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 < 101장. 프로페서 (3) >
「 사실 폴라리스가 이렇게 거대한 단체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신 분들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기분이 드네요. 하고 싶은 걸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 잘 풀려서 기분이 좋습니다. 정말로. 」
짝짝짝짝―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국내 연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들은 민우가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물론 민우도 해외 무대에 서 본 일이 많아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겪는 것은 언제나 짜릿한 일이었다. 가슴이 격동했고, 어조에는 젊음과 열정이 실렸다.
「 물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폴라리스의 궁극적인 모습은 감히 저도 상상할 수가 없네요. 지금까지 우리는 장애물 하나 없는 순탄한 길을 걸었습니다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여러 사업을 하게 될 거니까요. 」
민우가 잠시 말을 끊고 연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회원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의 앞에 선 채로 그가 말을 다시 이었다.
「순항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대감과 목적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유대감은 만들기 어렵지 않습니다. 폴라리스의 커뮤니티, 그리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가 우리의 유대감을 강하게 해줄 테니까요. 하지만 목적의식은 조금 다릅니다. 어쩌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다를지도 모르죠. 우리가 폴라리스에서 하려는 모든 일이 우리의 목적의식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겁니다. 좋든 그렇지 않든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
민우가 의문을 던지자 화면에 프레젠테이션이 펼쳐졌다.
그가 늘 내세웠던 하나의 기치(旗幟). ‘공동의 지식과 교양’이라는 문장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화면 하나를 꽉 채웠다.
청중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그 모습은 각기 달랐다. 감탄하는 사람도, 만족하는 사람도, 고민에 잠기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웃었다. 그 웃음엔 여유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 우리는 노동자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식 노동자쯤에 속하겠지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데요.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 걸까요? 」
팔을 넓게 벌리는 제스처와 함께 질문을 던진 민우는 관객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민우가 손가락을 들며 강조하듯 말했다.
「 저는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들이 우리 사회가, 우리의 문명이 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우리의 활동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것이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낼 겁니다. 앞선 수많은 명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
민우가 담담히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서며 박수를 쳤다. 기립박수였다. 한쪽에 몰려있던 기자들이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그것은 초대석도 마찬가지였다.
김강현 장관을 포함한 모든 국내외 귀빈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한편 연주는 조금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특별강의실 맨 뒤쪽으로. 마침 청문대 취재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예전에 민우가 동경대에서 강연을 할 때 동행했던 사람이었다.
취재팀장은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현재 민우의 연설을 포함한 폴라리스의 모든 총회 내용은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생중계되고 있었다.
“팀장님!”
그때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던 직원 하나가 취재팀장에게 보고했다. 깜짝 놀란 취재팀장이 연주에게 입을 뻥끗거리며 수신호를 보냈지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취재팀장이 핸드폰을 가리키더니 뭔가를 적어 보냈다. 곧 연주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연주는 핸드폰을 꺼내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실시간 시청자수가 100만이 넘었다는 보고였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연주는 다시 고개를 들어 민우를 두 눈에 담았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네요. 오빠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를 영입할 때 상아대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민우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겠다고. 그녀의 계획은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특별강의실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박수는 끝날 줄을 몰랐다. 시계를 한번 확인한 민우는 안 되겠는지 두 손을 들어 양해를 구했다.
「 죄송하지만 조금 더 이야기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중요한 게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
실내가 조용해지자 화면이 바뀌었다.
여러 사진을 하나로 모은 슬라이드였다. 건설이 완료된 학교의 모습과 임시 교사(校舍)에서 인터넷을 하는 여러 흑인 어린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민우는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 우리는 앞으로 아부다비문화재단과 함께 다양한 교육사업을 펼칠 겁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아프리카 낙후 지역에 학교를 세울 수도 있고,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지식창고를 만들 수도 있죠. 올해 하반기엔 누구나 접속이 가능한 온라인 스쿨도 오픈할 예정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은 물론 각종 예술과 자연과학, 공학, 천문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익힐 수 있는 멋진 공간이 될 겁니다. 」
슬라이드가 넘어가며 민우와 알 카흐파 의장의 계획이 공개되었다. 기자들은 사진을 확보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회원들은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렇게 민우는 앞으로의 로드맵을 모두 발표했다. 폴라리스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었다.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모든 슬라이드가 끝났다. 스크린이 암전되었고, 민우는 한 발자국 더 걸어 나오며 마무리했다.
「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그런 거창한 계획은 아닙니다. 저는 일개 교수이고, 학문을 하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저도 잘 압니다. 세상은 한 개인이 바꿀 만큼 그렇게 만만하지 않죠. 실제로 가끔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거 해서 뭐해? 그런 거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맞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
민우가 천천히 연단을 거닐기 시작했다. 조명이 민우가 가는 방향을 비추었다. 곧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다시 청중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아이작 뉴턴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식은 무한한 바다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전진할수록 우리 앞의 광막한 세계가 더욱 넓어질 뿐이라고. 이 한마디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도 이와 비슷하고요. 즉, 이 세상에는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해변의 모래처럼 일부분에 불과하고,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즐거움이 너무나 좋죠. 이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게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입니다. 단순하지만 많은 걸 바꿀만한 큰 힘이 되겠죠. 자, 제가 준비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민우는 의문문으로 연설을 마쳤다. 그가 던진 마지막 질문은 거대한 박수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 번째 기립박수가 시작됐다.
