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 < 최종장. 진리는 나의 빛 (4) >
“이야. 징그럽게들 모였구만. 대체 몇 명이나 모인 거야?”
진섭이 혀를 차며 청문대 특별강의실을 둘러보았다. 말이 강의실이지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그곳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다.
놀란 것은 진섭만이 아니었다. 한일대의 서강일도 곁에서 감탄을 흘렸다.
“한물 간 이론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네. 하, 진짜 말이 안 나온다. 국내에서 이렇게 학자들을 많이 모은 사례가 있던가?”
“없을걸?”
당초 서강일은 사람들이 얼마 모이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아무래도 죄르지 루카치의 이론은 유행이 한참이나 지났으니까.
하지만 그 예측은 정확히 빗나갔다.
루카치의 미공개 유고와 관련된 기사를 접한 세계 각지의 학자들은 주저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영미권 학자들은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및 중동의 명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말 그대로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학문의 경연장이 마련된 것이었다.
“예전에 민우한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
진섭의 목소리였다. 강일이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진섭은 감탄과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좌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출중한 능력을 가졌는데 왜 해외에 나가서 활약하지 않냐고. 마음만 먹으면 하버드든 케임브리지든 동경대든 아무 데나 갈 수 있었잖아.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
“아아아. 왠지 안 들어도 알 거 같은 내 자신이 싫다!”
물론 농담이었다. 두 청년은 실없이 웃었다. 곧 진섭이 이어 말했다.
“자기가 외국에 나갈 필요가 뭐 있냐고. 오히려 외국에 있는 유명 인사들을 한국으로 모여들게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지. 우리나라를 학문에 중심지로 만들겠다면서.”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인정할 수밖에 없잖아. 이렇게 큰 무대를 그 녀석 혼자서 만들었는데.”
진섭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왠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부러움, 혹은 질투? 아니다. 그보다 더욱 근원적인 곳에서 타오르는 감정이었다.
자신도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열정. 바로 그것이었다.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말이다.
그것은 서강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자끼리 우중충하게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자리에 가서 앉지 않고.”
민우의 목소리가 그 진지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두 사람의 가운데로 끼어든 민우가 어깨동무를 했다. 자켓을 하나 걸쳐 캐주얼한 느낌을 살렸다. 젊은 학자라는 인상이 강했다.
진섭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이고. 우리 박 교수님의 지리는 클라스에 감복하는 중이였지요.”
“갈아입을 속옷은 챙겼고? 아무튼 두 눈 크게 뜨고 잘 보고 있어.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앞으로도 이런 무대는 흔해질 거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겠다?”
이번엔 강일이 물었다. 글쎄, 라고 중얼거린 민우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윽고 몸을 돌려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실망인데.”
민우의 두 눈에 신뢰가 가득했다. 두 친구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원해 줘.”
두 친구의 어깨를 다독인 민우가 연단 쪽으로 내려갔다. 방심하는 사이에 한 방 먹은 진섭과 강일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한편, 민우가 연단으로 향하는 도중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를 청했다.
「 안녕하십니까. 프로페서. 」
낯선 언어였다. 하지만 유품의 능력을 완전히 흡수한 민우는 그것이 스웨덴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민우가 걸음을 멈췄다.
「 반갑습니다. 참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지요? 」
「 스웨덴에서 왔습니다. 」
그가 명함을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도 명함을 교환했다. 낯선 남자의 이름은 루드베크였는데, 명함에서 그의 소속을 본 민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오셨네요. 」
「 그렇습니다. 몇몇 동료들과 함께 왔지요.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군요. 」
스웨덴 아카데미는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를 겸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민우는 그의 방문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민우는 잡념을 가볍게 털어냈다.
지금은 노벨상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루카치의 유고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민우는 그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연단에 올랐다.
짝짝짝짝―
사방에서 박수가 터졌다. 뒤편에 설치된 세 대의 카메라도 작동을 시작했다. 오늘 민우의 강연은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될 예정이었다.
민우가 마이크를 쥐었다. 동시에 뒤편에 있는 스크린에 프레젠테이션이 켜졌다.
