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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86화 (286/500)

286화 : < 101장. 프로페서 (6) >

어느덧 아프리카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민우는 숙소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머릿속에 넣어 원고의 대미를 장식할 생각이었다.

‘전혀 새로운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었지. 내가 지금까지 정말 편한 곳에서 공부를 해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명인대 대학원에 첫 입학했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곳에는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 자서전에서는 좀 더 나은 풍경을 그릴 수 있겠지? 이곳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더 할 테니까.’

가까운 미래를 떠올려 본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마냥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국제 관계가 한 사람의 일로 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관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내 손으로 해낼 수 있다면 더 좋겠지.’

생각을 모두 정리한 민우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제 슬슬 원고를 마무리 할 때였다. 손을 한 번 비비며 자판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때 타이밍 좋게 문에서 노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편한 옷을 입은 연주가 들어왔다.

민우를 비롯한 모든 일행은 알 카흐파 의장이 세운 학교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등장이 놀랍지는 않았다.

시계를 한 번 힐끗 바라본 민우가 자판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밤늦게 무슨 일이야?”

“지금쯤이면 원고 쓰고 있을 것 같아서요.”

“응? 아아.”

연주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이 손에 들려 있다. 커피를 마시기엔 늦은 시간이었지만, 연주는 그가 늦은 시간까지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땡큐. 잘 마실게.”

“잠깐 앉아 있다 가도 돼요?”

“좋을 대로. 참, 하지은 이 녀석 지금 뭐 하고 있어? 설마 한국으로 몰래 도망친 건 아니지?”

“방에서 표지 작업 마무리 중이예요. 곧 완성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연주는 다소곳이 민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제일 먼저 노트북에 흥미를 보였다.

“원고는 잘 돼가고 있어요?”

“이제 마무리만 하면 돼. 기획했던 대로 잘 풀린 것 같아. 뭐 좋은 책인지 아닌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판단해 주겠지만.”

“기대되네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연주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저 겸손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아까 오후엔 어디 다녀왔어? 안 보이던데.”

“알 카흐파 의장님하고 면담 좀 했어요. 자얀 씨도 같이요. 청문대 일도 있고 개인적인 용무도 좀 있었어요.”

“청문대 일은 그렇다 치고, 개인적인 용무도 있었어?”

“그냥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이 있을 거 같아서요. 대단한 분들이잖아요. 기업가로서의 마인드도 그렇고 안목도 그렇고.”

“결국 그쪽으로 마음을 굳힌 거야?”

연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청문대 물리학과에서 임시 튜터를 맡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자신의 길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

“강단에 서면서 깨달은 것들이 좀 있었어요. 보람도 많이 느꼈고. 학생들과 함께하며 제가 배우는 것들도 있었죠. 하지만 역시 좀 더 큰일을 해보고 싶어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일이요.”

“어떤 길을 가든 응원하마.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오빠라면 그렇게 말해 주실 줄 알았어요.”

“하하하. 패턴이 너무 읽혔나?”

연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관계에서 뻔히 보인다는 것은 시시하고 지루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사람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일종의 신호다. 그렇기에 사람이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늘 흥미롭다.

그걸 깨닫게 해준 사람이 눈앞에 있다. 연주는 한번 심호흡을 하더니 빙긋 웃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웃어? 사람 무섭게.”

“실은 말예요. 마음을 굳힌 게 하나 더 있어요.”

연주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깔끔하게 포장된 편지봉투였다. 그것을 민우에게 내밀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읽어 주세요.”

“이게 뭔데?”

“저도 제 이야기를 좀 써봤어요. 예전부터 쓰고 싶었던 건데 이제야 쓰게 됐네요.”

“근데 이걸 왜 나한테······.”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연주가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방에서 나갔다. 멀뚱히 편지봉투를 내려다보던 민우는 겉면을 뜯었다.

‘많이도 썼네. 대체 몇 장이야?’

