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 < 최종장. 진리는 나의 빛 (2) >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 준 덕일까. 수빈은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았다. 초산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산모도 아이도 모두 건강했다.
출산 직전부터 지금까지 민우는 수빈의 곁에서 단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서지훈 교수의 말이 맞았다. 수빈은 많이 불안해했고, 민우가 와준 덕분에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해산한 수빈은 병실로 돌아와 곤히 잠들었다. 정신이 없었던 것은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긴장이 풀리니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심사는 어떻게 됐을까? 역시 민 선생님이 심사위원장을 맡으셨으니까 탈락이겠지?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는 분이니.’
비록 서지훈 교수가 뒷일을 맡기라고 하긴 했어도 심사 도중 이탈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어느 정도 정상참작은 되겠지만 말이다.
‘됐어. 그만 생각하자. 까짓것 틀어지면 다음 학기에 다시 심사 받으면 되지. 논문이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민우는 심사를 포기하고 여기에 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가라고 말해 준 서지훈 교수가 고마웠다.
팔을 뻗어 수빈의 손을 잡았다. 곤히 잠들어 있던 그녀의 눈이 살짝 떠졌다.
“좀 더 자.”
“아니. 일어날래.”
민우는 수빈이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레버를 돌려 침상을 높였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우리 윤아는?”
“걱정 마. 아주 건강하대. 고마워. 예쁜 딸 낳아줘서.”
“다행이다.”
수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미소다. 왠지 어머니의 애정이 묻어있는 것 같은 깊이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논문 심사가 떠올랐다. 민우는 전화를 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수빈의 시선이 민우 쪽을 향했다.
“근데 오빠.”
“응?”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따라주려던 민우가 몸을 돌렸다. 수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논문심사는 어떻게 됐어요? 심사 도중에 전화 받은 거 아니었어요?”
“아, 그거? 발표 먼저 하고 좀 쉰 다음 질문 받는 순서로 진행됐는데 발표만 하고 바로 나왔어. 마침 쉬는 시간에 너한테 전화가 왔거든. 그래서 선생님들 코멘트는 못 들었지.”
“뭐라고요?”
민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수빈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심사 도중에 나왔다는 것은 심사를 포기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가 박사논문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수빈이었다. 밤늦게까지 서재에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매번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다음 학기에 기회가 또 있다고는 해도, 그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끝나고 오라니까 왜······ 우리 학교 엄한 거 잘 알잖아요. 게다가 박사논문 심사니 외부에서 다른 선생님들도 오셨을 텐데.”
“간단한 논리야. 박사논문보다 너랑 윤아가 더 중요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민우는 수빈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심사야 틀어지면 다시 받으면 그만이지만 윤아가 세상에 나오는 건 단 한 번뿐이잖아. 내가 그 옆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켜?”
“그래도······.”
“이봐요 이수빈 씨.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넌 어땠을 거 같아? 어 그래, 하면서 심사 받고 왔을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수빈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제대로 심사도 못 받고.”
“뭐가 미안해. 오히려 아주 큰 선물을 받았는데. 박사논문 통과된 것보다 백만 배는 더 기뻐. 정말. 진짜로.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어.”
민우는 수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차가운 손이 온기를 되찾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 수빈은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서지훈 선생님께 연락 온 거 없었어요?”
“아직은. 아마 외부에서 오신 선생님들하고 식사하고 계실거야. 두 분 다 명인대 출신이신데 오랜만에 오신 거라고 들었거든.”
“먼저 연락드리는 건 어때요? 걱정하고 계실 거 같은데.”
“그럴까?”
수빈이 고개를 끄덕일 바로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민우는 잠시 오른손을 떼고 핸드폰을 꺼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서지훈 교수의 전화였다. 민우는 잠시 병실을 나가 전화를 받았다.
“예, 선생님. 안 그래도 지금 막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는데요.”
― 어떻게 됐냐?
“선생님 덕분에 무사히 출산했어요. 수빈이 닮은 예쁜 딸입니다. 감사합니다.”
― 다행이네. 이 선생은?
“지금 병실에서 쉬고 있어요. 많이 힘들었는지 아직 기운을 못 차렸어요.”
― 면회는 좀 무리일 거 같고. 시간 괜찮으면 잠깐 로비로 내려와라. 지금 병원에 와 있다.
“예?”
민우는 살짝 놀랐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바로 내려가겠다고 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로비로 내려가니 서지훈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민우는 그쪽으로 뛰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깜짝 놀랐습니다.”
“어쩐 일이긴. 뒷일을 맡겠다고 했으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자, 받아라.”
민우는 그가 건네는 서류봉투를 받았다. 명인대학교 로고가 박힌 봉투였다. 그 안에는 A4용지 몇 장이 들어있었다.
“이게 뭡니까?”
“직접 꺼내서 확인해 봐.”
민우는 종이를 꺼냈다.
행간을 따라 움직이던 눈이 흠칫 커졌다. 그것은 심사위원들의 코멘트를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것도 서지훈 교수의 친필로 적힌.
“선생님. 이거······.”
“다들 남아서 세 시간이나 스터디를 했어. 그 까다로운 양반들이 말이다. 특히나 민 선생님의 한마디가 걸작이었지. 오랜만에 흥미로운 논문이 나왔다나 뭐라나?”
“진짜요?”
“그럼 내가 여기까지 와서 실없는 농담이나 하고 있겠냐.”
민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일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학원에서 말하는 스터디는 일반적인 의미와 조금 다르다. 텍스트를 나눠 읽고 여러 방면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해 본다는 뜻도 있었기에 사실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민영환 교수의 입에서 나왔다면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한 가지 가능성이 생겼으니까.
