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 < 102장. 같은 꿈을 꾼다는 것 (1) >
민우의 자서전은 정말 불티나게 팔렸다.
지음사에서 이례적으로 초판 물량을 5만부로 잡았지만 이 또한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발매 5일 만에 ‘일시 품절’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온·오프라인 서점의 차트를 석권했다.
그 소식을 지음사 출판기획실의 전남규 차장에게 전해들은 민우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보다 잘 팔리고 있네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저는 지음사 쪽에 다 위임했으니 증쇄 같은 부분은 알아서 해주세요.”
― 하하하. 늘 믿어 주셔서 감사하네요. 결정되는 대로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북미 시장은 좀 어떻습니까?
“음, 그게······ 아직 정확한 판매량은 안 나왔는데 현지 반응은 나쁘지 않다고 들었어요.”
― 오오.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프로페서>는 센트럴북스를 통해 북미 시장에도 진출했다. 원고를 쓸 때 영어번역본을 동시에 준비한 덕에 비슷한 시기에 출간을 할 수 있었던 것.
판매량 및 독자 선호도 등의 구체적인 지수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제임스 편집장은 매우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변방의 젊은 지성의 고민이 솔직하게 담겨 있어 다양한 독자층을 만족시킬 거라고 평했다.
― 북미 쪽이 잘 풀리면 유럽 쪽도 문제없겠는데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건 가 봐야 아는 얘기죠.”
― 그래도 시기가 딱 좋지 않습니까? 폴라리스 연설 동영상도 2천만 뷰 찍었고 아프리카 사업도 잘 풀리고 있고요.
“그렇긴 한데······.”
사실 북미 시장 진출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민우도 제임스 편집장도 진짜는 유럽 시장이라고 생각했다.
민우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큰 곳이 바로 유럽이기도 했다. 이번 폴라리스 총회를 시작으로 영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언론과 대학이 민우에 대한 논평과 기사를 연일 게재하고 있었으니까.
“시기가 좋긴 해도 실제 출간이 좀 늦어질 거 같아서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빨라도 하반기는 돼야 해서요.”
― 설마 이번에도 민우 씨가 다 번역하는 겁니까? 프랑스어도, 독일어도? 아,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도 가능하시겠네요.
“그럴 계획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민우는 자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해 완벽한 현지화가 무엇인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주요 유럽어는 이미 마스터한 지 오래다.
전화기 너머에서 꾸밈없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 이야, 알면 알수록 정말 한계가 없는 분이네요. 민우 씨는. 아, 맞다.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거 송 실장님이 아까 여쭤보라고 하셨는데······ KBC ‘독서의 밤’에서는 민우 씨 책 안 다룬답니까?
“아직 구체적인 제안은 없었어요. 제가 낸 책을 제 프로에 소개하는 건 좀 부끄러워서.”
― 오히려 그래서 더 프리미엄이 붙는 게 아닐까요? 저자 직강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튼 나중에 정리가 되면 전달해 드릴게요. 계약에 특별히 문제될 건 없죠?”
― 아유, 당연하죠! 하하하. 오히려 저희들이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그럼 그쪽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 차장님.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전남규 차장과 통화를 마친 민우는 채 웃음을 거두지 못한 채 <인문과학총서> 작업을 계속했다.
마음 같아서는 인터넷에 들어가 서평을 찾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다 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상태로 원고 검토를 다시 시작했다. 이 작업만 끝나면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도 모두 끝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원고를 보던 그때 노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국문과의 문남기 조교였는데, 커다란 상자를 두 팔로 들고 있었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야?”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왠지 날이 갈수록 양이 늘어나는 거 같은데요?”
“괜히 미안하네.”
상자엔 편지와 선물로 가득했다. 자서전 출간의 여파로 팬들이 보낸 것들이었다. 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상자를 건네받았다.
“다음부터는 전화해. 내가 가지러 갈 테니까.”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인데요.”
“학교 일도 아닌데 이런 개인적인 일로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되지. 다른 선생님 보기에도 안 좋을 거고. 학생들 등록금으로 너 월급 받는 거잖아. 그럼 학교 일만 해야지.”
“그렇지만 선생님이 계시니까 학생들에게도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칭찬만 들려오는 분은 또 처음이라서요.”
뜻밖의 소신 발언에 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무튼 고마워. 가서 일 봐라.”
“예.”
