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84화 (284/500)

284화 : < 101장. 프로페서 (4) >

민우의 연설 동영상은 천만 뷰를 넘어섰다. 주요 외신은 물론, 국내 방송사들도 그의 인터뷰 장면을 인용하며 세상에 널리 알렸다.

특히 외신의 포커스가 두드러졌다.

그들은 새로운 인본주의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과감한 평가를 내렸다. 조슈아가 몸담고 있는 가디언지는 민우를 ‘혜안을 가진 젊은 사상가’로 소개하며 그의 특집을 실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론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민우가 발표한 모든 저술이 일제히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논문은 물론 국경의 한계를 초월한 그의 번역 활동이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과 중국에 동시 출간된 민우의 번역이론서도 마찬가지. 7쇄 증판이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정부산하기관에서 ‘이달의 도서’로 선정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민우가 그간 차분히 쌓아왔던 것들이 때를 만나 큰 폭발을 일으킨 것.

그런데 민우의 일상은 변한 게 조금도 없었다. 그는 유명세에 취하기는커녕 서재와 연구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지식을 쌓기에 바빴다.

그렇게 찾아온 또 다른 아침.

“슬슬 가야겠네.”

민우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 이제 학교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집에서 청문대까지는 30분이면 족하다. 차로는 한 시간이 걸리는데다 책을 볼 수 없어 민우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민우가 뒤따라 나오는 수빈에게 물었다.

“맞다. 오늘 오후에 병원 다녀온다고 했었지?”

“응. 검진일이라서. 나 걱정은 말고 잘 다녀와요. 어머님이 같이 가 주신다고 했으니까.”

“엄마랑? 불편하지 않으려나.”

“하나도 안 불편해요. 어머니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시는데. 가끔은 예비며느리가 아니라 딸이 된 것 같다니까요.”

“그정도로?”

민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이었다. 평생 자신과 누나를 위해 헌신해 온 어머니인데 남의 귀한 자식을 함부로 할 리가 없다.

민우가 물었다.

“근데 이따 학교 나올 거야?”

“오늘은 패스. 어머님이랑 영화 보러 갈 거예요. 저녁도 맛있는 거 먹을 거고.”

“와······ 영화까지?”

내심 고마웠다. 시어머니와 어울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다, 그녀도 공부와 강의 준비로 바쁠 텐데 시간을 낸 거니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민우는 조금 심술이 나 한마디 했다.

“영화 본 지 되게 오래 됐는데 나는 누구랑 보나.”

“내가 가자고 했을 때 못 갔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바빠서 시간 못 내잖아요. 이번 주말엔 아프리카 갈 거고. 갔다 와서 자서전 출판 준비할 거고. 또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도 있고. 또······.”

“알았으니까 그만.”

“맨입으로?”

되로 주려다 말로 받은 꼴이다. 한숨을 내쉰 민우는 수빈에 볼에 키스했다. 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지만, 이내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고야 만다.

“아! 맞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요.”

이수빈이 조심조심 냉장고로 뛰어갔다. 그녀는 무언가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더니 쇼핑백에 넣었다. 그리고 그걸 민우에게 건넸다.

“이거 연구실에 가서 타 먹어요. 맨날 커피만 마시지 말고.”

“이게 뭔데?”

“레몬청.”

안 그래도 요즘 목이 칼칼하니 감기가 오려나 싶었다. 마침 딱 필요한 물건을 받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속이 비치는 병을 꺼내 안을 살펴보았다. 얇게 썰린 레몬이 맛있게 담겨 있었다.

“이야. 역시 우리 이 선생이야. 언제 이런 걸 다 만들었어?”

“저번 주에요. 생강도 좀 넣었고 숙성 잘됐으니까 맛있을 거예요. 선심 쓴다며 조교들 나눠 주지 말고 오빠 혼자 다 먹어요.”

“알았어.”

“그게, 조교들 거는 아직 숙성 안 됐으니까 내일 모레쯤 줄게요.”

민우는 웃었다. 그녀 성격에 조교들을 빼놓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우는 쇼핑백을 소중히 받아들고는 집을 나섰다.

