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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81화 (281/500)

281화 : < 101장. 프로페서 (1) >

평소에도 그렇긴 하지만, 곧 서울에서 개최 예정인 폴라리스 총회 때문에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카페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에 앉은 민우는 메일 앱을 열어보고는 살짝 놀랐다.

‘잠깐 안 본 사이에 메일이 열 통이나 쌓였네. 어디보자······ 전부 폴라리스 회원들이구나. 하긴, 총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알 카흐파 의장의 협조 덕에 폴라리스의 첫 국제 총회는 청문대에서 열리게 되었다. 날짜는 3월 2일 토요일. 개최일이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회원들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었다.

최근 폴라리스는 주가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아부다비문화재단과의 협력 사업이 알려지면서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나마 매스컴 쪽 대응은 레아가 담당하고 있어 일 처리가 한결 수월했다. 만약 레아가 없었더라면 부담이 꽤 컸을 것이다.

아무튼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민우에게 있어 폴라리스 회원들은 가족처럼 느껴졌다. 같은 신념으로 뭉친 사람들이었으니까.

‘살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사귀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지.’

그런데 폴라리스는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전 세계에 걸쳐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100명 가까이 가입해 있었으니까.

처음 시작할 때는 70여 명이었지만 지금은 수가 꽤 늘어 100명이 넘었다. 대외 교류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자문을 구하는 정부 기구와 출판사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중이다.

여기엔 한일대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는 서강일의 도움이 컸다. 그는 전면에 나서기도 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활약도 대단했다.

‘일단 답장을 하고 강일이한테도 연락을 해봐야겠다. 총회 준비를 너무 강일이한테만 맡겨 놓기만 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전화를 걸면 왠지 불평부터 쏟아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달래려면 아껴 뒀던 양주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끼이익―

눈앞에 버스가 멈춰 섰다. 청문대로 향하는 버스였다. 민우는 즉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뒷좌석에 앉은 민우는 해외 각국에서 날아온 연락에 하나하나 정성껏 답장을 했다. 그 이후에 서강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살아 있냐?”

― 누구 덕분에 죽지도 못하고 살아있네.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예상했던 대로 서강일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도 끝도 없었다. 민우는 웃으며 벨을 눌렀다. 곧 내릴 지점이었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 줘. 어차피 한 번 하고 말 것도 아니잖아. 앞으로 네가 폴라리스에서 굵직한 일을 해 줘야 하니까.”

― 다른 건 몰라도 시기가 별로야. 나 다음 달에 학회에서 발표 있다고. 아 참, 발표하니까 생각났는데 명인대 분위기는 어떠냐?

“무슨 분위기?”

― 그때 토론 말이야. 국제비교문학회. 이쪽에서는 난리라니까. 제자가 지도교수를 쓰러트렸는데 파장이 좀 컸겠어?

확실히 소란스럽긴 했다. 하지만 민우도 그렇고 서지훈 교수도 그 토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이미 흘러간 과거의 일이니까.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서 선생님.”

― 하, 뭔가 재수 없는데 틀린 얘기가 아니라서 더 재수가 없네.

“폴라리스 총회 때문에 상의할 것도 있으니 이번 주말에 한번 보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 다음 주에 교외 오티 가야 해서 시간이 없다.”

― 엉? 비전임 주제에 오티도 가?

“형이잖아.”

서강일은 부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학과 교수의 좋은 점 중 하나였다. 학생들과 유대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 이번 주말엔 연구실 안 나가니까 우리 집으로 와라. 빈손으로 오지 말고.

“안 그래도 좋은 거 하나 들고 갈 생각이다. 기대하고 있어.”

― 그 전에 내 논문 좀 봐주지?

“메일로 보내놔.”

― 대신 채워줄 수 있으면 내용 좀 채워주고.

“실없는 소리 하기는.”

민우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곧 메일로 서강일의 논문이 도착했다.

* * *

2월 말, 서늘했던 날씨가 점차 풀리며 연일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야외 활동을 하기 굉장히 좋은 날씨였다.

한국어문학 연구실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던 한진섭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날씨 한번 기가 막히네. 솔직히 이런 날엔 밖으로 드라이브 한번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일이나 하세요. 맨날 놀 궁리만 하네. 개강이 코앞인데 어떻게 하면 저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지?”

“경력자의 여유랄까? 하하하하!”

하지만 주예린의 반응이 시큰둥해 드라이브 계획은 접어야 했다. 진섭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시 창문을 닫았다.

돌아선 그의 시야에 민우의 모습이 잡혔다.

“근데 민우 넌 아까부터 뭘 그리 열심히 챙기고 있냐? 이사라도 가?”

오랜만에 캐주얼 차림으로 연구실에 온 민우는 노트북과 책 몇 권을 백팩에 넣고 있었다.

“오늘 교외 오티 가는 날이잖아. 10시에 출발이라니까 슬슬 준비해야지.”

“아하. 그래서 오늘 학교에 꼬맹이들로 복작였구만. 폴라리스 일도 그렇고 자서전 작업 때문에 한창 바쁠 때인데 고생하고 오겠다?”

