앗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입법의 문제라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쓰렸다.
‘뭔가 대책을 찾지 않으면 안 돼.’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학문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랐다.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민우는 체념하지 않았다.
실패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민우의 생각은 하나로 수렴되었다.
‘누구나 걱정 없이 학문을 할 수 있는 사회…… 내가 반드시 해낸다.’
각오를 다진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첫 강의인 <존재와 영혼의 형식> 시작까지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 강의의 제목은 몇 년 전 민우가 세상에 발표한 루카치의 유고의 제목이기도 하다.
바로 그 유고를 바탕으로 수립된 강의.
그래서인지, 당초 수강생이 몰리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출석부에는 이름이 가득 적혀 있었다.
‘어디 보자. 60명…… 정원이 꽉 찼구나. 이번 주까지는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수강신청변경기간이 끝나고 다시 계획을 세워야겠어.’
민우는 출석부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얼마 전 명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에 입학한 차민재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이다.
“선생님!”
차민재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예전엔 얌전하던 친구였는데,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민우는 연구실 문을 반쯤 연 채 그를 맞았다.
“어때? 명인대 공기는.”
“당장이라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은데요?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체감해보니 역시 다르네요. 다들 부지런해요.”
“그렇지? 나도 대학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런 느낌이었지. 그래서 도서관을 떠날 수 없었어.”
“나가시는 길이에요?”
“곧 수업이라. 일단 들어와라.”
민우가 그를 안으로 들였다.
차민재는 상아대 강사 시절 인연을 맺은 제자 중 하나다.
하지만 상아대를 자퇴한 이후 수능을 다시 치러 청문대에 입학했고, 군복무를 마치고 학부를 졸업한 뒤 명인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것이다.
이미 그는 학부 시절 학회에 논문을 게재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명인대 대학원 입학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특출난 노력과 재능도 한몫했지만, 민우의 애정 어린 관심과 조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민재는 이제 민우의 말이라면 껌뻑 죽을 정도다.
“뭐 볼일 있어서 찾아왔냐?”
민우는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 민재의 앞에 내려놓았다.
“아뇨. 그냥 인사드리려고요. 오늘 처음 강의하시니까 왠지 기분이 묘해서.”
“내가 강의하는데 네 기분이 왜 묘해?”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제 일도 아닌데 마치 제 일처럼 느껴지는 거.”
민우는 피식 웃었다.
마치 자신의 청년기를 보는 것 같다. 아끼고 따르는 스승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울고 웃기를 반복할 때가 있었지.
“오늘 강의는?”
“하나 있는데, 오후 늦게 있어요.”
“그럼 온 김에 점심이나 같이 먹자. 갈 데 없으면 연구실 좀 지키고 있어라. 새로 들어온 책이 잔뜩이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야.”
민우가 가리킨 곳엔, 얼마 전 지음사에서 나온 신간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민재의 두 눈에 총기가 반짝였다.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또 뭐야. 내선전화는 받지 말고. 그럼 나 간다.”
“예.”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연구실을 나섰다.
한참 복도를 걸어 인문관에 위치한 강의동으로 들어갔다. 전공 강의실 근처에 있는 강의실에 배정받았기 때문에 금방 갈 수 있었다.
‘언제나 처음엔 긴장이 된단 말이지.’
문 앞에 선 민우는 가벼운 고양감을 느끼곤, 문고리를 돌렸다.
안에는 학생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교수님!”
“박민우 교수님 오셨어!”
몇몇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강단으로 걸으며 시선을 돌리니, 눈에 익은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애정 어린 시선들.
문득, 민우는 학부 1학년 때 처음 서지훈 교수를 만났던 그때의 강의실이 떠올랐다.
강단에 오르는 서지훈 교수를 보며 그때의 자신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겠지. 존경과 선망을 담은 그런 눈빛을 담아서.
‘하지만, 이제는 내 시간이야.’
다시 현실로 돌아온 민우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교탁에 짐을 풀고 마이크를 잡았다.
