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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90화 (290/500)

290화 : < 102장. 같은 꿈을 꾼다는 것 (3) >

결혼식은 평범했다. 규모가 큰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 예식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민우에게는 특별한 순간들이었다.

라이벌이자 문우인 서강일이 사회자로 나섰고, 주예린은 피아노에 앉아 선배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선율에 담았다.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허윤과 임찬혁도 주례가 끝난 이후 멋진 축가를 선물했다. 무대에 나서지 않았지만 진섭도 환호성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준비된 모든 식순이 끝났다. 서강일이 차분히 마이크를 잡았다.

“이렇게 앞에서 신랑과 신부를 보고 있으니 명언 하나가 떠오르네요.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실험이라고. 학문적 동반자로 시작해 이제는 인생의 동반자가 된 두 사람이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여러분들께서 많이 축복해 주십시오. 자, 이제 미래를 향한 두 사람의 행진을 시작하겠습니다. 신랑 신부, 행진.”

민우와 수빈은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행진을 시작했다. 꽃잎이 흩날려 꽃길을 만들었다. 신록처럼 싱그럽고 아름답게 펼쳐진 무대는 마치 두 사람의 미래를 축복하는 듯했다.

‘이런 날이 또 올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각종 상을 휩쓸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을 때와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희열을 느꼈다.

또한 묵직한 책임감도 동시에 느꼈다. 이제는 자신 혼자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꽃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 수빈이 넌지시 물었다. 주변이 시끄러웠지만 민우는 그녀의 말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았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수빈의 얼굴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웃기까지 해요?”

“그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학을 전공했고, 또 세계의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이 벅찬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갈 뿐이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카메라 플래시도 정신없이 번쩍였다. 민우가 수빈에게 기습 키스를 한 것이다. 식순에는 없는 내용이라 살짝 놀랐지만, 수빈은 웃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어서 사진 촬영이 있겠습니다. 내빈 여러분들께서 많이 찾아와주신 관계로 장내가 복잡하니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민우의 화려한 인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진을 찍을 사람이 너무 많아 두 번에 걸쳐 찍어야 했다. 어쨌든 부케는 주예린이 받았다.

촬영이 끝나고 팀 307호 멤버들은 함께 모여 피로연장으로 이동했다.

“으아. 배고파 죽겠네. 빨리 좀 가자. 빨리빨리!”

진섭이 채근했다. 하지만 멤버들은 결혼식에 대한 소감을 나누느라 쉽게 호응하지 않았다. 오늘의 두 주인공에 대한 품평이 계속되었다.

“팀장도 없고 멤버가 늘어나니 통제가 안 되는구만. 쯧.”

“그니까 소리 좀 작작 질렀어야지. 반주하다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니깐.”

“할 줄 아는 게 소리 지르는 거랑 박수 치는 거밖에 없는데 어떡해? 자기처럼 피아노 잘 치는 것도 아니잖아.”

“와서 악보라도 넘기지 그랬어.”

“쳇.”

진섭은 투덜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새 멤버가 더 늘었다. 연주의 가입을 시작으로 지음사의 장철호 주임도 합류했고, 한일대의 서강일과 강민희도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최근 하지은도 참가해 예술분야로 폭을 넓혔다.

멤버 하나하나를 살펴보던 진섭이 돌연 웃었다.

“세월 참 빠르네.”

“갑자기?”

“우리 팀 만들 때가 생각나서 그래. 자기는 잘 모르겠지만 307호는 인문학 공모전에 참가하려고 급조했던 모임이었거든. 그런데 이렇게나 커졌네. 신기한 일이야.”

팀 307호는 친목 모임을 넘어 젊은 지성의 모임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문득 10년 뒤에 팀이 어떤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피로연장에 도착한 멤버들은 각자 취향에 맞는 음식을 잔뜩 떠 놓고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테이블이 원형으로 되어 있어 수다를 떨기 적당했다.

진섭과 강일은 대낮부터 소맥을 말았다. 한잔 시원하게 들이켠 강일이 말했다.

“수빈이 오늘 정말 장난 없던데? 나도 눈 높기로는 어디 가서 안 지는데 오늘은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훨씬 낫더라.”

