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 < 101장. 프로페서 (5) >
아프리카를 향한 비행은 순조로웠다.
비행기가 안정 고도에 들어서자 민우는 개인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간이 책상에 앉아 원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마지막 부분은 이번 아프리카에서 겪은 것들로 장식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암시할 필요가 있어. 아직 내 인생은 절반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끝이 또 다른 시작이 되게끔.’
송승현 실장의 조언에 힘입어 민우는 자서전을 시리즈물로 구성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을 모아보면 공통적으로 ‘도전’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른다. 이번 컨셉은 도전으로 하고, 다음은 다른 키워드로 집필할 생각이었다.
물론 민우는 그 전에 끝내야 하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이 원고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박사논문에 들어가야 돼. 심사까지 남은 시간은 7개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안에 모조리 끝낸다. 할 수 있어.’
민우는 각오를 단단히 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때 열린 문에서 노크가 들렸다.
「 실례합니다. 프로페서. 」
「 아, 모하메드 씨. 」
모하메드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민우가 처음 전용기를 탔을 때 보좌해 준 승무원이기도 했다.
모하메드의 손에는 민우가 좋아하는 맥주와 안주가 들려 있었다.
「 그거 제 건가요? 」
「 예. 마실 걸 좀 준비했습니다. 긴 여정이 될 텐데 쉬시면서 하시지요. 」
「 마침 생각났는데 잘 마실게요. 」
민우는 사양하지 않고 맥주캔을 땄다. 치익, 기분 좋은 가스음이 들렸다. 그때 뭔가 생각났는지 모하메드에게 물었다.
「 참, 다른 애들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조용하네. 」
「 영화 보고 계십니다. 」
「 영화요? 그렇구나. 알았어요. 」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 모하메드가 개인실을 나섰고, 민우는 다시 노트북 화면에 몰두했다.
‘여기는 꽤 중요한 부분이지.’
국제비교문학회 학술대회에서 서지훈 교수와 토론하는 장면이었다.
민우는 반쯤 써 놓은 그 챕터를 다시 처음부터 살펴보았다. 당시 무대에 섰을 때의 희열과 감동이 다시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느낀 그 감정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인데. 흐음······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해야 좋을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게 포인트인데.’
맥주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민우는 일필휘지의 필력을 지닌 주예린이 부러웠다.
바로 그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독하다 독해. 비행기에서까지 일을 해? 편히 앉아서 가도 힘든 거리인데 말야.”
“영화 보고 있는 거 아니었어?”
방 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하지은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민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민우 몫으로 준비된 맥주를 허락도 없이 따고 시원하게 한 모금 마셨다.
“후아! 너무 지루해서 그냥 나왔지 뭐. 하여간 연주 그 기집애 취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프랑스 영화는 왜 그렇게 나랑 안 맞는지 모르겠어.”
“윤이는?”
“코 골면서 아주 잘 자던데? 동영상 찍어서 올리면 팬들이 좋아하겠더라.”
“그런다고 연주 혼자 내버려 두고 오냐. 친구면 옆자리를 지켜줄 줄도 알아야지.”
“영화는 원래 혼자서 보는 거라구.”
이번 아프리카행엔 연주도 동행하게 되었다. 대한그룹의 자선재단 쪽에서도 알 카흐파 의장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었고, 몇 가지 사업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주는 지은과는 달리 아부다비문화재단에서 정식으로 초청을 받았다.
“근데 뭐 쓰고 있는 중?”
“뭐 쓰긴. 자서전이지. 그러는 너야말로 그렇게 여유 부려도 되는 거냐? 표지 마감이 얼마 안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
흠칫 놀란 하지은이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민우의 자서전 <프로페서>의 표지를 맡아주는 대가로 이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니까.
팔짱을 낀 민우가 적당히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출발하기 전에 송 실장님께 연락 왔어. 언제 표지 받을 수 있냐고. 가능하면 결혼식 전에 책 내고 싶으니 협조 부탁한다.”