‘날씨 좋네. 따뜻하다.’

기분 좋은 햇빛이 쏟아졌다. 이제는 외투를 입지 않아도 좋을 만큼 날씨가 풀렸다. 돌담 위로 솟은 덜 익은 꽃망울을 살피며 길을 걸었다.

출근시간이다 보니 지하철역에 사람이 많았다.

때마침 도착한 지하철에 몸을 실은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강의 노트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책은 좀 번거로워서 이동하는 도중엔 이렇게 공부를 하곤 한다.

‘오늘 강의는 한국현대소설의 이해. 전공기초 과목이니까 지식보다는 전공 자체에 흥미를 유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준비를 해보자.’

그런 생각으로 핸드폰에 메모해 둔 자료를 읽어 나갔다.

약 30분 후, 청문대역에 도착한 민우는 역에서 올라와 바로 인문관을 향해 걸었다. 정문에 들어서니 멋지게 조경된 캠퍼스에 상쾌한 봄이 화폭처럼 펼쳐졌다.

민우가 잠시 멈춰서 그 풍경을 감상할 무렵, 몇몇 학생들이 그를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방송 잘 보고 있어요.”

“자서전 출판하신다고 들었는데 언제쯤 나와요?”

“저······ 교수님 강의 청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몇몇 학생들이 알은척을 했다. 이제는 너무 유명인사가 되어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이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방송 잘 봐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자서전은 이달 말쯤에 출간될 거예요. 청강은 강의 시간에 오면 같이 이야기 해보죠.”

시간이 좀 지체되긴 했지만 민우는 면식도 없는 학생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학생들과 헤어진 민우는 잠시 시계를 확인했다. 강의 시작까지는 30여 분이 남았다.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것 같은 그런 봄이네. 이번 학기에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아득한 기대감을 가슴에 품으며 민우는 연구실 문을 열었다. 믿음직한 두 조교와 새로 채용된 연구보조원 하나가 반갑게 민우를 맞았다.

* * *

강의 시간이 다가왔다. 민우는 연구보조원으로 일하게 된 차민재와 함께 전공 강의실로 움직였다. 두 사람의 손엔 복사물이 잔뜩 담긴 백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수업 들어보니 어때?”

“확실히 상아대하곤 좀 달랐어요. 다들 공부를 많이 한 티가 나더라고요.”

“여기도 그렇지만 명인대나 한일대는 또 달라. 수준이 높지. 그러니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다. 이 바닥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보다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남는 곳이라는 거 명심해.”

“예, 선생님.”

“그거 나한테 주고.”

차민재는 들고 있던 백을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는 양손에 백을 들고 앞문 쪽으로 들어갔다.

민우는 자연스레 학생들과 인사하며 강단에 섰다. 전공기초 과목이라 대부분 1학년 신입생들이었다. 교외 오리엔테이션에서 친해진 것이 좋은 수업 분위기 조성에 한몫했다.

백을 한쪽에 내려놓고 출석을 불렀다. 결석은 없었다. 민우는 바로 교재를 펴고 수업에 들어갔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문학과 저널리즘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일제강점기 전부터 문학은 저널리즘과 깊은 관계를 맺었죠. 신문은 물론 잡지까지. 연재소설, 그리고 사설과 각종 볼거리들이 문학의 한 축을 담당하던 시기였습니다. 교재 32페이지를 펼쳐 볼까요?”

수업은 늘 수평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학생들의 날선 질문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이끌었다.

1900년대 초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문인들의 활동, 그리고 문학의 위상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민우는 강의를 10분여 남기고 교재를 덮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수업 끝내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해야겠네요.”

민우의 말에 학생들의 눈이 빛났다. 대학 강의에서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몇 개 없으니까.

“다음 주 월요일, 수요일 강의는 모두 휴강입니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가 아프리카로 출장을 가게 됐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휴강이라는 단어만큼 달콤한 게 또 있을까. 1학년 신입생들에게.

하지만 그들은 민우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보강을 해야겠는데요. 일요일은 좀 그러니 토요일이 무난하죠?”

“토, 토요일이요?”

