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93화 (293/500)

293화 : < 최종장. 진리는 나의 빛 (1) >

계절이 바뀌고 가을이 찾아왔다.

늦여름 같은 느낌의 가을이라 그런지 날씨가 꽤 더웠다. 매미의 울음소리도 여전했다. 모두가 시끄럽다고 생각했지만, 명인대를 찾은 민우에겐 그 소리 하나하나가 반가웠다.

캠퍼스를 걷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목적지는 인문관에 위치한 박사연구실이었다.

최근의 관심사는 역시 박사논문 집필이었다. 굵직한 프로젝트가 모두 끝났고, 이제는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을 때였다.

‘이제 논문도 마무리 단계야. 본론도 거의 다 썼으니 다음 주 1차 심사일까지 어떻게든 마무리할 수 있겠어. 다행이네. 까딱하면 한 학기 미룰 뻔했는데.’

이제야 좀 마음이 놓였다.

그간 박사논문을 쓰면서 짬짬이 강연을 다녔다. 자서전이 유럽 시장에서도 성공함에 따라 여러 국가를 오가며 강연을 했다.

영국의 옥스퍼드대를 시작으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 그리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대학을 거쳐 핀란드의 헬싱키 대학, 덴마크의 코펜하겐 대학에서도 강연을 펼쳤다. 프랑스의 소르본에서는 워낙 이름이 많이 알려져 거의 내빈급 대우를 받기도 했다.

파리 1, 3, 4대학을 순회하며 명강의를 펼쳤다. 그 밖의 여러 대학에서도 민우를 초청했고, 스케줄이 허락하는 한 민우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활동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부다비문화재단에서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세 번째 학교가 설립되었고, 온라인 교육 시스템 개발도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라 전 세계의 언론이 또다시 재단을 주목하고 있었다.

저 멀리 인문관 건물이 보이자 옥상에 드리운 플래카드가 펼쳐 있었다. 민우의 국민훈장 수훈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워낙 자주 보는 것들이라 감회가 새롭거나 하지 않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민우는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그렇지 뭐.”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명인대 인문대에서 민우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웬만한 교수들보다도 인사를 많이 받았다. 3층에 위치한 연구실까지 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박사 후배들이 자리에 앉아 과제와 논문에 몰두하고 있었다.

“형!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

민우와 나이가 비슷한 김성욱이 벌떡 일어나 맞았다. 그것은 다른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나는 여기에 오면 안 되냐?”

“하하하. 그런 건 아니지만 워낙 오랜만에 오시는 거 같아서요. 미리 연락 좀 주시지. 형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 섰다고요.”

“그럼 조용히 공부를 못 하잖아. 아무튼 학교에 얼굴 비춘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왔어. 계속 해외에 있다 보니. 넌 어때? 별일 없었지?”

“과제 폭탄 맞은 거 빼고는 별일 없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제와 논문 폭탄은 대학원생에게 일상과 같은 일이었다.

“이번에 누구 수업 듣는데?”

“민영환 선생님, 서지훈 선생님, 그리고 설예라 선생님 거요.”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네.”

세 교수는 학계의 명사들이었다. 거기에 깐깐하기로 소문이 났으니 수업을 듣는 입장에서는 죽을 맛일 것이다. 민우도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

김성욱이 물었다.

“선배 박사논문 심사위원도 그분들이시죠?”

“거기에 외부 심사위원 두 분 더 계셔. 박사논문 심사는 외부위원까지 모두 다섯 명이니까. 한철중 선생님하고 장대호 선생님도 오신다.”

“대박. 완전 스타 군단인데요? 형 괜찮겠어요?”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데 예진 누나는?”

“아직 안 나오신 거 같아요. 매일 나오시니까 이따 오후 늦게라도 오실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책상에 앉았다. 자신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겼기에 진섭의 자리를 써야 했다.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논문 파일을 열었다.

명인대 대학원 조판으로 280페이지에 달하는 박사논문이 위용을 드러냈다. 페이지를 채우느라 고생했던 나날을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번 박사논문은 라온북스에서 출판을 하는 게 좋겠지? 그간 원고를 너무 안 줬으니까.’

그런 이유도 있지만 이유리 주임에게 신뢰가 갔다. 일전에 한성문고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녀는 대학 교재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좋은 시너지가 발휘될 것이다.

‘그런 건 논문에 도장 받고 난 이후에 고민해도 안 늦겠지. 이제 슬슬 시작하자.’