「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지금부터 죄르지 루카치의 미공개 저서, <존재와 영혼의 형식>에 대한 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 」
장내가 고요해졌다. 민우는 영어로 강연을 시작했고, 실시간 통역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막을 보거나 이어폰을 꼈다.
「 대표적인 미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루카치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역시 마르크시즘입니다. 실제로 그만큼 마르크시즘 문예이론을 체계화한 학자도 드물지요. 」
스크린이 넘어갔다. 루카치의 유고의 표지와 함께 핵심 내용을 요약한 슬라이드가 펼쳐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원고이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유고는 조금 특별합니다. 생전에 그가 남긴 각종 이론과 전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죠. 존재와 영혼의 양식을 규명한 하나의 에세이처럼 읽힙니다. 때문에, 단순히 문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역사, 철학, 미술 등 다양한 인문예술 분야에 접목시킬 수 있습니다. 일종의 통합이론인 셈이죠. 」
‘통합이론’이라는 혁신적인 표현에 학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두 시간에 걸친 민우의 강연을 끝까지 들은 사람들은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몇몇 기자들은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페르마의 정리를 완벽히 증명한 앤드류 와일스의 무대를 보는 것 같았다고.
민우의 강연은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무대이기도 했다. 객석에 앉아 민우의 강연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노년의 사내도 민우에게 박수를 보냈다.
* * *
「 민우 씨. 여깁니다. 」
가디언지의 조슈아가 손을 흔들었다. 강연을 마치고 기자회견까지 모두 소화한 민우는 약속한 카페에서 조슈아를 만났다.
그런데 손님이 또 한 명 있었다.
아까 민우의 강연을 보고 눈물을 흘린 바로 그 노년의 사내였다. 그는 페렌츠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로, 루카치의 조카였다. 등이 조금 굽고 주름이 많아 나이가 굉장히 많아 보였다.
민우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인사가 늦었습니다. 꼭 뵙고 싶었습니다. 박민우입니다. 」
「 고맙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습니다. 숙부의 유산을 새롭게 발견한 느낌이에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
페렌츠는 감격한 표정으로 악수를 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는지, 그는 한동안 민우의 손을 꼭 잡았다.
자리에 앉은 민우는 가방에서 유품을 꺼냈다. 만년필과 안경, 그리고 유고가 들어 있었다. 민우는 상자를 연 채로 페렌츠에게 건넸다.
「 늦게 돌려드려 죄송합니다. 설명 드리기 좀 복잡하지만, 유고를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어서요. 지금이라도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
페렌츠는 안경과 만년필을 챙겼다. 하지만 유고는 민우에게 돌려주었다.
「 이건 민우 씨가 가지고 계셨으면 하네요. 」
「 예? 하지만······ 저작권은 페렌츠 씨가 모두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
「 사정은 모두 들었습니다. 유고의 시작을 제 숙부께서 한 것은 맞지만, 남은 페이지를 모두 채운 게 바로 민우 씨라고요. 」
페렌츠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 투명한 미소엔 어떠한 욕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 숙부의 이론을 이렇게 멋지게 완성시킨 것은 바로 민우 씨의 공로입니다. 강연을 듣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더군요. 잠시나마 숙부가 살아계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감동, 눈을 감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
잠시 말을 끊은 페렌츠가 유고를 직접 민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 그래서 이건 민우 씨가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유고의 저작권도 모두 민우 씨에게 양도하지요. 관련 서류는 조만간 작성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
「 잠깐만요. 페렌츠 씨. 」
「 괜찮습니다. 숙부의 사상과 이론을 앞으로도 널리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
민우가 다시 설득을 하려고 했지만 페렌츠의 단호한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헝가리에서 온 노년의 사내는 바람처럼 카페를 나섰다.
조슈아가 물었다.
「 의외의 상황이네요. 이제 어쩌실 겁니까? 」
「 출판 준비를 해야죠. 유고의 진가를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알릴 생각입니다. 」
「 호오, 역시 추진력이 대단하시다니까. 출판사는 정하셨습니까? 」
「 센트럴북스로 정했습니다. 페렌츠 씨의 말대로 널리 알리려면 그 방법이 가장 좋으니까요. 」
민우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임스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공개 강연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찾아온 가을. 하늘은 점차 높아지고 사방이 단풍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민우는 초빙교수에서 조교수로 승진했고 수빈은 무사히 박사학위를 취득해 명인대 초빙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와중에 윤아는 돌잔치에서 청진기를 잡아 모두의 기대를 받았다.
