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 < 최종장. 진리는 나의 빛 (3) >
루카치의 유품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휘황찬란한 빛의 향연이었다. 강렬한 푸른빛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깜짝 놀란 민우는 안경을 벗었고, 만년필을 안경과 함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대체 뭐야?’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가끔씩 펜과 안경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살폈다.
외형의 변화는 없었다. 다만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질 뿐이다.
그때 쏟아지던 빛의 흐름이 갑작스레 변했다.
민우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승천하는 용처럼 천장을 배회하던 푸른빛이 민우의 머릿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
“흐읍!”
신음을 흘린 민우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상쾌한 물줄기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동시에 유고에 담긴 방대한 지식이 쉴 새 없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푸른빛이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번쩍!
마지막 점멸과 함께 방 안을 수놓던 푸른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민우는 탄성을 내뱉으며 의자에 밀려나듯 주저앉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런 생각에 루카치의 유품을 살펴보았다. 만년필을 집는 순간, 희미한 푸른빛이 반짝이며 누군가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 변방의 젊은이여. 유고를 완성해 줘서 고맙네.
중년 남성의 짧은 한마디.
민우는 그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단번에 떠올렸다. 루카치의 유품을 얻었던 그날 밤 꿨던 꿈에서 나왔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민우는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긴요. 당신 덕분에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편히 쉬시길.’
잠시 묵념하며 마음속으로 루카치의 영면을 빌었다. 곧 눈을 뜬 민우는 만년필을 어루만졌다. 이질감이 들었다.
‘힘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다.’
더 이상 만년필에서는 푸른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안경도 마찬가지였다.
민우는 유품에 깃들어 있던 신비한 능력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서 책장 앞에 섰다. 그리고 덴마크어로 적힌 소설책을 펼쳤다. 활자를 눈에 담은 민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는데도 덴마크어 활자가 한국어로 바뀌어 보이고 있었다.
‘빛이 내 머릿속으로 스며든 이유가 있었어. 이제 안경을 끼지 않아도 원서를 읽을 수 있게 됐구나. 그렇다면 만년필도 마찬가지겠지?’
유품에 깃들어 있던 모든 능력이 민우에게 흡수되었다. 이제 유품을 지니지 않더라도 원한다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제자리에 꽂고 자리로 돌아온 민우는 유품을 상자에 조심스레 담았다.
짹짹― 짹―
귀에 익은 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어느새 커튼 너머로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 * *
새벽같이 윤아가 울음을 터트린 탓에 수빈은 정신없는 아침을 보냈다. 겨우 아이를 다시 재운 그녀는 서재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에서 뭐 하고 있어요?”
“아, 그게······ 논문 코멘트 받은 거 정리하고 있었지.”
“그랬구나. 좀 잤어요?”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피로감은 싹 사라져 있었다. 마치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피곤하겠네.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요?”
“새벽 네 시쯤.”
“새벽 네 시? 그렇게 늦게 들어왔는데 좀 이상하네요. 술도 마셨을 텐데 멀쩡해 보이네. 아니, 뭔가 평소랑 좀 다른데요?”
가까이 다가온 수빈이 눈매를 좁히며 민우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현직 평론가의 날카로운 눈빛이 사방에 닿았다.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눈빛도 더 차분해진 거 같고.”
“하하하. 기분 탓이겠지.”
“아녜요. 오빠에 한해서 내 눈은 누구보다도 정확하다구.”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달라 보이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민우가 잘 알고 있었다. 유고의 무궁무진한 지식이 머릿속으로 들어왔기에 변화가 보이는 것이리라.
아직 거울을 보지 않아 확실히는 모르지만, 풍기는 분위기와 눈빛이 더욱 심후해졌을 것이다.
“역시 박사논문 심사가 힘들긴 한 모양이에요.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할 정도면. 아무튼 논문 심사 합격한 거 축하해요.”
“고마워. 다음은 네 차례야.”
“말 안 해도 알거든요?”
“하하하.”
육아와 논문을 병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빈은 해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스케줄을 소화해 내면서도 박사논문을 쓴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요컨대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가 중요한 것. 수빈은 육아와 학업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없이 고민했고, 나름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민우의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고픈가 보네. 오빠가 좋아하는 국 끓여 놨으니까 같이 아침 먹어요.”
“좋지. 윤아는?”
“또 자요. 어제 자다 깨다 계속 그래서 얼마나 힘이 들던지. 으휴.”
그래도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신혼을 충분히 즐기기도 전에 태어난 아이였지만, 그만큼 윤아의 존재는 두 사람에게 특별했다.
“수빈아.”
“응?”
“혹시 말이야. 예전에, 그러니까 석사 1학기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미완성 원고에 대한 이야기.”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수빈이 다시 옆자리에 앉았다. 민우가 진지하게 묻자 궁금해졌던 것이다.
“만약에 어떤 유명한 학자가 너에게 미완성 원고를 주면서 끝까지 완성을 시켜달라고 부탁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거 같냐고 물었던 거. 유고라는 가정하에서.”
“아! 생각났다. 섭이 오빠랑 같이 있었을 때 물었던 거죠? 근데 그건 왜요?”
민우는 대답 대신 책상에 놓인 루카치의 유고를 수빈에게 건넸다. 오래되어 보이는 책은 수빈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수빈이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이게 대체 뭐예요? 독일어라 잘 모르겠는데. 아, 여기에 이름이 있네요. 죄르지 루카치?”
“맞아. 루카치의 미공개 유고야.”