문남기 조교가 돌아가자 민우는 소파에 앉아 상자에 든 것들을 헤집어 보았다.
‘어휴, 이걸 또 언제 다 읽나. 이번에도 밤 새야겠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편지와 선물을 대강 훑어보고 상자를 한쪽으로 치운 민우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하던 일에 집중했다.
우우우웅―
하지만 집중은 오래가지 못했다.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원고를 읽었겠지만, 기다리고 있는 전화가 있어 그러지 못했다. 민우는 재빨리 번호를 확인했고, 국제전화인 것을 확인하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요즘 많이 바쁘죠? 한국 쪽 언론 모니터링 하고 있는데 책이 아주 잘 나가는 거 같던데요.
기다리고 있던 전화였다. 영국 가디언지의 기자 조슈아였다.
「 그렇게 바쁘진 않아요. 프로젝트도 거의 마무리 단계라서요. 조슈아 씨는······ 아니, 조쉬는 어때요? 별일 없죠? 」
― 별일이 있으니 전화를 했지요.
「 설마? 」
― 맞아요. 민우 씨가 부탁한 거 해결했어요. 가족들 연락처 확보했습니다.
민우의 표정이 보다 밝아졌다. 그는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채근했다. 어떻게 찾았는지를.
― 부다페스트 대학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쪽에서 좀 알아봐달라고 했어요. 유명 인사라 찾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았네요. 그런데 죄르지 루카치의 후손들은 왜 찾는 거예요?
「 그분들께 돌려줘야 할 물건들이 있어요. 」
― 돌려줘야 할 물건이요? 그거 흥미롭네요. 흐음······ 혹시 루카치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라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과연 기자 출신이라 눈썰미가 좋았다. 핵심을 짚었지만 민우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고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 아직은 뭐라 말씀드릴 단계는 아닙니다. 」
― 사람 참 야박하시네. 발품 좀 팔았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죠.
「 하하하. 실은 루카치와 관련된 책을 하나 쓰고 있어요. 」
― 음? 루카치 이론은 이미 한물가지 않았나요? 어떤 책인데요?
「 논문 형식의 단행본이에요. 사연이 좀 얽혀 있고요. 그게 곧 끝날 거 같은데, 집필 끝나면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기사화를 해야 하니까. 」
― 알겠습니다. 곤란하신 거 같으니 더는 묻지 않지요. 그런데 특종입니까? 학점으로 매긴다면 어느 정도?
「 에이, 아니. 에이플러스요. 조쉬가 가디언 쪽에 기사를 내준다면 캠브리지 수석졸업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
민우는 그렇게 농을 던졌다. 하지만 조슈아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는지 ‘어메이징’을 외쳤다. 민우는 또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어. 마무리만 하면 되겠구나.’
민우는 가방에서 루카치의 안경과 만년필을 꺼냈다.
우연히 명인대 도서관에서 얻게 된 유품. 처음에는 진위여부를 의심했지만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 이후로 그는 이것이 진짜 루카치의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유고가 완성되면 내 임무도 끝나는 거니까 그때는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게 맞겠지.’
그렇게 결정했기에 조슈아를 통해 루카치의 후손을 찾게 된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안경의 가능성은 정말 무궁무진했으니까. 상형문자도 해독할 수 있었기에 고고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만년필은 아직도 그 기능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어의 뜻을 풀이해주고, 강의력을 향상시키는 것 외에도 다른 게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런 욕심이 들 때마다 루카치가 남긴 마지막 쪽지를 펼쳐보았다.
‘그가 나에게 부탁한 건 유고뿐이야. 그 이상은 안 돼. 지금 유품을 돌려주는 것도 많이 늦었으니까. 사과해야 할 일이지.’
유품을 바라보는 민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서운함과 미안함, 아쉬움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다. 물론 마지막은 미소였다.
그는 펜과 안경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때마침 노크가 들렸다.
민우는 들어오라고 하려 했지만 이미 문이 열리고 있었다. 청문대에서 그런 무례가 가능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내일 모레가 결혼식인데 아직까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냐? 빈이랑 싸웠어?”
“신혼여행 좀 편하게 보내려면 다 끝내고 가야지.”
“다 하려면 얼마나 남았는데?”
“세 시간 정도.”
“빈이 혼자 저녁 먹게 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해야겠구만.”
한진섭은 냉장고를 뒤져 마실 것을 꺼낸 뒤 소파에 드러누웠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 민우는 그냥 웃고 넘겼다.