“좀 기다려 봐. 누군 안 그리고 싶어서 이러나? 아직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러지.”
하지은이 투덜거렸다. 여동생이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까. 그런 생각에 민우가 피식 웃었다.
“전엔 필이 팍 꽂힌다더니 그건 어따 팔아먹고?”
“그랬는데, 그때 오라비 만나고 집에 오자마자 밑그림 그려 봤거든. 그 느낌을 살려서. 근데 내가 가지고 있는 뻔한 교수의 이미지더라구.”
“그래서?”
“다 폐기했지 뭐. 프로페서라는 말이 교수를 뜻하는 거긴 해도 그 책의 주인공은 오라비잖아? 그러니까 오라비가 가진 이미지를 잘 살리는 방향으로 해야지.”
핑계처럼 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프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맥주캔을 하지은 쪽으로 내밀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건배를 했다.
민우는 다리를 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천장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가진 이미지라······ 쉬우면서도 뭔가 어렵네. 나도 내가 어떤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는지는 잘 몰라서.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
“솔직히 말하면 딱히 좋은 방법이 있는 건 아냐.”
“세상 참 쉽게 사는구만.”
“그런 거 아니거든? 아무튼,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오라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생각이야. 낯선 풍경에 놓인 그 순간이 대상의 본질을 발견하기에 좋을 거 같아서.”
낯선 풍경이라는 표현에서 민우는 잠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풍경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들어섰을 때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씨익 웃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괜히 송 실장님이 해외전화 하게 만들지 마시고.”
“흥. 원고 마감이나 잘하시죠.”
하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민우는 기지개를 켜고 다시 노트북을 끌어 당겼다. 차분한 타이핑 소리가 한동안 끊이질 않았다.
* * *
“장모님. 저희 왔습니다.”
최민식과 박민아가 집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과일 등 먹을 것이 잔뜩이다. 깜짝 놀란 민우의 어머니가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이니? 연락도 없이.”
“엄마 외로울 것 같아서 왔지. 민우 고 녀석이 독립해 버려서 심심하잖아.”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수빈이도 홀몸이 아닌데 같이 있는 게 좋지. 그런데 연서는?”
“시댁에 있어. 데리러 가는 중에 잠깐 들른 거야.”
민우의 어머니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 손녀였으니까.
“와, 울 엄마 서운한 표정 좀 봐. 데려오면서 들를 걸 그랬나?”
“아니다. 근데 뭘 또 이렇게 많이 사 왔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민아의 말이 맞았다. 민우가 독립한 이후로 허전했는데, 이렇게 찾아와 준 게 고마웠다.
과일과 먹거리를 냉장고에 정리한 어머니가 거실로 나왔다.
“저녁은?”
“아직입니다. 오랜만에 장모님께서 해 주신 집밥이 먹고 싶어서요.”
“마침 최 서방이 좋아하는 거 좀 해놨는데 잘됐네. 다 같이 먹으면 되겠어.”
“응? 엄마 아직도 저녁 안 먹고 있었어? 도와줄까?”
“일없다. 국만 데우면 돼.”
곧 세 사람은 식탁에서 도란도란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나와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마저 피웠다. 특히 최민식은 오늘 있었던 좋은 일에 대해 말했다.
“아니, 그럼 자네 이제 진짜 교수가 되는 건가?”
“예. 장모님. 오늘 연락 받았습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정교수로 강의하게 됐습니다.”
“아이구, 고생 많았네. 정말.”
민우의 어머니는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최민식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그때 민아가 끼어들었다.
“실은 그거 얘기하려고 집에 온 거야. 오빠가 전화보다는 엄마한테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맛있는 거 해놓을 걸 그랬구나. 미리 얘기 좀 해 주지.”
“아닙니다. 장모님. 오늘 저녁도 최고였어요. 마음 같아서는 매일 와서 먹고 싶네요.”
