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 < 101장. 프로페서 (2) >
다음 날, 민우는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청문대로 향했다. 평소라면 레아의 차를 이용했겠지만 오늘은 현장 지원을 보냈다. 손님들이 그만큼 많이 왔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민우는 폴라리스 연구실로 바로 올라왔다. 역시나 몇몇 낯선 인물들이 연구실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있었다.
“박민우 교수님!”
누군가 외치자 기자들이 먹이를 발견한 눈으로 민우에게 달려들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민우는 멈춰선 뒤 차분히 그들을 맞았다.
셔터 눌리는 소리와 함께 녹음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오늘 열리는 총회에 대해 간단히 한 말씀 해주시죠!”
“정부의 지원 계획이 밝혀졌는데 그 규모가 미지수입니다. 구체적인 액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이번 프로젝트에도 대한그룹이 참여합니까?”
질문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모두 예상 범위 내에 있는 질문이었지만 민우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총회 준비 때문에 바빠서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으니 양해를 좀. 질문은 이따 기자회견 시간에 받겠습니다.”
“박 교수님! 잠깐만요.”
기자들이 앞길을 막았다. 민우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번 총회는 세계적인 행사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회원들이 찾아왔어요. 개인적으로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협조 좀 부탁드려요.”
민우는 온화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기자들은 눈치가 빨랐다. 그 웃음 속에 감춰진 경고를 분명히 읽은 것이다. 이러다 기자회견장에 출입하지 못하게 된다면 큰 낭패다.
그들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막혔던 길이 뚫렸다.
“저······ 그럼 박 교수님. 이따 회견장에서 뵙겠습니다. 그때 말씀 많이 좀 부탁드립니다. 질문할 게 워낙 많아서요.”
“기자님들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민우는 그제야 연구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안에는 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이다혜와 남희석 두 조교는 총회에 사용할 영상물과 프레젠테이션을 점검하고 있었고 레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다들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좋은 아침.”
“어서 오세요! 아차, 남희석. 방금 본 거 3분 20초로 돌려봐. 그래. 옳지. 거기 자막 싱크 좀 안 맞지 않아?”
“어? 그러네요. 근데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닙니까? 살짝 안 맞는 것뿐인데.”
“차이는 디테일에서 나오는 법이라고.”
“예예. 자······ 이제 됐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영상물을 돌렸다. 어긋나 있던 싱크가 딱 맞게 제자리를 잡았다.
그 비슷한 광경이 몇 번 반복됐다. 그런데도 민우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조교들도 민우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문제점을 파악했고 해결 방안을 찾으려 노력했다.
함께 일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나의 성숙한 생태계처럼 연구실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민우는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총회 당일이라 여러모로 긴장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희석아. 특별강의실 쪽 준비는 어때?”
“장비 세팅 모두 끝났다고 시설과에서 연락 왔습니다. 이제 우리 쪽 자료만 체크하면 됩니다.”
“좋아. 마지막까지 잘 부탁한다.”
“네!”
두 조교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총회가 중요한 것은 민우만이 아니었다. 폴라리스의 어시스턴트이기도 한 두 사람에게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뜻깊은 경험이 될 일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채근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했다. 말 그대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좋은 징조야. 녀석들도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겠지. 이런 게 제자 키우는 맛인가? 꽤 달콤하네.’
책상으로 걸어가는 와중에 레아가 묵례했다. 민우는 괜찮다며 손을 들어보였다. 그녀는 영어로 계속 통화를 했고, 민우는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와중에 이다혜가 인쇄물을 하나 들고 빠르게 다가왔다.
“이번 총회 참석자 확정 명단이에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박사님께 건강상의 문제로 불참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나머지 회원 분들은 모두 입국하신 걸 확인했습니다.”
“안 그래도 어제 연락 왔었어. 러시아 감기가 꽤 독한가봐. 푹 쉬라고 말씀 드렸다.”