민우는 원고에 시선을 둔 채로 한마디 툭 던졌다.
“뭐 고민 있냐?”
“어?”
음료수를 마시던 진섭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입에 있는 걸 뱉을 뻔했다.
“어떻게 알았어?”
“간단한 이치라고 할까. 오늘 강의도 없는데 네가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다는 게 기적이니. 피시방 아니면 클럽각인데.”
“난 또 너 아프리카 가서 부두교에 입문이라도 한 줄 알았네.”
싱거운 농담에 민우는 피식 웃었다.
눈은 계속 원고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진섭을 위해 귀를 열어두었다. 그래도 진섭은 왠지 방해를 하는 것 같아 미안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민우가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하기 어려운 말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 음, 그게 뭐랄까.”
진섭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민우는 원고를 덮고 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미안한데 오빠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거 같아. 진섭이하고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응. 저녁 먹고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 문단속 잘하고. 들어갈 때 전화할게.”
통화를 마친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진섭은 얼떨떨한 표정이다. 친구가 일과 가정까지 미룰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뭘 그렇게 봐?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무리하는 거 아냐?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가자. 대신 술값은 네가 내라.”
“야. 박민우!”
하지만 진섭은 민우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두 사람은 청문대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신입생들 덕에 한창 북적거리는 곳이었지만 두 사람이 앉을 자리는 있었다.
민우는 소주와 요깃거리를 시켰다. 술이 먼저 나와 잔을 채웠다. 두 사람은 늘 그렇듯 단숨에 비웠다.
진섭의 속내는 한참 있다 나왔다.
“너 수빈이네 부모님한테 허락 어떻게 받았냐?”
“무슨 허락?”
“뭔 허락이겠어. 결혼이지.”
그제야 민우는 친구의 고민을 알아챘다. 술을 마저 채우고 되물었다.
“예린이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어?”
“일단은.”
“그럼 반쯤 성공한 거네. 주님 그 녀석 설득하는 게 제일 힘든 일이잖아. 고민할 거 뭐 있어? 가서 딸을 제게 주십쇼! 하고 넙죽 절하고 오면 되지.”
“자식이 말이야 쉽지.”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진섭은 묵혀 뒀던 고민을 꺼냈다.
“예린이가 성공하면서 돈 엄청나게 벌었잖아. 그에 비해 나는 뭐 하나 가진 거 없는 시간강사 나부랭이고. 처음에 만날 때는 차이가 없어서 괜찮았는데······ 후우, 뭐 솔직히 이젠 예린이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걱정이 돼.”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현실이고 재력은 중요한 요건 중 하나다.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섭이 물었다.
“너 예린이네 부모님 만난 적 있냐?”
“몇 번 뵌 적은 있지.”
“어때?”
“어떻다고 말할 정도로 오래 대화는 안 해봤어.”
기대하던 진섭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술이 더 들어가면 아예 엎드릴 기세였다.
“결국 돈이 문제란 건가.”
“그렇지.”
“하지만 오히려 그렇다면 더 잘된 게 아닐까 싶은데.”
“무슨?”
빈 잔을 채우던 진섭이 우뚝 멈추고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우는 술병을 뺏어들고 진섭의 잔을 대신 채웠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돈이 사람을 바꿀 만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 사람의 본모습을 찾게 도와줄 뿐이지.”
“어?”
“예린이가 좀 툴툴대긴 해도 한결같잖아. 수십억이나 벌었으면서 낭비하지도 않고 남몰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그렇지.”
“그런 녀석을 키운 부모님이라면 안 봐도 느낌이 오지 않냐?”
작은 깨달음에 진섭은 입을 꾹 다물었다.
민우는 자신의 잔도 가득 채웠다. 그러다보니 오래전 수빈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그때가 문득 떠올랐다.
“평소처럼 하던 대로 해. 지레 겁먹지 말고. 꾸미지 않아도 너 괜찮은 놈이니까.”
“아우, 닭살이야. 하여튼 있는 척은 다 하는구만.”
“건배나 해 짜식아.”
잔이 부딪쳤다.
이번에도 잔을 한 번에 비운 진섭은 시원한 탄성을 내뱉었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보다 친구가 다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어 민우는 기뻤다.
그렇게 두 친구는 잠시 옛날로 돌아가 술잔을 하나씩 비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