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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87화 (287/500)

287화 : < 101장. 프로페서 (7) >

아프리카 일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자서전 원고까지 마무리한 민우는 박사논문 집필에 착수했다. 3월은 학부 강의와 논문의 서론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다음 주에 학술답사 가는 게 좀 부담스럽네. 막내라 안 갈 수도 없고. 학과 교수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교양학부에 있을 때는 이런 거 신경 안 써도 됐는데.’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래도 마음은 즐거웠다. 국문과의 학술답사는 수업의 연장이었으니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있었다. 민우는 논문 원고를 저장한 다음 책상 위를 정리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수빈이 눈을 비비며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설마 오늘도 밤샌 거예요?”

“아니. 좀 일찍 일어났어. 오늘 서지훈 선생님 댁에 가는 날이잖아. 송 선배도 계신데 밤새고 초췌한 얼굴로 갈 수는 없지.”

“맞다. 논문 검사 받으러 간다고 했죠.”

“가서 좀 더 자.”

“슬슬 일어나야죠. 이러다가 나무늘보 되겠어.”

오늘은 토요일이다. 늦잠을 잔 수빈은 잠옷 차림으로 민우의 옆에 앉았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크게 하품을 하면서.

그 모습을 보며 민우는 피식 웃었다.

아직 결혼 전이지만 함께 살게 되면서 몰랐던 것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 끝났어요?”

“대충은. 좀 보충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이따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네.”

“부럽다. 벌써 박사논문 쓰고. 나도 슬슬 준비해야 하는데 잡일이 너무 많네요.”

“당분간은 쉬어. 스트레스 받지 말고. 나중에 쓸 때 내가 도와줄 테니까.”

살짝 감동한 수빈은 민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세부전공이 같은 게 이럴 때 좋네요. 든든하다.”

“평소엔 안 든든하고?”

“아들 키우는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긴 하지만, 뭐 괜찮아요. 가끔이니까.”

“솔직하지 못하긴.”

수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민우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금 서둘렀다.

“그럼 다녀올게.”

“두 분께 안부 전해 주세요. 참, 빈손으로 가지 말고.”

“선물은 이미 준비해 놨어. 갔다가 바로 집에 올 테니까 이따 공원에 산책하러 가자. 꽃도 많이 폈고 걷기 좋을 거야.”

이런 소소한 일상이 좋았다. 수빈은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차를 끌고 나갔다. 서지훈 교수의 집은 강남에 있는 아파트였는데, 차가 막히지 않아 금방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현관 앞에 선 민우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벨을 눌렀다.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머, 일찍 왔네요?”

“안녕하세요.”

편한 옷을 입은 송승현 실장이 민우를 맞았다. 매번 정장을 입은 모습만 봐서 그런지 새로웠다. 화장기도 진하지 않아 조금 어려 보였다.

“주말이라 차가 좀 막힐 줄 알았는데 금방 왔네요. 별일 없으셨죠?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나야 늘 그렇지 뭐. 일단 들어와요.”

평소보다 어조가 많이 부드러웠다. 친근하다고 할까. 집 안으로 들어온 민우는 들고 온 선물세트를 그녀에게 건넸다.

“뭘 이런 걸 다 사왔어요? 그냥 편하게 오지. 오히려 지음사 임직원 모두가 선물을 싸들고 찾아가도 모자랄 판인데.”

“예? 갑자기 무슨······.”

“민우 후배 자서전 말예요. 5만부 한정 예약판매 들어간 거 다 소진됐다고 지금 난리도 아녜요. 방금 전에 연락 왔어요.”

민우는 깜짝 놀랐다.

번역일로 잠시 출판업계에 몸담았을 때 국내 출판시장의 현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됐던 그였다. 5만부는 결코 적은 수량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팔렸네요.”

“미디어의 힘이죠. 방송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자주 언급이 되니까. 요즘은 팬 카페도 여럿 생겼다죠?”

이제는 칭찬이 아니라 조금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 민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송승현 실장도 더는 괴롭히지 않았다.

“그이 지금 전화 받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커피 괜찮죠?”

“예. 감사합니다.”