편지지가 꽤 많았다. 세 보니 열 장이었다. 거기에 깨알 같은 손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민우는 커피를 홀짝이며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웃을 때도 있었고,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다. 놀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차분한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랬던 거였구나. 그래서······.’

그간 맞춰지지 않았던 퍼즐이 이제야 제 위치를 찾은 느낌이었다. 연주가 했던 알 수 없는 행동들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민우는 남은 편지를 마저 읽었다.

‘잠깐만. 이건?’

편지의 마지막에 인용구가 있었다. 독일어 원어로 적혀 있었다. 읽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고민한 그는 결국 그 구절이 무엇인지 떠올려냈다. 아브락사스(abraxas)라는 단어가 힌트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던가. 맞아. 확실해. 기억난다. 예전에 전집 작업할 때 옮긴 적이 있었지?’

근사한 이탤릭체로 적힌 그 인용구를 마지막으로 편지의 내용은 모두 끝났다.

끝까지 다 읽은 민우는 편지를 접었다. 기다렸다는 듯 깊은 여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민우는 잠시 자리를 지키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향한 마음을 ‘학문적 동경’이라고 정의한 것이 연주의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주는 왜 이 편지를 나한테 줬을까? 그렇게 웃으면서.’

궁금증이 들었다. 끊임없이 생각을 펼쳐 나가던 민우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혹시.’

그럴듯한 가설이 떠올랐다.

민우는 편지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그녀가 인용한 마지막 구절을 소리 내 읽었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민우는 그 부분을 다시 반복해 읽었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왠지 알 것 같았다. 연주가 왜 이 편지를 줬는지, 그리고 저 인용구를 넣었는지를.

“누가 문학도 아니랄까봐. 딱 너다운 방식이네. 정연주.”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린 민우는 옆에 놓인 라이터를 손에 쥐었다. 철재 쟁반 위에 편지를 놓고 불을 붙였다.

알을 깨고 나온 새에게 껍질 같은 건 필요 없을 테니까.

환하게 타오르는 편지를 바라보며 민우는 그녀의 첫 날갯짓을 축하해 주었다.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 * *

타닥타닥― 탁!

엔터를 마지막으로 밤새 이어지던 경쾌한 타이핑 소리가 끝났다. 어느새 창문 밖에서는 환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잘 마무리했으니 됐어. 모자란 잠은 비행기에서 실컷 자면 되니까. 웃샤!’

민우는 기지개를 켰다. 두둑거리며 뼈와 근육이 시원하게 풀렸다.

마지막으로 원고를 다시 확인한 다음 지음사에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아침 식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마침 옆방 문도 함께 열렸다. 연주와 지은이 함께 쓰는 방이었는데, 나타난 사람은 하지은이었다.

“늦잠꾸러기가 웬일로 일찍 일어났네?”

“어휴, 누구 때문에 잘 수가 있어야지.”

“완성했어?”

하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찾아와 보여줄 생각이었는지 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민우에게 들이밀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할 수 없으니 이걸로 만족하세요.”

“일단 좀 보고.”

태블릿을 넘겨받은 민우는 감탄을 흘렸다.

“대박인데?”

생각을 그대로 꺼낼 수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우유처럼 부드러운 배경 위로 정열적인 캘리그래피가 한데 잘 어우러져 있었다. 오브젝트 없이 패턴만으로 느낌을 살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하지은이 투덜거렸다.

“언제까지 보기만 할 거야. 감상평은?”

“방금 얘기했잖아. 대박이라고.”

“하, 국문학 전공자가 표현이 왜 그렇게 졸렬해? 아무튼 다행이네요. 마음에 든다니.”

툴툴거리긴 해도 내심 좋은 모양이었다. 해방감을 느껴서일까. 하지은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근데 오라비 원고는?”

“방금 지음사 쪽에 보냈어. 나도 마무리 하느라 밤 샜다.”

“야식은?”

“여기가 한국이냐.”

