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 < 102장. 같은 꿈을 꾼다는 것 (4) >
“하. 이것 봐라.”
윤치호 비서실장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허탈히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청와대로 초청한 사람들 중 일정 탓으로 거절을 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생긴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몇 해 전 대통령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한 사건이 있긴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실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좀 어이가 없어서.”
그의 직속부하 한명주는 계속 윤치호를 바라보며 궁금증을 표했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진 못했다.
어이가 없다고 대꾸하긴 했어도 윤치호는 입맛이 썼다. 문제가 맞다. 강의 때문에 시간을 못 낸다는 것을 어떻게 대통령에게 보고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윤치호는 다시 핸드폰을 쥐었다. 대통령의 스케줄을 조정할 수는 없지만, 잘 설득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명주가 믹스 커피로 채운 종이컵 두 개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고민하시는 모습은 또 처음인데요. 누가 사고라도 쳤댑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좀 드시죠. 당 떨어질 시간입니다.”
윤치호는 웃으며 한명주가 건네는 컵을 받았다. 머리가 지끈거릴 땐 믹스 커피가 최고였다.
“땡큐.”
“그거 그냥 드리는 거 아닙니다. 정보 값이지요.”
“이놈 봐라?”
“에이. 선후배 좋다는 게 뭡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윤치호 실장은 커피를 후루룩 넘겼다. 마침 주변엔 한명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너 박민우 교수 알지?”
“당연히 알죠. 요즘 그 양반 모르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얼마 전에 대통령께서 청와대로 초청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셨잖아요. 근데 뭐 엮인 거라도 있대요? 요즘 여당에서 영입한다 어쩐다 말이 많던데.”
“그 초청 건 말이야. 방금 전화했는데 못 가겠다고 하더라.”
“예? 뭣 때문에?”
“학부 강의가 있다나 뭐라나.”
“하하하! 굴러온 복을 걷어 차 버리다니. 출세욕이 없는 사람인가보네요. 하긴, 저도 얼마 전에 그분 자서전 읽었는데 그럴 만하더라고요.”
“그래?”
한명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종이컵을 구긴 뒤 재활용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실장님께서 활자랑 안 친한 거 잘 알지만 시간 내서 한번 읽어 보세요. 내용은 쉬운데 많은 걸 생각나게 하더라고요. 대통령께서도 읽으신 건지 얼마 전에 비슷한 말씀도 하셨고. 자, 그럼 고생하십쇼. 저는 회의가 있어서 이만.”
한명주가 복도 끝 쪽으로 사라져갔다.
한숨을 내쉰 윤치호 실장은 잠시 고민하다 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민우에게 전화를 거는 것보다는, 그냥 현재의 상황을 보고하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때마침 장형욱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황금빛 봉황과 무궁화로 수놓인 벽을 등지고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남성적인 턱선을 가진 호남형의 중년이었다.
“무슨 일인가?”
“보고드릴 게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꾸벅 인사한 윤치호 실장이 조심스레 대통령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장형욱 대통령은 예리한 눈으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좋은 소식은 아닌 모양이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걸 보니.”
“송구합니다.”
“뭐, 됐네. 정무라는 게 그런 게 아닌가.”
장형욱 대통령은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윤치호 실장은 그 웃음이 그냥 웃음이 아닌 걸 안다. 장형욱 대통령의 성정은 보통 사람과는 많이 다르다. 냉정하면서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이 보고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심 걱정이 들었지만, 윤치호 실장이 조심스레 보고를 시작했다.
“다른 건 아니고, 전에 지시하신 일 때문에 박민우 교수와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박 교수가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초대를 거절했다. 왜?”
“그게······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오전에 학부 강의가 잡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오지 못한다는군요.”
“뭐? 강의 때문에?”
잠시 멍해 있던 장형욱 대통령이 피식 웃더니, 이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거 참 걸작이구만. 대한민국 대통령인 나보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중요하다?”
“죄송합니다. 다시 전화해서······.”
“아니. 됐네. 그냥 두게. 바쁘다는데 부르면 뭐하나. 초대는 없던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용무는 모두 끝났다. 그런데 윤치호 실장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장형욱 대통령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왜 그러고 서있나?”
“청문대 총장이라도 불러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박 교수의 행태에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문제라면?”
“국가의 중요한 정무와 대학에서의 강의가 동치의 관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선순위가 명백한데, 박 교수가 그걸 모르는 거 같습니다.”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게야?”
깜짝 놀란 윤치호 실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주의 정도는 줘야 하는 게 아닐지······.”
“하하하하!”
장형욱 대통령이 큰 소리로 웃었다.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권력의 상징인 황금빛 봉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네는 뭔가 착각하고 있구만. 그래서 어디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예?”
“정무가 중요한 건 맞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국민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주권은 대통령인 내게 있는 게 아니라 국민들에게 있으니까. 박민우 교수는 교수라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거고.”
장형욱 대통령이 몸을 슬쩍 돌렸다. 그는 인자한 미소로 윤치호 실장을 바라보았다.
“윤 실장.”
“예.”
“자네도 앞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겠지. 그렇다면 오해 말고 들어주게. 대통령으로서의 나의 임무는 최고 권력자의 위엄을 보여주는 게 아니야. 나는 다만 대표자에 불과하네. 국민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나는 그게 국가의 경쟁력이자 민생의 근본이라고 생각해.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제야 윤치호 실장은 그가 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지를 떠올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아주니 고맙군. 아무튼 박 교수가 시간이 안 된다니 아쉽긴 하지만 그 일은 문제없이 빠르게 처리해 주게.”