민우는 거실에 얌전히 앉아 서지훈 교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인쇄해 온 논문을 읽으며 커피잔을 다 비우니 서지훈 교수가 방에서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어, 그래. 많이 기다렸냐?”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런가. 어휴, 진짜 교수도 이제 못해먹겠단 말이지. 주말에도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면 어디 쓰겠나?”

“바쁘시면 다음에 올까요?”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할 정도로 꼰대는 아니다. 앉아. 쓴 거 보여주고.”

“여기 있습니다.”

서지훈 교수는 민우가 준비한 서론을 면밀히 검토했다. 방향이 잘 잡혀있고 논리가 견고했다. 연구방법론에도 큰 무리수가 보이지 않았다.

“음, 나쁘지 않네. 예전에 개요 짠 대로 내용을 잘 채웠구나. 나름 고생한 흔적이 보이는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지훈 교수는 걱정스러운 부분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민우의 논문을 이해하고 맥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은 명인대에서 서지훈 교수가 유일했으니까.

“레퍼런스가 좀 빈약한 느낌인데 관련 연구물을 더 찾아봐야 할 거 같다. 검색을 좀 광범위하게 돌려. 조교들 시켜서라도.”

“알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더 없나요?”

“일단은 이대로 가보자.”

서지훈 교수는 의견을 정리한 다음 서론을 민우에게 건넸다. 한 고비 넘겼다는 안도감에 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지훈 교수가 웃었다.

“안심하기엔 좀 이르지 않나? 서론은 말 그대로 서론일 뿐인데. 본론에서 허둥대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써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알면 됐어. 근데 너 이번에 자서전 내는 거 말이다. 출판기념회 안 한다며?”

“결혼식도 곧 있으니 행사가 겹치는 느낌이 들어서요. 매번 책 낼 때마다 기념회 하면 한도 끝도 없을 거 같기도 하고. 다음 주에 한성문고에서 사인회 하기로 했으니 그걸로 대체하려고요.”

“한성문고라면, 광화문점?”

“예.”

이어 민우는 사인회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서지훈 교수는 핸드폰으로 민우의 사인회가 열리는 날의 일정을 확인했다.

“그날 특별한 일은 없네. 시간 되면 한번 들르마.”

“줄이 좀 길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뭐? 하하하하!”

민우의 그럴듯한 농담에 서지훈 교수가 시원하게 웃었다.

* * *

일주일 후, 민우의 자서전이 정식 출간되었다. 지음사의 전폭적인 마케팅과 민우의 네임밸류가 시너지를 발휘해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프로페서> 발매 시작 당일, 민우는 진섭과 함께 한성문고 광화문점으로 향했다.

“야. 근데 너무 일찍 가는 거 아냐? 사인회는 오후 세 시부터라면서.”

“미리 가서 현장 분위기 좀 보려고 그래.”

그렇게 대꾸한 민우는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영혼 없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섭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너 갑자기 모자는 왜 쓰냐?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

“맞을걸?”

“지랄도 풍년이다. 나 참, 아주 그냥 공인이 다 되셨어요. 우리 박 교수님.”

두 사람은 그렇게 주고받으며 지하철 5호선에 올랐다. 광화문역까지 가는 데 민우를 알아보는 사람은 다행히 한 명도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한성문고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심 자신의 자서전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것은 추측일 뿐이었다.

“책은 어디에 있어?”

“이쪽으로.”

민우는 진섭을 데리고 송승현 실장이 알려준 곳을 찾았다. 좋은 자리에 매대를 받았다고 했는데, 과연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민우의 책을 읽고 있었다. 몇몇은 계산대로 가지고 가기도 했다. 민우는 한쪽에 서서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 썼다.

“생각보다 잘 팔리네. 예판으로 5만부 해먹었다고 하지 않았냐?”

“오늘 사인회 있으니 겸사겸사 와서 사는 사람도 많을 거라고 하던데.”

“우리 박 선생 이걸로 또 돈을 쓸어 담게 되는 건가?”

“주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그건 인정.”

그때였다.

누군가 얼굴을 불쑥 내밀더니 민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말릴 틈도 없이 민우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라 더더욱 놀랐다.