“괜히 걔가 명인대 여신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란다. 민우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게 우리 대학원 내에서의 중론이었지.”

“나라 하나 정도로는 부족할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진섭이 너하고도 동기였지? 셋이 같이 석사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엉.”

진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음식을 흡입하다시피 넘겼고, 서강일은 영악스럽게 웃으며 은근히 물었다.

“넌 수빈이 처음 만났을 때 아무런 감정 없었어? 으레 이런 구도라면 삼각관계 같은 게 생기는 게 순리 아니냐.”

“뭐? 삼각관계?”

순간 테이블에 정적이 깔렸다. 강일은 조용히 물었는데 진섭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모두가 말을 멈추고 진섭의 입을 주목했다. 어떤 이야기인지 금방 눈치를 챈 분위기였다.

“어머, 삼각관계라면 수빈 언니랑 진섭 오빠 사이에도 뭐 있었던 거예요?”

연주가 쐐기를 박았다. 이쯤 되면 피할 수가 없다.

진섭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대충 넘길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어물쩍 넘어갔다간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확실히 이야기하는 게 나았다.

“이분들이 잔칫집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거 없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넘사벽이었거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지. 어쩌다 친해지긴 했지만.”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걔 학기 초부터 민우한테 꽂혀 있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서 꼼꼼히 챙기고, 도서관 열람실에 민우 있나 매번 기웃거리는데 거기에 껴서 내가 뭘 어떻게 하냐.”

“그건 좀 의외네. 지금이야 잘나가니 그렇다 쳐도 그때는 민우도 별거 없지 않았나?”

모두가 궁금해하던 질문이었다. 진섭은 피식 웃었다. 서강일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본인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민우 걔 도서관 열람실에서 하루 종일 책에 푹 빠져 있곤 했는데, 그 모습이 꽤 근사하긴 했어.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을 정도로. 눈빛도 그래. 크! 순수한 아이처럼 정말 초롱초롱했지. 결론적으로 수빈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거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또 뭐가?”

“다른 의미로 삼각관계가 아닌가 해서. 이수빈 선생 긴장 좀 해야겠는데?”

서강일의 말의 함의를 뒤늦게 깨달은 다른 멤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에 잘 웃지 않는 연주도 이번엔 쉽게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두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브로맨스가 요즘 핫하다던데.”

주예린이었다. 뭔가 위험한 쪽으로 새로운 소재가 떠오른 모양이다. 진섭은 괜히 얘기했다 싶어 맥주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휴, 한일대 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개념이 없어. 개념이.”

그렇게 투덜거리긴 했어도 진섭도 결국엔 웃었다. 풋풋했던 석사 시절의 추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 * *

3박 4일간의 짧은 신혼여행이 끝났다. 민우와 수빈은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힘들지?”

“괜찮아요. 호텔에서 쉬기만 했는데 뭘. 근데 너무 짧아서 아쉽지 않아요?”

“아쉬워?”

“난 괜찮은데 오빠가 서운할까 그러지. 해외 나간 것도 아니고 제주도였으니까.”

“어디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가는 게 중요한 법이잖아. 괜찮아. 난.”

“좀 감동이다.”

주말을 껴서 다녀온 여행이었다. 수빈이 임신 중이기도 했고, 학기 중이라 휴강을 하는 게 부담스러워 일정을 짧게 잡았다.

짐 정리는 금방 끝났다. 간단히 씻은 두 사람은 거실로 나와 간식을 먹었다. 확인해야 할 일이 좀 있었지만 민우는 오늘만큼은 쉬기로 했다.

수빈은 포크를 내려놓고 민우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아, 좋다.”

“뭐가?”

“그냥. 이것저것 다 좋아요.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싶네.”

“그래서 박사논문은 언제 쓰려고?”

“으이구. 정말 오빤 낭만이라는 게 뭔지 모른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수빈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 이 행복감이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최고였다.

“참, 내일 다들 온대요?”

“하나도 빠짐없이 온다네. 다들 벼르고 있어. 결혼식 때 손님 대접이 소홀했다나 뭐라나.”