“박사님께는 오늘 총회 녹화본을 따로 보내드리는 게 좋겠죠?”
“좋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회 영상 자료는 폴라리스 홈페이지에 게시될 예정이었지만, 따로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혜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곧 전화를 끊은 레아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단정한 자세로 보고를 시작했다.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녀의 마지막 말이 조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제 사견이긴 합니다만 김강현 장관님의 의전을 좀 보강해야 하지 않을까요? 청문대 본부에서도 별다른 이야기가 안 나와서요. 한국은 의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들었습니다.”
“의전을요? 으음, 복도에 레드카펫이라도 깔라는 말씀인가요?”
“그런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걱정할 것도 없고.”
민우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레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 미소는 그 부분에 대해서 이미 생각을 끝냈다는 의미다.
“레아 씨는 이번 총회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죠?”
“당연히 매니저님이시죠.”
“아뇨. 틀렸어요. 저도 아니고 장관님도 아니고 총장님도 아니죠. 바로 오늘 총회에 참석하는 회원들입니다. 폴라리스를 지탱하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그분들이거든요.”
민우는 이다혜가 놓고 간 참여 회원 목록을 훑었다. 친근한 이름들이 많이 보였다. 오늘을 계기로 모든 이름이 친근해지길 바랐다.
그 마음을 담아 민우가 말했다.
“초대석 하나 마련해 드린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폴라리스 회원 분들께 다른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요. 막말로 제가 정치를 할 것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네요.”
“아뇨, 전혀요. 그만큼 레아 씨가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충분히 꺼낼 수 있는 문제죠.”
“매니저님.”
면목은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민우의 옆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만큼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시침이 숫자 3을 가리킬 무렵, 폴라리스의 첫 총회가 거행되었다.
* * *
청문대 특별강의실은 최신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안락한 좌석은 물론 다양한 시청각기기와 동시통역기도 설치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사람들로 복작였다. 한국인보다 외국인들이 훨씬 많았다.
초대손님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김강현 장관, 청문대의 박자희 총장, 그리고 정연주 이사가 있었다. 여기에 아부다비석유투자회사의 자얀이 알 카흐파 의장을 대신하여 자리했다.
폴라리스와 민우의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센트럴북스의 제임스 마렛 편집장, 그리고 국제인문학회(IAHS)의 아틸라이 캐머런 회장, 소아즈(SOAS)에서 인연을 맺은 페데리코 산치스 학장도 자리했다. 그밖에도 크고 작은 인연들이 초대석을 채우고 있었다.
한편 민우는 맨 앞자리에 앉았다.
특별석에 앉는 게 어떠냐는 주변 사람들의 제안이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설립자이자 대표이긴 해도 자신도 다른 회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 선생. 장관님이 별말 없으셨어? 의전 완전 허술하던데. 이러다 너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거 아냐? 그쪽 부처가 블랙리스트에 일가견이 좀 있잖냐.”
“그거 3년 전에 유행했던 거잖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지금도 있을지 누가 알어.”
서강일이었다. 그는 캐주얼하게 입은 민우와는 달리 슈트로 무장했다. 원체 인물이 좋아 시상식에 나온 배우 같은 느낌이었다.
“싱거운 소린 그만하고 앉기나 해. 곧 시작하겠다.”
“웃샤! 그럼 이제부터 좀 즐겨볼까?”
곧 사회자가 무대에 오르고 총회 개막을 알렸다. 스크린에 영상물이 재생되었고, 마지막으로는 폴라리스 로고로 고정되었다.
심플한 영상인데도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박수가 쏟아졌다. 민우도 박수를 치며 서강일에게 말했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너 아니었으면 어쩔까 싶었네. 괜히 바쁘다는 핑계로 일만 미루고.”
“핑계인 거 알면 됐어. 그리고 뭐 솔직히 말하면 내가 무작정 희생하기만 한 건 아니다. 나도 꽤 얻는 게 있었으니까.”