잡생각을 떨쳐낸 민우는 자료집을 꺼내 살피며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의외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민우는 깜짝 놀랐다. 그건 들어온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한진섭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헐? 박민우 네가 웬일로 여기에 있어?”

“오늘 교수회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주예린도 한마디 거들었다. 매번 청문대에서 보는 사이라 명인대에서의 만남은 왠지 느낌이 새로웠다.

민우가 대꾸했다.

“그거 한 주 미뤄졌어. 덕분에 시간 붕 떠서 논문 쓰러 왔지. 온 김에 선생님도 좀 뵙고 하려고.”

“그렇군.”

한편 민우는 주예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웬일로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이상했다. 평소에 지나칠 정도로 편하게 입고 다니는 그녀라 민우는 예린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뭐냐? 그 교수님 코스프레는.”

“코스프레라뇨? 말씀이 지나치시네.”

“하나도 안 어울려서 그래.”

“좀 더 솔직해 지시는 건 어때요? 잘 어울린다, 예쁘다고 하셔도 되는데.”

“너 평소에 정장 안 입잖아. 내 결혼식에도 집에서나 입는 티셔츠 하나 걸치고 온 녀석이 할 말은 아닌 거 같다만.”

“칫.”

글로는 몰라도 말로는 선배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입술을 툭 내민 주예린이 투덜거렸다.

“실은 여기 문창과 교수님들 만나고 왔거든요.”

“문창과 교수님들? 왜?”

정장을 입고 교수들을 만났다. 그 두 가지 조합은 큰 힌트가 되었다.

“너 설마······.”

주예린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가 빠른 민우는 인문관 밖 휴식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덩굴로 덮인 지붕이 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어 꽤 시원했다. 자판기 앞에 선 민우는 진섭과 예린의 몫까지 음료수를 뽑았다.

차가운 캔을 받아들고 나서야 주예린이 실토했다.

“문창과에서 오퍼 받았어요. 내년 1학기부터 강의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겸임교수로?”

“아뇨. 조교수로 시작해요.”

민우는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예린의 커리어 정도라면 국내 어느 대학에서도 교수로 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수락했어요. 명인대 교수 간판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서.”

“진심?”

“그럼요.”

“거짓말도 참 뻔뻔하게 하네. 증명하고 싶은 거지? 한수영 선생님께.”

한수영 교수는 학부 시절 주예린을 가르쳤던 소설가였다. 예린이 장르문학으로 전향한 이후 비난을 하며 그녀와 연을 끊은 사람이다.

민우의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한숨을 내쉰 주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순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하는 뻔한 싸움을 하려는 건 아녜요. 그냥 내가 가는 길이 옳았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소설가이기 전에 저도 사람이잖아요. 꿈이 있는 사람.”

“그래. 한 선생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겉으론 그래도 속이 꽉 막힌 양반은 아니니까.”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실은 얼마 전에 한 선생님 뵙고 왔거든. 상아대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네 안부 물으시더라. 만약 마음속으로까지 널 내친 사람이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

“서로 좀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주예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입을 앙다물었다. 민우가 계속 말했다.

“나중에 임용되고 나서 한번 인사드리러 가봐. 분명 좋아하실 거다.”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진 않았지만, 주예린은 한결 편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후의 일은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민우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임용 건은 좋은 소식이긴 한데, 진섭이 넌 좀 분발 해야겠다?”

“왜?”

“예비 신부가 정교수 됐잖아. 그것도 명인대 교수가.”

“흐음······ 역시 전업주부로 전향하는 게 좋으려나.”

“하하하하!”

세 사람이 실컷 웃었다. 덕분에 한없이 진지해졌던 분위기가 싹 풀렸다. 주예린은 늘 그랬듯,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었다.

* * *

한 주가 지나고 1차 논문 심사일이 다가왔다.

하지만 민우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수빈이 옆에서 물었다.

“긴장되지 않아요? 심사위원들이 어마어마하던데.”

“긴장할 게 뭐 있어? 오히려 많이 지적받는 게 좋아. 논문의 완성도를 올릴 수 있으니까.”

“천상 학자네요. 오빠는.”

피식 웃은 민우는 현관으로 나가 구두를 신었다. 그때 뭔가 떠올랐는지 수빈에게 물었다.

“배 아픈 건 괜찮아? 어제 좀 아프다고 했었잖아.”