“미리 좀 준비를 해놔야겠네. 이따 같이 장 보러 갈래요?”

“그럴까.”

내일은 307호 멤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단순한 집들이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모인 김에 팀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물론 민우의 머릿속엔 이미 밑그림이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다.

계획은 크게 두 가지였다. 아부다비문화재단을 통해 국제적인 공익활동을 한다면, 민우는 팀 307호 멤버들과 함께 국내에서 공익활동을 펼칠 계획이었다.

예전에 서지훈 교수의 주선으로 대전 동구청에서 했던 ‘인문학 강좌’와 얼마 전 이수빈을 통해 알게 된 ‘우리병원 선생님’ 프로그램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때 민우는 깨달았다. 이 좁은 땅덩이에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민우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을 그때 이수빈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오빠. 전화 오는 거 같은데?”

“어?”

확실히 진동음이 들리고 있었다.

민우는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을까 잠시 고민하다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네, 여보세요.”

― 박민우 교수님 핸드폰이 맞지요?

딱딱하고 사무적인 톤의 목소리였다. 중년 남성인 것 같은데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맞는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 안녕하십니까. 저는 청와대 비서실장 윤치호입니다. 전화이긴 합니다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소개에 민우는 움찔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순간 신종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통화 괜찮습니다.”

― 다행이군요. 다른 건 아니고 저희 VIP께서 박 교수님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VIP요?”

청와대의 VIP라면 딱 한 사람밖에 없다.

장형욱 대통령.

민우는 폴라리스 총회에서 김강현 장관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그가 했던 말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조금 당황스럽네요. 근데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쪽에서 학계 행사가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요.”

― 행사는 아니고 그냥 가볍게 담소를 나눈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박 교수님만 초대를 받으신 겁니다.

“그렇군요. 언제 가면 됩니까?”

― 이번 주 수요일 오전 10시입니다. 교수님 자택으로 차량을 보내겠습니다.

“아, 죄송한데 수요일 오전은 곤란합니다. 학부 강의가 있어서요.”

― 예?

뜻밖의 말이었던 걸까. 이번엔 윤치호 비서실장이 당황했다. 근엄했던 목소리가 살짝 흐트러질 정도로.

― 하하하하. 박 교수님. 젊은 분이라 그런지 유머 감각이 대단하시네요. 강의 정도는 그냥 쉬셔도 되잖습니까. 학부 강의가 뭐 대수라고. 이런 기회가 매번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죠. 특별한 이유도 없는 초청 때문에 쉰 명이 넘는 학생들의 권리를 뺏는 건 좀 아닌 거 같네요. 개인적인 일로 휴강을 좀 많이 했습니다. 더 쉬는 건 곤란합니다.”

― 저기, 박 교수님?

“VIP께 대신 안부 전해주세요. 다음에 기회 되면 찾아뵙겠다고. 여행 마치고 오늘 돌아와서 좀 정신이 없습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 수빈이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무슨 전화인데 강의 얘기가 나와요? VIP는 누구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네.”

“청화대학교요? 총장실 전화?”

“아니. 청와대. 대통령 있는 곳 말이야. 비서실장이 직접 전화했어. 대통령께서 한번 보자고 하신다네.”

수빈은 입을 벌린 채 두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통령이 보자고 하면 당장 달려가야지!”

“그날 전공 강의 있다니까.”

“······.”

“왜. 가서 잘 보인 다음에 장관 자리라도 하나 달랬으면 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하긴. 뭐. 그래야 오빠답죠.”

“별일 아니면 그냥 넘어갈 거고 중요한 일이면 다시 전화가 올 거야.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까.”

“세상에······ 이제 대통령을 상대로 밀당을 하는 거예요?”

“연애도 아니고 무슨 밀당이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일단 이 엄청난 소식을 단톡방에 알려야겠어요. 섭 오빠가 이 얘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까?”

수빈이 핸드폰을 쥐고 열심히 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옷장에서 겉옷을 꺼내 걸칠 뿐이다.

“또 어디 가려고요?”

“장 보러 같이 가자며?”

“아참, 그랬었지.”

수빈도 재빨리 겉옷을 입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이제야 좀 신혼부부다운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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