한편 진섭은 청문대 한국문학교육원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예린과 결혼했다. 예린은 교수직을 겸하며 성공가도를 달렸고, 강일도 무사히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폴라리스의 핵심 멤버로 입지를 다졌다. 연주는 이제 완벽한 경영인으로 성장했다. 청문대 이사로서 공격적으로 대외활동을 펼쳤다.
‘벌써 가을인가. 시간 참 빠르네.’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하나둘 흩날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잠시 멈춰서 가로수를 올려다보았다.
청문대로 향하는 길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출근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으니까.
미소를 지은 민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구실로 들어가니 택배가 하나 와 있었다. 민우는 겉옷을 벗기도 전에 칼로 포장을 뜯었다. 책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표지에는 <존재와 영혼의 형식>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저자명은 죄르지 루카치, 그리고 박민우 공저로 들어갔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편으로는 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근 1년 동안 이 책을 세상에 공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수십 가지의 언어로 번역했고, 동시 출간했다. 출판물로 얻는 모든 수익은 유니세프에 기부할 예정이었다.
“드디어 왔냐?”
진섭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오는 길인지 교재를 들고 있다.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들고 있던 책을 진섭에게 건넸다.
“에헤이! 아마추어같이 왜 그래? 싸인을 빼먹으면 쓰나.”
“우리 사이에 부끄럽게 뭔 싸인이야.”
“이래서 사람은 공부만 하면 안 된다니까. 나중에 프리미엄 붙여서 비싸게 팔아먹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민우 교수의 저서인데.”
한숨을 내쉰 민우는 속지에 싸인을 하고 다시 진섭에게 책을 건넸다. 진섭은 기쁜 마음으로 친구의 결실을 받아들었다.
“잘 읽으마.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어학 쪽만 파다 보니 문학 쪽은 이해가 잘 안된단 말이지.”
“전공을 파는 것도 좋은데 다양하게 읽는 게 좋지 않나?”
“말이 쉽지. 읽어야 할 게 한두 갠 줄 아나. 아무튼 좀 앉아 봐. 할 얘기 있다.”
진섭이 분위기를 잡자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린과 부부싸움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이번에 명인대 국제어학원 교수채용 공고 떴는데 지원했어. 너한테 처음으로 얘기하는 거야. 와이프한테도 말 안 했다.”
“그래?”
“······뭐냐. 그 싱거운 반응은.”
“언젠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거든. 여기에서 썩기 아까운 인재시잖습니까. 아무튼, 한 선생님. 행운을 빕니다.”
“넌? 명인대로 옮길 생각 없어? 여기도 농사 얼추 끝났잖냐.”
싱긋 웃은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청문대는 조경이 잘 되어있기로 유명했는데, 과연 걷기 좋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민우의 대답은 한참 뒤에 흘러나왔다.
“아직 때가 아니야. 시간이 필요해.”
“역시 그런가. 서지훈 선생님도 나름 애쓰시는 거 같던데 잘 풀렸으면 좋겠네. 아무튼 난 간다.”
“수고.”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민우는 연구실을 나섰다.
‘지금쯤 책이 케레페시 공동묘지에 도착했겠지? 기뻐하셨으면 좋겠는데.’
케레페시 공동묘지는 루카치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지금쯤 그의 조카가 책을 헌정했을 것이다.
민우는 인문관을 나섰다.
적당히 쌀쌀한 날씨였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흩날려 제법 운치를 만들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학생들의 인사말에 민우는 미소로 화답했다.
바로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국제전화였다. 민우는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요 며칠 언론에서 떠들던 이야기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우는 차분히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네, 박민우입니다. 」
「 오랜만에 인사드리는군요. 프로페서. 기억하실는지 모르겠군요. 루드베크입니다. 스웨덴 아카데미의. 아, 지금은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이긴 합니다만. 」
쏴아아아―
바람이 크게 불며 나무를 흔들었다. 함박눈처럼 낙엽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든 민우의 얼굴로 나뭇잎들이 하나둘 부딪치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귓가로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해냈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