“뭘 얻었는데?”
“대학에서의 입지? 요즘 우리 대학에서도 폴라리스가 화두거든. 내가 너랑 친하다는 걸 아니까 보이지 않는 어드밴티지들이 좀 생겼지. 적어도 밥 안 굶고 다니게 됐다.”
“그거 잘됐네.”
민우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오프닝 세리머니가 시작됐다.
조명이 김강현 장관을 비추었다. 사회자가 그의 이력을 소개하자 환하게 웃은 김강현 장관이 손을 흔들며 연단에 올랐다.
곧 그의 일장연설이 시작됐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했는지 몸을 뒤척이던 서강일이 신호를 받는 척 슬쩍 자리를 떴다.
그런데 바로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 다음 대선 주자는 미스터 김인가요? 무슨 연설을 출마의 변처럼 열심히 하시네. 확실히 자기 몫은 챙기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네요. 그래, 정치는 저렇게 해야지. 」
전형적인 영국식 영어였다. 고개를 돌린 민우가 깜짝 놀랐다.
「 조슈아 씨! 언제 왔어요? 」
「 조쉬라고 부르라니까요. 」
「 아, 미안해요. 」
「 하하하. 여전하네. 민우 씨는. 잠시 볼일 좀 보느라 늦었네요. 하마터면 취재 못할 뻔했어요. 」
「 다행이네요. 그런데 사진은 안 찍어도 돼요? 」
「 필요한 건 다 찍었어요. 그리고 헤드라인에 내보낼 중요한 사진은 이미 준비해 둔 터라. 」
「 뭔데요? 」
카메라를 든 조슈아가 사진을 뒤지기 시작했다. 꽤 오래전 사진인지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곧 그의 입에서 ‘빙고’가 들렸다.
「 이 사진은······. 」
「 맞아요. 폴라리스가 시작된 역사적인 순간이죠. 」
민우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도 잘 아는 사진이었다.
바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시상식 때 찍은 사진이었다. 수상 소감 도중 민우가 이메일 주소를 적은 종이를 펼쳐 보였던 그 순간을 정직하게 담고 있었다.
민우는 기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조슈아의 설명은 정확했다. 사진이 담고 있는 바로 그 장면 덕에 폴라리스가 결성되고 총회까지 열 수 있게 되었으니까.
「 이 사진이 메인에 실릴 겁니다. 그리고 오늘 총회 사진이 옆에 나란히 실리겠죠.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하는 흔한 기법입니다. 하지만 두 사진이 품고 있는 의미는 특별하죠. 」
「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 당신의 작은 용기가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겁니다. 」
박수가 울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잠시 착각에서 깨어났다. 앞을 보니 김강현 장관이 꾸벅 인사하고 있었다. 오프닝 세리머니가 끝난 것이었다.
조슈아는 건성으로 박수를 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영국에 있으면서도 당신의 행적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 오해는 마세요. 관음증 환자는 아니니까. 아무튼 보고 있으면 참 뭐랄까, 기분이 묘해요. 가디언지에서 일하면서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봐 왔는데 그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이제 설립자의 연설 순서임을 알렸다. 동시에 스포트라이트가 민우 쪽으로 쏠렸다. 박수가 다시금 쏟아졌다.
「 왠지 오늘 연설을 들으면 그게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아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프로페서. 」
조슈아가 살짝 윙크했다. 미소로 화답한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단에 오른 민우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때까지도 박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게 폴라리스구나.’
민우는 무대를 천천히 둘러보며 자신이 뿌린 씨앗이 어떻게 싹텄는지를 확인했다.
한마디로 풍년이었다.
「 오늘······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오랜 소원을 이룬 것처럼 설레네요. 어젯밤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
민우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루카치의 만년필도, 그리고 연설 대본도.
말 그대로 그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하는 것을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 이상의 훌륭한 대본은 이 세상에 없었다.
생각을 꿈으로,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키는 사람이 바로 민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