“그럼 2차 심사······ 계획대로 진행되는 겁니까?”
“심사결과표 방금 올리고 오는 길이야. 후배들 앞에서 쪽팔림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준 자료 꼼꼼히 체크해 두도록. 날짜는 한 달 뒤다.”
씨익 웃은 서지훈 교수는 몸을 돌려 병원을 나섰다. 민우는 그의 모습이 시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로비에서 떠나지 못했다.
한때나마 그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여전히 그는 위대한 스승이었다.
* * *
민우는 서지훈 교수가 건넨 가이드대로 논문 수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맞게 무조건 뜯어고치진 않았다. 아니다 싶은 견해는 과감히 쳐내고 자신의 논지를 펼쳤다.
그렇게 수정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서지훈 교수가 말한 한 달이 훌쩍 지났다.
2차 논문심사는 예상대로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두 시간에 걸친 토론에 민우도, 심사위원도, 지켜보는 대학원생들도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민우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지적을 받을 때는 신중히 들었고, 반론을 할 때는 과감히 발언했다. 학계의 중진들도 민우의 논리에서 흠결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 해 왔던 프로젝트에 비하면 박사논문은 일도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이해한 것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자자, 이쯤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나온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도 한 세트가 나오겠군요.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요.”
민영환 교수는 심사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가 나선 덕분에 뜨거웠던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하지만 민우는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
“이제 슬슬 결론을 지읍시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하시지요.”
민영환 교수의 권유에 설예라 교수가 제일 먼저 나섰다.
“돌아가신 송현우 선생님의 문학관을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낸 독창적인 논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는 논문이었어요.”
선후배 대학원생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보기 드문 극찬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딱히 반론을 꺼내지 않았다. 외부 인사인 한철중 교수는 오히려 한마디 거들었다.
“이 정도 퀄리티라면 명인대 우수 논문상 후보에 올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잘 다듬어서 단행본으로 낸다면 좋은 교재가 나오겠는데요. 허허허.”
“글쎄요. 급진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게 좀 걸리는군요. 사상의 흐름을 도식적으로 전개한 부분도 약점이 될 수 있지요. 박 선생, 기한 내에 그 부분을 보완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서지훈 교수가 중립을 지키며 물었다. 애초에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대학원생의 신조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보시다시피 선생님들께서 지적해 주신 부분은 모두 메모했습니다. 다음 수정본을 보시면 보다 만족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말을 줄인 민영환 교수가 다른 심사위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곧 민영환 교수가 채점표에 점수를 기입했다.
“그럼 슬슬 정리를 하지요.”
민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재판으로 치면 선고와 다름이 없는 순간. 모든 이목이 민영환 교수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문제점이 다수 보이는 논문이지만, 그것은 지엽적인 부분이라고 판단되므로 수정을 거쳐 재심사를 하겠습니다. 다만 논문의 완성도로 미루어 볼 때 차후의 심사는 심사위원 재량에 따라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걸로 하지요. 이상.”
순간 민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3차 심사를 개별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더 이상의 공식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암묵적 선언이었다.
사회를 보던 강예진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이것으로 2차 논문 심사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선생님들, 그리고 학우님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들이 자리를 비우자 후배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뛰어나왔다.
“축하해요 선배! 이제 도장만 받으심 되겠네요!”
“박사학위 나오면 바로 청문대에서 정교수로 승진하시는 거죠? 대애박!”
“오늘은 가볍게 5차까지 가시죠!”
축제 분위기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윤아를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뒤풀이를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오는 통에 정신이 산만해졌다. 그래도 민우는 뒤쪽에서 엄지를 치켜든 한진섭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민우도 엄지를 들어 그의 우정에 화답했다.
* * *
뒤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네 시였다.
다행히 후배들이 술을 많이 권하지 않았다. 윤아 덕분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시기였으니까.
수빈과 윤아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딸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은 민우는 서재로 돌아왔다.
‘빨리 정리하고 쉬어야겠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영 피곤하네.’
학위논문이든 소논문이든 평가를 받으면 바로 그날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민우는 교수들의 코멘트를 정리한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타이핑을 하려던 바로 그때.
‘잠깐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민우는 손을 멈췄다. 그는 다시 노트북을 닫아 한쪽으로 치우고 서랍을 열었다. 목재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루카치의 유고가 들어 있는 상자였다.
‘분명 석사논문 통과 확정된 그때도 유고를 이어 쓸 수 있었어. 그것도 나름 깨달음의 과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도 뭔가 보이지 않을까?’
막연한 추측이었지만 민우는 바로 행동에 옮겼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
딸칵―
조심스레 상자에서 유고를 꺼냈다. 그리고 가방에서 안경과 만년필을 꺼내 착용했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마지막 쓴 부분으로 넘겼다.
‘보인다!’
눈이 커지며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민우는 바로 만년필을 움직이지 않았다. 남은 쪽수 때문이었다. 완결까지 두 페이지 반. 신중히 한 페이지씩 넘겨보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한 민우가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환호성을 질러 수빈과 윤아를 깨울 뻔했다.
‘됐어! 됐다고!’
민우는 속으로 기쁨을 토했다.
유고의 빈 페이지에 떠오른 환영 같은 글자는 끝 페이지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제 만년필로 적기만 하면 유고는 완성될 것이다.
다시 자리에 앉아 지체 없이 만년필을 움직이기 시작한 민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씩 느려지던 만년필이 움직임을 멈췄다. 곧 민우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길고 길었던 유고가 하나의 책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어?’
번쩍!
바로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