“아, 아. 들리세요? 뒤쪽 어때요?”
“잘 들립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와 주셨네요.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안녕하세요!”
리액션이 좋다. 왠지 국문과 전공 강의실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민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학계뿐만이 아니라 TV에도 출연해 얼굴을 널리 알렸다. 아직 예능에는 출연하지 않았지만,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상황이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한 학기 동안 공부를 같이 하게 됐네요. 그런데…… 출석부에 기록된 인원보다 훨씬 많은 느낌이네요.”
확실히 그랬다.
이곳 강의실은 책상이 80여 개 정도가 놓여 있다. 그런데 앉지 못해 뒤에 서서 강단을 바라보는 학생들이 어림잡아도 20여 명은 되어 보였다.
“청강하시려는 분들이 많나 보네요. 음, 웬만하면 청강생은 받지 않지만 교양 과목이니까 이번에는 청강생을 받겠습니다.”
“와!”
“감사합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민우는 웃으며 재차 설명을 이어갔다.
“수업과에 따로 얘기해 여석을 늘리진 않을게요. 그러면 그만큼 청강하시는 분들이 더 늘어날 테니까. 그래도 청강하시는 분들은 이따 나와서 출석부에 이름은 올려두세요.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거니까요. 자! 그럼 강의계획서를 보시죠.”
그때 민우의 시선을 사로잡는 학생 하나가 있었다.
구석에 얌전히 서 있는 학생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흰 가운을 걸치고 있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데도 두 눈만은 반짝이고 있다.
‘공대생인가? 실험하다 왔나 보네. 출석부에 이공계열 학생은 거의 없었는데.’
민우가 이번 학기에 가르치려는 과목은 루카치의 유고를 교양 수준에서 풀어낸 인문학 강좌다. 그래서 대부분은 인문대나 예체대 학생들이다.
사그락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민우는 그 여학생에서 시선을 떼고 강의계획서를 읽어 나갔다.
“대부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강의는 <존재와 영혼의 형식>이라는 저서를 기반으로 합니다. 죄르지 루카치라는 학자의 여생을 살피고 그의 학문적 노정을 탐색하는 것이 목적인 셈이지요. 나아가서는 인문학의 핵심인 ‘인간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을 이어갈 겁니다.”
학생들이 최고의 집중력을 보였다. 민우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민해 보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정답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과 사상을 소우주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우주의 개수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테니까요. 저는 사고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우리 수업에 한해서만큼은.”
민우가 싱긋 웃었다.
“그럼 교재가 필요하겠지요? 저에게 노벨문학상이라는 큰 영예를 안겨준 교재, <존재와 영혼의 형식>이 주 교재입니다. 중앙도서관과 국문과 도서관에 총 30여 권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아마 오늘 중 30권이 더 비치될 예정이니, 총 60권이 되겠네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숫자가 나와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어…… 그럼 책을 구입하지 않고 대출해서 공부해도 되는 겁니까?”
앞줄에 앉은 남학생의 말에 민우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셔도 됩니다. 그러라고 60권이나 갖다 놓은 거니까요.”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적어도 그런 교수는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거다.
“저는 이 과목의 정원에 맞게 책을 구입해서 도서관에 기증해 놓았습니다. 어차피 교재를 사봐야 제 주머니로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아요.”
그 이유를 대부분 알고 있다. 민우는 루카치의 유고를 묶어 낸 책, <존재와 영혼의 형식>의 모든 인세를 사회단체에 기부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책을 구매하셔도 됩니다. 판매수익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질 거예요.”
학생들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누구는 책값을 아껴서 좋고, 누구는 좋은 일에 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거기에 우열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부교재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인문학 도서들을 읽고 나름의 해답을 찾았으면 해서요.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쓴 분들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성과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은 학점을 떠올릴 거다. 수업을 듣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니까.
민우는 젊은 교수인 만큼, 성적이 전부는 아니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이곳에 모인 학생들이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얻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의 인생 제2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