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89화 (289/500)

289화 : < 102장. 같은 꿈을 꾼다는 것 (2) >

“오빠. 일어나요. 이러다 지각하겠네. 오늘 수업 있는 날이잖아?”

수빈이 민우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잠시 후 그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화끈한 두통과 갈증이 몰려왔다. 벌써 아침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윽. 몇 시야?”

“일곱 시 좀 넘었어요.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어? 섭이 오빠랑 둘이 마신 거야?”

“······10분만 더.”

엉뚱한 대답을 한 민우가 다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머리맡에 앉아 곤히 자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수빈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요. 인심 썼다. 그럼 딱 10분만 더 자요.”

주방으로 나온 수빈은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민우가 해장국으로 좋아하는 콩나물김치찌개와 여러 밑반찬들을 꺼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레아에게 시간에 맞춰 집 앞으로 와줄 수 있냐고 메시지를 넣었다. 저 상태로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마침 레아도 준비하고 있었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안 그래도 보고할 게 있어 아침에 찾아가려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적당히 답장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수빈은 다시 침실로 향했다.

“이봐요 박 선생님. 10분 지났거든요? 어서 일어나요.”

“5분만 더······.”

“안 돼. 오늘 연구실에 중요한 일 있다면서요. 그러면 일찍 가야지. 빨리 아침 먹고 출근해요.”

“5분만······.”

“레아 씨 불렀으니까 곧 올 거예요. 늦지 않게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

레아의 이름은 이럴 때 필살기처럼 잘 먹혔다. 민우가 벌떡 일어났다.

“왜 불렀어? 그냥 지하철 타고 가면 되는데.”

“그러다 병나요. 출근길 지하철이 좀 힘들어? 안 그래도 오빠한테 보고할 거 있다고 하니 겸사겸사 차 타고 가요.”

“무슨 보고?”

“그건 나도 모르지롱~”

혀를 살짝 내민 수빈은 나몰라라 침실을 나섰다.

뭔가 당한 느낌이었다. 한숨을 내쉰 민우는 좀비처럼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한 번 하고 나니 이제야 사람 꼴을 갖추게 됐다.

머리를 말리던 민우는 문득 맛있는 냄새를 느끼곤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랐다. 먹고 싶던 게 식탁에 차려져 있었으니까.

“아침부터 뭘 이렇게 준비했어?”

“왠지 어제 느낌에 오빠가 술 마시고 들어올 거 같아서 미리 장 봐 뒀어요. 어제 늦게 들어온 건 좀 밉긴 하지만.”

“고마워.”

“말로만?”

싱겁게 웃은 민우는 짧게 키스한 뒤 수빈을 꼭 안아 주었다.

“그만 그만. 어서 앉아요. 속 쓰릴 텐데 천천히 먹고.”

“응.”

식탁에 앉은 민우는 국을 한 번 뜨는 것으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수빈도 맞은편에 앉아 민우와 함께 아침을 들었다.

수빈이 물었다.

“근데 어제 섭 오빠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술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큰일은 아니고······ 예린이네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간다더라. 그래서 좀 고민이 생긴 모양이더라고. 맨정신으로는 얘기하기 그런 거 같아서 한잔 했지. 딱 한 병씩만 마시려고 했는데 오랜만이다 보니 조절을 못했네.”

“뭔가 수상해. 혹시 나랑 결혼하는 거 후회돼서 애꿎은 섭이 오빠 잡은 건 아니죠?”

“하하하. 그럴 리가 있냐. 너야말로 애꿎은 사람 잡지 마.”

속에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두통도 갈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식사를 마친 민우는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일정은?”

“집에서 이것저것 준비하려고요. 내일이 결혼식인데 괜히 돌아다녀서 좋을 거 없잖아.”

“오케이. 나도 일찍 들어올게.”

“조심히 다녀와요.”

민우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레아는 늘 그 자리에서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은 대중교통과 자차를 이용하다보니 레아의 차를 타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미안해요. 아침부터.”

“아닙니다. 어서 타시죠.”