민우의 어머니는 이제야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대학원생이 얼마나 힘들게 공부를 하는지 잘 알고 있기도 했지만, 내심 민우만 잘 풀리는 게 아닌가 싶어 신경이 많이 쓰였었다.
“그럼 이제 집안에 교수가 두 명이나 있는 건가? 최 서방까지 해서.”
“곧 셋이 되겠지. 수빈이도 여기저기서 연락을 받고 있는 모양이더라. 아무튼 울 엄마 자식 농사는 잘 지었네. 인정.”
“내가 한 일이 뭐 있다니? 최 서방이나 수빈이나 알아서 잘한 거지.”
그렇게 운을 뗀 어머니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민아와 민식은 웃음을 거뒀다.
“왜 그래?”
“아니, 그게······ 너희 아버지가 이걸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서 말이다. 곧 민우도 결혼하는데. 사람 참 매정하지. 그렇게 먼저 말도 없이 떠나버리고······.”
“엄마도 참. 왜 갑자기 아빠 이야기는 하고 그래? 이렇게 좋은 날에.”
“좋은 날이니까 해야지.”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민우의 어머니는 거실 한쪽에 놓여 있는 남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켜둔 TV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쏠렸다. 앵커가 민우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 박민우 교수의 행보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소식이 왔는데요. 수단 정부와 아부다비문화재단에서 마련한 다양한 행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고 합니다. 자세한 소식은 김창기 특파원이 전하겠습니다.
곧 화면이 바뀌었다.
근사한 학교 건물 앞에서 개교식을 하는 모습이 잡혔다. 정장을 입은 여러 관계자들이 있었는데, 민우만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어 눈에 확 들어왔다.
화면이 바뀌고 편집된 또 다른 영상이 재생됐다. 민우가 연단에 서서 간이 연설을 하는 모습이었다.
「 배울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로 이러한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재단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물심양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그는 유창한 영어로 소감을 밝혔다. 편집된 영상이라 분량은 짧았다.
하지만 카메라는 민우의 행적을 계속 훑었다. 대한그룹의 정연주와 명일그룹의 하지은, 그리고 톱스타 허윤이 동행했음에도 카메라는 민우를 보다 비중 있게 다뤘다.
민우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강의도 했다. 그의 아랍어는 이제 막힘이 없었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짧게 담겼다.
이후로도 민우의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수단 정부 고위 관계자와의 회담을 시작으로 많은 활동을 펼쳤다. 구호활동에도 참여했다. 의학적 지식은 없지만 민우는 굶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제야 가족들은 민우가 왜 정장 대신 편한 옷을 입었는지를 깨달았다.
다음 뉴스로 넘어갈 때까지 민우의 가족들은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엄마. 민우 참 많이 크지 않았어?”
“아직 애지. 몸이 큰다고 다 어른이 되는 줄 아니? 너도 나중에 연서 보면 알 거다. 자식은 평생 가도 애처럼 보여.”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민아는 무릎을 감싸 앉은 채 새삼스러운 눈으로 TV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준비된 영상이 끝나고 민우와의 인터뷰 장면이 방송되고 있었다.
―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아서 좀 놀랐는데요. 오히려 실상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식을 나누는 일뿐이지만, 그것으로 어려움에 처한 많은 분들께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방금 인터뷰 내용을 가지고 누군가는 허풍이다, 립서비스다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민아의 생각은 달랐다.
어려서부터 또 다른 엄마 노릇을 해 왔던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이 가난이라는 운명에 실망하지 않고 꿋꿋이 노력했던 것을. 분명 그는 진심을 담아 저렇게 말을 한 것이리라.
어려웠던 순간들이 떠오르자 왠지 코끝이 찡해지며 눈이 촉촉해졌다.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민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민식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울어?”
“아냐. 눈에 뭐가 들어가서. 왜 이렇게 집에 먼지가 많아?”
그렇게 둘러댄 민아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동생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오랜만에 단둘이 소주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툴툴대던 동생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