* * *
준비된 식순이 모두 끝나고 연회가 열렸다. 회원들끼리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양한 핑거 푸드와 차가 준비되었다.
하지만 민우는 아직 일이 좀 남았다.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 지원금 규모나 협력사업 등 민감한 질문들이 많이 나왔는데, 민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성실히 답했다.
반면 해외의 유명한 언론들은 정치경제적인 문제보다 민우와 폴라리스의 향후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가디언지 기자 조슈아를 필두로 수많은 기자들과 뜻깊은 질의응답 시간을 보냈다.
기자회견이 끝나니 약간 지쳤다. 하지만 민우는 표정을 펴고 연회장을 찾았다.
“박 교수님.”
“어? 아직 안 가고 계셨습니까? 오늘 다른 일정도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김강현 장관이었다. 그가 제일 먼저 민우를 찾아와 악수를 청했다.
“좋은 자리에 설 기회를 주셨는데 인사라도 드리고 가는 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정말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나도 그런 쪽으로는 자신이 있었는데 많이 배웠군요. 하하하.”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이죠. 모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민우가 초대한 것은 아니었다. 문광부 담당자와 일정을 조율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문광부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다른 사람이 섰을지도 모른다.
몇 번의 인사치레가 끝나고 김강현 장관이 은밀히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말해 박 교수가 정치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모로 코드가 잘 맞을 것 같은데. 어때요? 여당에서 몇 번 제안이 간 걸로 알고 있는데.”
“글쎄요. 아무래도 정치는 저와 잘 안 맞아서요.”
“어디가?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면서 말입니다. 박 교수는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꽤 유리할 텐데요.”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현대 정치에는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입법의 방향성도 모호하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쪽으로는 활동하지 않을 겁니다.”
“그거 아쉽군요.”
에두른 비판이었지만 김강현 장관은 그다지 불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웃으며 민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돌아가기 직전 그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곧 VIP께서 박 교수를 찾으실 겁니다. 오늘 스트리밍 방송을 지켜보신 모양이더군요. 모쪼록 기회 잘 잡으시길.”
“예?”
처음 민우는 VIP가 누군가 싶었다. 그러나 답은 간단했다. 장관급 인사가 VIP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때 서강일이 다가와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조심스럽게 해? 김강현 장관님 아니었나?”
“맞아. 뭐 그냥 뭐 뻔한 말이지.”
“아직 포기 안 한 거야? 독한 양반이네. 아무튼 고생했다. 연설 아주 기가 막히더라. 방송도 잘된 거 같고.”
“고생은 네가 더 했지. 근데 메로나양 평은 어때?”
“딱 한마디 하더라. 예전 인문학 공모전 본선 무대가 떠오른다고.”
그제야 민우는 안심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강민희가 호평을 했다면 분명 잘된 것이리라.
민우가 물었다.
“뷰는 얼마나 나왔냐?”
“200만 넘었어. 국내 시청자보다 해외 시청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하더라. 국내 반응이 좀 아쉽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큰 의미는 없을 거 같고.”
민우는 활짝 웃었다. 당초 예상했던 것은 50만 뷰였다. 200만이면 매우 긍정적인 숫자였다. 앞으로 누적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해외 사업이니까 아무래도 관심 밖이었을 거야. 국내 사업은 따로 준비해 보자고.”
“오케이.”
“오늘 끝까지 있을 거냐?”
“그래야지. 너한테 괜히 책 안 잡히려면.”
“핑계는. 무리하지 마라. 너 곧 학회에서 발표한다며.”
“누가 피드백을 잘해준 덕분에 한 시름 놨지.”
씨익 웃은 서강일은 민우의 팔을 툭 치고 갈 길을 갔다.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초대손님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웃으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제임스 편집장은 가끔 봤지만, 아틸라이 캐머런 회장과 페데리코 산치스 학장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민우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 박 교수! 이거 정말 오랜만이군요. 2년 만이던가요? 」
「 아마 그럴 겁니다. 」
아틸라이 회장이 반갑게 맞았다. 제임스는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한번 슥 들어보였고, 산치스 학장은 민우와 악수를 했다.
「 인사가 늦었습니다. 먼 길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
「 먼 길은 무슨. 이런 일이 있어야 바람도 쐬고 하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산치스 교수. 」
「 핵심을 잘 짚으셨군요. 맞습니다. 변덕스러운 영국 날씨는 가끔 사람을 지치게 하는 법이니까요. 」
미국과 영국에서 온 두 거물은 금방 의기투합을 했는지 서로 대화를 잘 주고받았다. 당연히 중개는 제임스 편집장이 했다.
아틸라이 회장이 말했다.
「 이번 연설은 꽤 이슈가 될 거 같더군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제가 박 교수에게 했던 평이 있는데······ 큰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다고 한 거 말입니다. 」
「 아, 그거. 기억나네요. 」
처음 IAHS에 참석해서 아틸라에 회장에게 자신의 강연을 평가해 달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틸라이 회장이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회상했다.
「 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2년 만에 나름 해답을 찾아냈군요. 박 교수의 무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여름 국제 학회에 좀 와주실 수 없겠소? 」
「 가는 거야 문제가 없죠. 」
「 그냥 말고. 키노트 스피커로. 」
2년 전, 석사 3학기 시절에는 학생 신분으로 초청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새 지위가 바뀌었다. 기조연설자로. 민우는 작은 감격을 느끼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