“알겠습니다.”
허리를 굽힌 윤치호 실장이 집무실을 나섰다.
뒷짐을 지고 잠시 집무실을 거닐던 장형욱 대통령이 테이블에 놓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민우의 자서전이었다. 이번 초청이 무산돼 아쉽게도 사인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 *
<인문과학총서>의 출간은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학계는 물론 각종 대학과 단체에서 추천도서로 올렸고, 여러 연구에 활발히 인용되기 시작했다.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지만 검수와 번역을 맡은 민우의 일도 그만큼 늘어나게 됐다. 대한민국에서 그 책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또야?’
지금 막 거절의 메일을 보냈는데 모르는 번호로 진동이 울렸다. 받아보니 역시나 강연 요청이었다. 민우는 정중한 어조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당분간은 <인문과학총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단체의 강연만 수락하기로 했다. 몸은 하나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민우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대안을 모색했다. 반복되는 거절은 오해를 낳을 여지가 많다.
‘거절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다 미움 사겠는데? 아무래도 강연영상을 만들어야겠어. 송 실장님께 연락을 드려봐야겠다.’
강연 영상을 만들어 공유한다면 직접 강연을 나설 일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보편적인 전달력이 있을 테니까.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에는 직접 강연을 나가면 되는 거고.
“바쁘세요?”
이다혜가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민우가 그녀를 바라보며 괜찮다고 답했다.
“북경대에서 또 귀찮게 하네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메일질이네. 스케줄 확정됐냐고 묻는데 어떻게 할까요?”
“우리 이 조교가 귀찮다는데 내가 뭐 어쩔 수 있나. 예정대로 이번 달 말에 강연하겠다고 전해 줘.”
“괜찮으시겠어요?”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과의 학술교류는 빈도가 점점 늘고 있지만, 아직 중국 쪽과는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한중일 3국의 학술교류체계를 확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름 총회 예산은 어떻게 됐어요?”
“이번에도 아부다비문화재단에서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행이네요. 은근 우리 가난하잖아요.”
“중요한 건 예산이 아니라 내용이야. 사업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가 될 테니까 데이터 수집에 허술함이 없어야 해. 회원들 질의사항 잘 챙기고.”
그렇게 폴라리스 업무를 마친 민우는 한국어문학 파트 연구실로 향했다.
때마침 307호 멤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배가 살짝 부른 수빈도 얼마 전부터 정식 출근하여 한국문화교육원 개강을 위해 한몫 거들고 있었다.
민우가 나타나자 진섭이 깜짝 놀랐다는 듯 오버액션을 취했다.
“헐. 귀한 분께서 웬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행차를?”
“비아냥거리지 말라니까.”
“대통령보다 위에 계신 분께 어찌 감히 그런 무례를 저지르겠습니까? 주 선생 뭐하고 있어? 마실 거 준비하지 않고!”
“이 자식이.”
진섭은 아주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지켜보던 수빈과 예린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렇게 된 건 얼마 전 민우가 대통령의 초청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부터였다.
사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진섭만이 아니었다.
민우의 직장인 청문대도 발칵 뒤집혔다. 특히 박자희 총장과 류재혁 학과장은 민우를 따로 불러 엄중히 충고를 하기도 했다. 사립대학과 정치는 아무래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 소문이 대학 커뮤니티에 알려지면서 민우를 찬양하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났던 것이다.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진짜 교수라면서.
그렇게 민우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각종 미담(美談)을 올리기 시작했고, 한때 커뮤니티는 민우의 팬 카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와 관련된 글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그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민우는 또다시 전국민의 이목을 끌었다. 물론 민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박사논문에 집중을 해야 할 시기에 가십거리가 되었으니까.
민우가 물었다.
“개강 준비는 어때?”
“현재까지는 아무런 문제없다. 그래도 뚜껑은 열어봐야 알지. 아무래도 첫 학기니까 부족한 점들이 많이 드러날 거야. 학부 강의랑 좀 다르니까.”
진섭은 이쪽으로 경력이 많았다. 이 부분만큼은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피드백을 확실히 해야겠네.”
“그건 뭐 나중 일이고. 암튼 행정상의 문제는 나한테 맡기고 넌 박사논문이나 써. 논문 심사 얼마 안 남았잖아? 지금이 5월이니 딱 5개월 남았네.”
“미안해서 어떻게 그러냐? 같은 팀인데.”
“허허, 이분이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네. 내가 너 배려해서 그러는 줄 알어?”
“그럼?”
“도움이 안 되니까. 이쪽은 경력자인 내게 맡기고 초보자는 갈 길 가시라고. 결재서류에 도장이나 재깍재깍 찍어 주고.”
말은 좀 투박하긴 해도 민우는 내심 고마웠다. 박사논문을 빨리 쓰고 정교수로 승진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진섭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민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또 모르는 번호였다. 민우는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아 전화를 받았다.
“네, 박민우입니다. 네. 맞는데요. ······예? 뭐라고요?”
민우가 깜짝 놀라며 말문을 닫았다. 평소에 보기 힘든 반응이라 세 친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민우 쪽을 바라보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한참 동안 설명을 듣고 난 후 민우는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진섭과 예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지만 수빈은 달랐다. 민우가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전화예요?”
“그게······ 좀 뜬금없는 소식이긴 한데.”
수빈이 눈빛으로 채근했다. 진섭도, 예린도 다시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결국 민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훈장 받게 됐다는데? 국민훈장 모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