“한숨 자니까 괜찮아요. 그냥 복통이었나봐. 걱정하지 마요. 아직 출산예정일 좀 남았잖아요.”

“그래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알았으니까 어서 출발해요. 늦겠다.”

집을 나선 민우는 바로 명인대로 향했다.

가는 와중에도 민우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인쇄한 논문을 빠르게 정독하며 어디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미리 예상해 보았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명인대에 도착한 민우는 바로 논문발표장으로 올라갔다.

조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심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인대 국문과의 1차 심사는 발표자와 심사위원만 참가한다.

“고생들 많네.”

“아, 선배. 오셨어요?”

“다른 선생님들은?”

“지금 서지훈 선생님 연구실에서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발표자석에 앉았다. 그리고 남은 논문을 마저 읽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교수들이 다 함께 들어왔다. 학계 중진 인사 다섯 명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보기 힘든 일이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심사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들은 인자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지만 민우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 다섯 명 모두 공과 사가 철저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심사위원장석은 민영환 교수가 차지했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준비는 어때. 잘됐나?”

“부족하지만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열심히 했는지는 보면 알겠지. 그럼 시작해 볼까. 먼저 발표부터 하고 잠깐 쉰 다음 2부에서 질문을 하는 걸로 하고. 다른 선생님들도 괜찮으시지요?”

“좋습니다.”

모두가 동의했고, 민영환 교수가 시작하라 말했다.

민우는 논문의 첫 페이지를 펼치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단행본 한 권에 달하는 논문을 다 읽는 건 불가능했기에, 중요한 부분만 짚으며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결론까지 모두 읽은 민우가 말했다.

“제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그럼 10분 정도 쉬었다 다시 모이시지요.”

“그럽시다.”

교수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레 민우가 발표했던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숨을 돌린 민우도 밖으로 나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그렇게 잠시 여유를 누리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수빈이 건 전화였다.

‘어?’

민우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 논문 심사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왜 전화를 한 걸까.

“여보세요?”

― 오빠······.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뭔가를 꾹 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플 때의 그 느낌이 전해졌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양수가 터진 거 같아. 피도 좀 나오고.

“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경험도 없는데다가, 지금은 논문 심사 중이다. 쉽게 어떻게 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수빈이 말했다.

― 지금 병원 가고 있어요. 이따 끝나고······ 바로 와줄 수 있어요?

“응. 알았어. 바로 갈게.”

― 미안해요. 전화 안 하려고 했는데, 너무 불안해서. 미안해요. 미안.

“아냐. 괜찮아. 때 맞춰 잘했어. 끝나고 바로 갈 테니까 조금만 참고 있어. 알았지?”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핸드폰을 손에 놓지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뜻밖의 변수였다. 그간 준비해왔던 논문의 내용이 싹 사라져버렸다.

때마침 복도를 지나던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이제 곧 털릴 생각 하니 심장이 쫄깃하냐?”

“아, 그런 게 아니고······.”

“뭔 일 있구나?”

한숨을 내쉰 민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긴 서지훈 교수가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뭐 하고 있어? 어서 가 보지 않고.”

“하지만······.”

“이 선생이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굉장히 불안한 상태일 거야. 초산이니까. 네가 옆에서 힘이 되어 줘야지.”

“선생님.”

“네 미래를 한낱 박사학위 따위와 바꿀 셈이냐? 가 봐. 뒷일은 나한테 맡기고.”

결심을 세운 민우는 꾸벅 인사하곤 바로 뛰어 나갔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심사위원들이 다시 발표장에 모였다. 그런데 민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들 의아해하며 물었다.

“박 선생은 아직 안 온 겁니까?”

“그게 좀 사정이 생겼습니다.”

서지훈 교수가 대신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교수들은 납득을 한 눈치였다. 민우가 평소에 성실하지 않았다면 다른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흐음, 그럼 심사를 좀 미뤄야겠군요.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잠깐만.”

민영환 교수가 나서자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교수들이 멈칫했다. 그가 인쇄된 논문을 흔들며 말했다.

“오랜만에 흥미로운 논문이 나왔는데······ 같이 스터디나 좀 하실까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왠지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아아, 그거 좋지요.”

“그럴까요. 확실히 재미있는 논문이긴 합니다.”

이례적인 호평에 서지훈 교수가 설예라 교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제자인 수빈이 무사히 출산하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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