“그럼 배고프겠네. 나도 새벽에 아무것도 안 먹어서 미칠 거 같은데. 식당 갈 거면 같이 갈까?”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하지은이 나온 곳을 힐끗 살폈다.

“그런데 연주는?”

“요 며칠 잘 못자더니 오늘은 꿀잠 자네.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로.”

“그럴 만도 하지.”

“응? 뭐 아는 거 있어?”

“아무것도?”

“아무것도가 아닌 거 같은데······ 혹시 어제 둘이 뭔 일 있었던 거?”

“뭔 일이 있었는지는 같이 방 쓴 사람이 더 잘 알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지은은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민우 일행은 현지민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간 사람들과 정이 들어 아쉬움이 남았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 아저씨! 」

버스에 오르기 전, 체구가 작은 아이가 민우에게 뭔가를 건넸다. 고리가 달린 손가락만한 크기의 전통 목각인형이었다.

「 이게 뭐야? 」

「 선물이에요. 가지고 있으면 나쁜 일이 생기는 걸 막아줄 거예요. 직접 만들었어요. 」

「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

「 또 오실 거죠? 」

가방에 목각인형을 건 민우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했다.

「 당연하지. 그때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야 한다. 알았지? 」

「 네! 」

민우는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버스에 올랐다. 곧 버스가 출발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손을 흔들었다.

* * *

“이거 너무 늦는데. 혹시 출발 시간에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

“현지 소식통이 정시에 출발했다고 하던데요. 좀 더 기다려 보시죠.”

기자들이 정보를 나누며 떠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인천국제공항은 모여든 기자들로 시끌벅적했다. 민우 일행의 도착 시각이 임박했던 것이다.

민우 한 사람의 영향력 때문은 아니었다. 대한그룹과 명일그룹의 로열패밀리가 함께 했다. 거기에 톱스타 허윤까지 있으니 쓸 기사거리는 넘쳐났다. 말 그대로 어장인 셈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기자가 물었다.

“허윤 씨 촬영한 다큐는 어떻게 한대냐?”

“KBC에서 특별편성 했다고 하더라고요. 휴먼 다큐로 방영된다고 오늘 소스 받았습니다.”

“확실해?”

“당연하죠. 선배는 절 뭘로 보시고······.”

“크흠! 그럼 넌 허윤 씨를 맡아. 난 박 교수 맡을 테니까. 각자 마크한 사람들 확실히 챙기라고. 특히 정연주 씨는 대한그룹 쪽하고 잘 얽히게 해봐. 분명 뭔가 건수가 있을 거다.”

“옙!”

그때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게이트에서 민우 일행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랜 비행에 피곤했지만 민우 일행은 공항 한쪽에 마련된 특별 인터뷰석에 착석했다. 사회자가 주의사항을 간단히 전하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소속을 밝힌 젊은 기자가 민우를 지목했다.

“이번 사업에 대한 평가와 소감을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지민들의 많은 지지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무척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답변이 끝나자 여러 기자들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사회자가 나서서 질문 순서를 정해주었다. 이번엔 연주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이번 출장과 대한그룹과의 연관성은 없나요? 새로운 사업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자선재단 쪽 협력사업이 있긴 했지만 모그룹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어요. 개인적인 목적으로 다녀온 거예요.”

연주가 딱 잘라 말했지만, 사용한 단어 하나에 기자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방금 개인적인 목적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목적이었는지요? 혹시 가업의 승계권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연주는 계속 이야기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때 민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재벌의 사회공헌활동이 적습니다. 기부문화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많은 돈을, 혹은 이익을 어떻게 나눠야 가치가 있는지 현장에서 배우고 싶었어요.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건 아무래도 많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이번 초청에 응한 거예요.”

뜻밖의 대답에 장내가 술렁였다.

기자들은 놀란 표정으로 연주를 바라보았다. 웅성거림도 잠시,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질의 대상은 민우도, 지은도, 허윤도 아니었다. 연주였다.

순식간에 주인공이 바뀌었지만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가 대한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할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오늘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일면이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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