“안 돼요! 그냥 쉬어요. 제 주말은 소중하단 말예요!”

처음엔 애교 섞인 항의를 보내다 이제는 민우를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우는 웃을 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소란이 가라앉을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피치 못한 사정이라고 해도 휴강된 강의는 보충을 해야 합니다. 학칙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비싼 등록금을 냈는데 강의 두 번이나 빠지면 내가 미안해서 안 되기도 하고.”

“안 미안하셔도 되는데.”

“맞아요. 서로 쉬면 좋잖아요. 네에? 교수님도 많이 바쁘시기도 하구.”

맨 앞자리에 앉은, 민우와 꽤 친하게 된 두 여학생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하지만 민우는 무덤덤한 표정이다.

“어느 형태로든 보강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과제만 툭 내주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같고······ 음. 여러분이 논리적으로 날 설득한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죠. 자, 얘기해볼 사람?”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다들 서로 눈치만 볼 뿐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하나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 주인공은 차민재였다.

“민재 형! 형이 나설 타이밍이야!”

“오빠 파이팅!”

민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그가 민우와 어떤 사이인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제는 교외 오리엔테이션 술자리에서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거친 토론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기대를 할 수밖에. 동기들의 염원이 섞인 뜨거운 눈빛에 차민재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민재 학생. 이야기 해봐요.”

“우선······ 오프라인 보강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이라. 이유는?”

“학생들은 주중에 수업을 듣습니다. 그 외의 시간은 아르바이트나 과외, 취미활동으로 보내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모든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몇몇은 목이 빠질 것처럼 거세게 끄덕였다.

“그런 이유로 별다른 합의 없이 토요일로 보충수업을 결정하는 건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토요일 보충수업에서는 출석체크를 하지 않겠습니다. 중간고사에 영향을 주는 내용도 다루지 않을 거고. 어때요?”

화끈한 딜에 학생들이 동요했다. 출석 체크도 하지 않고 시험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보강을 해도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민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던 학생들이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제일 가까이 있던 남학생이 민재에게 속삭였다.

“형. 이제 됐어요. 출첵 안하니까 알았다고 하면 끝입니다. 고생하셨어요.”

“아니.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예?”

민재가 다시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락했다.

“생각해보니 선생님의 조건은 저희들에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습니다. 출석체크를 안 한다고 하면 아무도 안 올 테니까요. 수업료만 낭비하게 되겠죠.”

“그런 부작용이 있긴 하겠지.”

“대신 논문을 읽고 요약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선생님이 작년에 발표하신 <근대소설의 형식과 특수성>이라는 논문이 적당할 것 같은데······ 제가 읽어 봤는데 우리 수업하고 연관이 많아 보이더라고요. 예습한다고 치면 될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다.”

그렇게 맞장구친 민우는 한쪽에 내려둔 종이백 두 개를 빈 책상 위에 올렸다.

“이런 우연이 있나. 공교롭게도 오늘 그 논문을 복사해 왔는데 잘됐네요. 하하하. 지금 나눠줄 테니까 한 부씩 나눠 가져요.”

학생들은 얼떨결에 민우가 나눠주는 논문 복사본을 받았다. 2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논문이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핑핑 돌았다.

“다음 주 금요일 밤까지 메일로 요약해서 보내면 되겠습니다. 단순히 요약만 하면 안 되고 질문을 두어 개 만드세요. 몇 개 추려서 다다음주 수업 시간에 풀이를 하겠습니다. 다들 알았죠?”

“네······.”

“그럼 수업은 이것으로 모두 마치겠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싱긋 웃은 민우는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섰다. 마침 뒷문 쪽에서 차민재가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어차피 목적지는 같은 곳이었으니까.

“수고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신기하네요. 애들이 그렇게 나올 줄 어떻게 아셨어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나는 그런 때 없는 줄 알았어?”

“휴······ 당분간 과실은 안 가는 게 좋겠죠?”

피식 웃은 민우는 민재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며칠 후, 민우는 아부다비문화재단에서 보낸 전용기를 타고 출국했다. 목적지는 중동과 인접한 아프리카,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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