그녀는 다름 아닌 라온북스의 이유리 주임이었다.

“민우 맞지?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쉿.”

민우는 일단 검지를 입에 대며 목소리를 낮추게 했다. 이유리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기에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책 반응 어떤가 보려고 좀 일찍 나왔어. 넌 무슨 일이야?”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신간 나온 거 있어서 확인할 겸 들렀지. 이따 너한테 사인도 받고.”

이유리가 손에 든 종이백을 흔들어 보였다. 그 안엔 이미 계산이 끝난 민우의 자서전이 두 권이나 들어 있었다.

“하나는 현 팀장님 거?”

“응. 책 낸 기분은 어때? 일반서는 처음이지?”

“번역물을 낼 때와는 완전히 다르네. 그때는 온전히 내가 쓴 책이 아니어서 그런지 긴장이 별로 안 됐는데, 지금은 좀 달라. 솔직히 말하면 떨려. 많이.”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아?”

이유리가 핵심을 찔러왔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논문집을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반 대중들과 본격적으로 소통하게 된 거니까.

민우의 책을 들고 하나둘 자리를 뜨는 사람들을 보며 이유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있지. 완전 한 방 맞은 기분이다?”

“왜?”

“네가 자서전을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 대학 교재 쪽으로 기획해 보려고 끙끙대다가 그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역시 송 실장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업계에서 오래 계신 분이니까. 너도 나중엔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더 대단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이유리는 웃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그녀가 그렇게 되리라 확신했다. 노력과 열정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으니까.

“아무튼 난 먼저 가볼게. 이따 사인회장에서 봐.”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나도 애들이랑 합류한다.”

이유리와 한진섭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시계를 확인한 민우도 자리를 옮겼다. 슬슬 사인회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잠깐만요.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하하하. 제가 왜 농담을 합니까? 저게 다 박 교수님의 사인을 기다리는 줄입니다!”

한성문고 측 행사 담당자가 자신 있는 포즈로 인파를 가리켰다.

민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끝도 없이 늘어져 있는 줄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수백 명 이상이 몰린 것 같았다.

“두 시간 내에 다 할 수 있을까 걱정이네요.”

“최선을 다해 주십쇼. 자, 이쪽으로.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우는 다시 걸음을 옮겨 사인회장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대부분 여성이라 고음이 압도적이었다.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가?’

새삼스럽게 자신의 인기를 실감한 민우였다.

행사 담당자가 간단히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나서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만큼 요구사항이 다양했다. 얌전히 사인만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난처한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사진을 찍자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 민우의 양옆에 선 예쁜 여자 두 명이 바로 그 부류였다.

찰칵!

민우의 팔을 하나씩 차지하고는 사이좋게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꽤 적극적인 포즈를 취했다.

“고마워요 오빠!”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하면 안 돼요? 연락처 좀 주세요.”

“죄송합니다. 그건 좀 곤란하네요.”

민우는 나름 철벽을 쳤지만 수많은 팬들 앞에서 정색을 할 수도 없어 난처했다. 결국 행사 담당자가 나섰고 두 여자는 자리를 떴다.

하지만 옛말에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어리고 예쁜 사람이 오빠라고 하니까 좋아요? 아아~주 행복해 보이시던데. 입이 귀에까지 걸리고.”

공교롭게도 다음 차례가 307호 멤버들이라 이수빈이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토라진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미안. 어쩔 수 없잖아. 사진 찍는데 찡그릴 수도 없고.”

“됐으니 사인이나 하세요.”

이수빈은 냉랭하게 책을 펼쳐 내밀었다.

민우는 곁에 있던 진섭과 예린에게 SOS를 보냈지만, 두 사람은 팝콘이 없는 걸 아쉬워하며 이 상황을 구경하기만 했다.

사인을 하는 민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예린이 한마디 툭 던졌다.

“섭 오빠. 이거 분위기가 마치······ 이혼 서류에 사인하는 거 같지 않아?”

“오! 비유 쥑이는데?”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이다.

사인을 끝낸 뒤 책을 수빈에게 돌려주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끝나고 같이 저녁 먹어요.”

“좋지.”

민우도 그녀를 바라보며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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