차에 오르니 레아가 미리 준비해 둔 서류철을 민우에게 건넸다. 보고할 게 있다고 했는데 아마 그것인 모양이었다.

“이게 뭐죠?”

“오늘 새벽에 센트럴북스에서 자료를 보내왔어요. 궁금해하실 거 같아서 바로 준비했습니다.”

“센트럴북스에서?”

민우는 재빨리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인문과학총서> 관련 자료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얼마 전 북미 시장에서 판매가 시작된 자신의 자서전에 대한 기록이었다.

판매량은 물론 및 주요 플랫폼 순위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특히 민우가 주목했던 것은 주요 외신 및 단체의 한 줄 논평이었다.

‘젊은 인문학도의 진솔한 고백!’ (The Wall Street Journal)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필독서’ (New York Times)

‘지극히도 평범한, 오히려 그렇기에 돋보이는 천재의 일대기!’ (The Washington Post)

모두가 호평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천재’라는 수식어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민우는 만족했다. 특히 판매량이 그랬다. 대략 20만부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는데, 최근의 트렌드를 반영하듯 종이책보다는 전자책 판매량이 훨씬 많았다.

민우가 파일을 덮으며 말했다.

“이 정도라면 성공이라고 봐도 되겠네요. 북미 최대 온라인 서점에서도 하루만에 30위 안에 들었으니까. 곧 10위 안으로 들어가겠어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저는 매니저님께서 해내실 줄 알고 있었어요.”

“안목이 있으시네요.”

민우는 평소처럼 겸손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서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두 사람은 청문대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곧 차가 주차장에 들어섰다. 민우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용건이 남았는지 문을 연 채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레아 씨도 연구실에 같이 가시죠.”

“저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다른 건 아니고, 오늘 프로젝트 마무리 할까 해서요.”

레아는 깜짝 놀랐다. 일주일은 더 걸릴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벌써 끝나다니. 민우의 집중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분량이 많아서 검토에 며칠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글 읽는 게 업이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자, 서두르시죠. 애들이 기다리겠어요.”

레아는 엉겁결에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폴라리스 연구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이다혜와 남희석이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어? 레아 씨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세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민우는 테이블을 주목했다.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큰 초가 하나 꽂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첫 프로젝트를 기념하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새 케이크를 사왔어?”

“소소하긴 하지만 박수는 치고 넘어가야 할 거 같아서요. 아침에 출근하면서 샀어요. 잘했죠?”

“그래. 잘했다.”

이다혜가 팔꿈치로 툭 치자 남희석이 초에 불을 붙였다.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을 보며 두 조교가 싱긋 웃었다. 그만큼 보람이 컸다.

옆에서 레아가 채근했다.

“매니저님. 한 말씀 하셔야죠.”

“아, 그래야 하나요?”

헛기침을 한 민우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다. 두 조교의 눈빛을 보니, 수백 명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 이상의 긴장감이 들었다.

어쨌든 그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학계에 처음 발을 내디딘 거니까.

고민을 끝낸 민우가 입을 열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중요한 프로젝트였지만, 우리가 앞으로 같이 해야 할 여러 프로젝트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이제 끝이라는 생각보다는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다시 달려보자. 즐거운 마음으로. 알았지?”

“교수님 덕에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오빠.”

두 조교가 감격에 찬 눈빛을 보냈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레아가 돌연 박수를 쳤다. 포근한 미소로 민우는 케이크를 가리켰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끄지 않고.”

후우, 촛불이 꺼졌다. 두 조교도 박수를 치며 민우가 방금했던 한마디를 마음에 새겼다.

그래, 이게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 * *

백제호텔 웨딩홀에 들어선 진섭과 예린은 깜짝 놀랐다. 화려한 인테리어도 인테리어였지만, 모여든 인파가 대단했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대규모 연회 같았다.

저 멀리 예복을 입은 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와. 레알 어마어마하네. 손님들 식비만 해도 장난 아니겠어.”

“여기 빌리는 것도 비싸지 않을까?”

“걱정 마세요. 식비는 물론 대여비도 다 호텔에서 부담하기로 했어요.”