“뭐, 뭐라고요?”
수빈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죄르지 루카치라는 이름에 담긴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미공개 유고라니.
“지금 농담하는 거죠? 박사논문 통과 기념으로.”
“농담처럼 들려?”
민우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던 수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지금 그 어떤 때보다 진지했다.
“이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거예요?”
“그건 차차 설명해 줄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때 유고를 완성하면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대답은 아직도 유효해?”
“당연하죠. 모름지기 지식은 널리 전수되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무엇보다도 세상에 공개할 필요가 없다면 그런 부탁도 안 했겠죠.”
수빈의 말을 곱씹어 본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정했다. 막상 유고를 완성하고 나니 발표하기가 꺼려졌는데, 그녀가 깨우침을 준 것이다.
루카치의 유고를 끝까지 살펴보던 수빈이 뭔가 이상한 부분을 캐치했다.
“잠깐. 뭔가 이상하네.”
“뭐가?”
“아까 얘기한 그 질문은 유고를 이어 쓴다는 이야기 아니었어요?”
“맞아. 들고 있는 그거, 거의 내가 이어서 쓴 거야. 발견 당시에는 몇 페이지 정도만 채워져 있었거든. 볼래?”
민우는 핸드폰에 저장해 둔 증거 사진을 수빈에게 보여주었다. 수빈은 신기한 눈으로 사진과 유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러다가는 끝도 없이 유고에 매달려 있을 것 같아 민우가 그것을 슬쩍 빼앗았다.
“이제 됐으니 밥 먹으러 가자.”
“이대로 아무것도 얘기 안 해주고 밥을 먹겠다고요? 세상에.”
“알았어. 일단 가자. 먹으면서 얘기 해.”
민우는 수빈과 아침을 먹으며 유고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 주었다. 덕분에 아침을 먹는 데에만 두 시간이나 걸렸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청문대 기자회견장에 수많은 기자들이 운집했다.
국내 언론은 물론 유명 외신까지 모조리 집결했다. 그들은 노트북과 녹음기, 그리고 카메라를 점검하며 주인공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기자회견을 연 것은 바로 민우였다.
그래서 민우의 커넥션이라고 통하는 박윤지 기자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수많은 국내 기자들이 몰려와 박윤지 기자에게 소스를 청했다.
“박 기자. 진짜 아무것도 들은 거 없어? 혼자 또 특종 물려는 거 아니고? 이러면 곤란하지. 동업자 정신이란 말 모르나?”
“정말이라니까요? 저도 소식 듣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봤는데 아무 것도 안 가르쳐 주셨어요.”
“허, 그것 참. 이해를 할 수 없구만. 해외 유명 언론사 기자들이 이렇게나 많이 몰려있는데 아무 소스도 없다고?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그렇게나 못마땅하시면 박 교수님께 직접 항의하세요.”
“아침부터 까칠하긴.”
그때 입구 쪽에서 소란이 들렸다.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단정히 양복을 걸친 민우가 들어와 회견장에 착석했다.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박 교수님! 오늘 회견의 이유는 뭡니까?”
“얼마 전 게이츠 회장이 박 교수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는데요.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가 있습니까?”
“박 교수님! 이쪽을 봐 주세요!”
두서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이미 여러 번 겪는 일이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민우는 여유롭게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자, 일단 다들 진정하시고요. 시간 관계상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회견을 연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민우는 완성된 루카치의 유고를 손에 들었다. 원본은 아니었다. 복사본이었다. 또다시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설명이 좀 필요할 거 같네요. 이건 죄르지 루카치라는 학자의 미공개 유고입니다. 우연한 계기로 이 유고를 입수한 저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오랜 시간을 들여 이 유고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에 이 책을 공개할까 합니다.”
“박 교수님!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얼마든지요.”
민우는 미리 준비한 자료를 기자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유고의 제목과 간략한 내용, 사용된 언어, 그리고 획득 경위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세계적인 석학의 미공개 유고는 그 자체로 특종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렇게 <존재와 영혼의 형식>이라는 제목의 유고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출간은 어떤 형태로 진행됩니까? 주 저자는요?”
“자세한 건 출판사와 협의해 봐야 하겠지만, 주 저자는 루카치의 이름으로 나갈 겁니다. 저는 편자나 역자로 들어가겠죠.”
“이어서 쓰셨다면 공저로 나가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민우도 한때 고민하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논의가 좀 필요합니다. 반 이상을 제가 쓴 건 맞지만 편저자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기여한 바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겸손은 아니었다.
실제로 유고의 내용은 민우의 지식으로 써진 게 아니다. 학문과 관련한 깨달음을 얻고, 유품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공저로 이름을 올리는 것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출판사에서 출간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까?”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향후 루카치의 미공개 유고와 관련한 다른 계획이 있는지요?”
마침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었다. 민우는 리모콘을 눌러 빔프로젝터를 작동시켰다. 슬라이드 한 장이 기자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오오······.”
“특종이다!”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고조되었다.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슬라이드를 설명했다.
“세계 석학들을 초청해 루카치의 <존재와 영혼의 형식>이 어떤 책인지, 어떤 내용인지를 상세히 밝힐 내용입니다. 특별 강연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장소는 이곳 청문대 특별강의실입니다. 여기에 날짜와 시간을 적어 두었으니 부디 널리 알려 주세요.”
기자들이 하나둘 이 소식을 기사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외신 기자들은 호외로 민우의 이야기를 전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기삿거리에 불과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학자들에겐 가히 충격적인 일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