진섭과 예린이 고개를 돌렸다. 정연주였다. 그녀는 수수한 느낌의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헤어스타일도 튀지 않게 차분했다. 수빈에 대한 배려였다.

연주가 가까이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 진섭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정연주. 너무 민우만 잘 챙기는 거 아니냐? 사람 질투 나게.”

“설마요. 오빠 결혼식 때도 똑같이 해드릴 생각이었는데요?”

“저, 정말?”

“대신 예린 언니랑 결혼한다는 조건으로. 어때요?”

“콜!”

세 사람은 축의금을 내고 방명록을 작성했다. 연주의 축의금 봉투를 확인하던 민우의 외삼촌이 액수를 보고 흠칫 놀랐던 게 소소한 해프닝이었다.

“왔어?”

민우가 다가왔다. 진섭이 새삼스레 악수를 청했다.

“축하한다. 박민우. 결혼은 무덤이라고 했던가. 나도 곧 비장한 마음으로 그 길을 따라가마.”

“······라는데?”

민우가 재치 있게 화살을 예린에게 돌렸다. 그녀는 웃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진섭이 차라리 화를 내라고 애원했다.

“아무튼 와 줘서 고마워. 손님들이 많아서 정신이 없네. 나중에 식사할 때 자세히 얘기하자.”

“축하해요.”

연주도 짧게 한마디 했고, 민우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떴다. 연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가슴이 아프면 어쩔까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좀 아쉽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우습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연주가 말했다.

“이제 신부대기실 가서 수빈 언니랑 같이 사진 찍을까요?”

“그거 좋지.”

세 사람은 신부대기실로 가 수빈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축하의 말을 남기고 주예린은 먼저 자리를 떴다. 결혼식 연주와 축가 반주를 맡았기 때문이다.

한편 민우는 여전히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 미스터 박! 」

익숙한 프랑스어에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랑느 박사였다. 깜짝 놀란 민우는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 아니 박사님! 오신다는 거 농담 아니었습니까? 」

「 허허허. 농담은 무슨.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스터 박의 기념일인데 내가 빠질 수 있나. 휴강하고 여기까지 왔네. 」

「 그러셨군요. 먼 길이었을 텐데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겸사겸사 온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말게. 」

반가운 손님은 그뿐이 아니었다. 자얀은 알 카흐파 의장의 축전을 들고 직접 식장을 찾았다. 거기에 아랍에미리트의 왕세제 아미르도 왕실의 이름으로 민우의 결혼을 축복했다.

명인대 식구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을 필두로 명인대 대학원 선후배들이 자리를 빛냈는데, 민영환 교수가 왔을 때는 솔직히 좀 놀랐다.

청문대도 이에 지지 않았다. 박자희 총장을 비롯해 김한진 한국문화교육원장, 그리고 국문과 및 교양학부 교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물론 이다혜와 남희석도 한몫 거들었다.

한일대에서도 손님이 찾아왔다. 서강일이 멋지게 차려입고 나타난 것. 오늘 결혼식의 사회는 그가 맡을 예정이었다. 덤으로 이제는 연인이 된 강민희도 함께 따라와 축하했다.

방송 및 언론계에서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배우 허윤과 가수 임찬혁을 시작으로 KBC의 장영한 PD와 아나운서들이 참석했고, 가디언지의 조슈아 벨라미도 깜짝 방문해 민우를 놀라게 했다. 늘 민우에게 특종을 따갔던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도 그간의 배려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축의금을 두둑이 준비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곽준우 과장이 김강현 장관을 대신해 참석했고, 대한그룹 비서실과 산하 복지재단에서도 사람을 보냈다.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 주임도 당연히 자리했다. 아쉽게도 센트럴북스의 제임스 편집장은 스케줄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대신 지음사 인문사회팀 식구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정말 많이들 오셨구나. 이제야 좀 결혼한다는 실감이 나네.’

민우는 식장을 둘러보며 감회에 사로잡혔다.

다양한 군상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자리에 모였다.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한 풍경이다. 인연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모두가 모여 축복하는 가운데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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