“어쩔 수 없지. 학과장님 지시인데.”

그때 주예린이 끼어들었다.

“어쩔 수 없기는요. 어리고 이쁜 애들 잔뜩 본다는 생각에 신나지 않았을까? 학부 때는 매번 그랬거든요. 후배들 들어온다고 얼마나 신이 났던지~”

“야.”

“아주 그냥~”

민우가 무섭게 노려보자 흠칫 놀란 주예린이 모른 척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지만 민우도 더는 뭐라고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스캔들 같은 건 없었지만 왠지 약점 하나를 잡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국문과 학생회장이 민우를 모시러 왔다. 키가 훤칠한 남학생이었다. 민우도 몇 번 면담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준비 되셨습니까?”

“그래. 슬슬 가자.”

진섭과 예린이 연구실 밖으로 배웅을 나왔다. 진섭은 내내 부러운 표정이었다. 학과 교수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조심히 잘 다녀오셔. 뒷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올 때 선물 사오세요!”

“해외여행 가는 것도 아닌데 뭔 선물 타령이야? 연구실 잘 부탁한다. 수빈이 좀 잘 챙겨주고.”

“옙!”

민우는 학생회장을 따라 건물 밖을 나섰다.

커다란 학과 깃발이 곳곳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그 부근으로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쪽 운동장에는 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민우가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교내 오티 때 분위기는 어땠어? 내가 다른 일 때문에 참석을 못했네.”

“아주 좋았습니다. 참여율도 좋았고요.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긴데, 선생님께서 안 오셔서 서운했다는 말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예의상 하는 소리겠지. 그런데 이번 오티엔 신입생들 총 몇 명이나 가?”

“서른다섯 명 전원 참석입니다.”

“전부?”

“예. 모두 갑니다.”

학생회장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청문대 국문과 학생회가 출범한 이후로 교외 오리엔테이션에 전원 참석이라는 기록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신기하네. 예체대라면 몰라도 나 학부 때도 교외 오티엔 너덧 명 빠지는 건 기본이었는데.”

“아무튼 선생님께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입생 전원이 참석하는 의미 있는 행사니까요. 다들 기대가 큽니다.”

“그렇게 말하면 부담스럽잖아.”

물론 민우는 그 기록이 자신 때문에 세워졌다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대신 몇 가지 우려스러운 것들이 떠올라 물었다.

“요즘도 애들한테 술 많이 먹이나?”

“아뇨. 사발식 없어진 지 좀 됐어요.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고요.”

“사고 나지 않게 잘해.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나한테 바로 얘기하고. 특히 창문 단속 잘해라. 나 학부 때 술 취한 동기가 뛰어내리려고 한 적 있거든.”

아무래도 인솔자다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바로 민우의 책임이 되니까.

두 사람은 국문과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민우는 이미 교내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수업을 들은 적이 없는 학생들도 민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꺄! 교수님!”

“교수님. 같이 앉아도 돼요?”

“내가 먼저 찜했거든?”

민우는 문득 자신의 인기를 실감했다. 재학생과 신입생 할 거 없이 민우를 알아본 학생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그중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바로 상아대에서 인연을 맺은 차민재였다.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둬 국문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왠지 훌쩍 큰 느낌이네. 1년이 지났을 뿐인데.’

민우가 웃자 차민재도 미소로 화답했다. 밀린 이야기는 천천히 하기로 했다. 어차피 2박 3일 동안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어쩌다 보니 민우가 한 마디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국문과 구성원 모두가 민우를 주목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이창호 선생님께서 다치시는 바람에 제가 대신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오리엔테이션도 일종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무런 사고 없이 재미있게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왔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성인입니다. 각자 지성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네요. 자, 그럼 출발하죠.”

민우가 먼저 버스에 올랐다. 2학년 여학생들이 눈에 불을 켜고 민우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으나, 눈치 없게도 차민재가 먼저 끼어들었다.

“옆에 앉아도 돼요?”

“얼마든지.”

차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앉았다. 민우는 노트북의 전원을 켜며 물었다.

“어때? 다시 신입생이 된 기분이.”

“상아대에서도 한 번 다녀와서 그런지 별 감흥은 없어요.”

“재수생이라 안 갈 줄 알았더니 용케 용기를 냈네.”

“약간 겉돌았던 게 좀 후회가 되더라고요.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학과 생활 열심히 해볼 생각이에요.”

“잘 생각했다. 대학원 생각 있으면 학부 때부터 인맥 만들어 놓는 게 좋지. 같이 공부할 사람도 찾고.”

곧 버스가 출발했다. 민우는 자서전 원고 파일을 열고 집필을 시작했다. 벌써 100페이지 이상이 완성되어 있었다.

원고를 힐끔 바라보던 차민재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 폴라리스 연구실에 출근은 언제부터 하면 돼요?”

“개강날부터 해도 돼. 등본 같은 서류는 미리 제출하면 좋고. 연구실에 예쁜 누나 한 명 있지? 그 누나한테 주면 된다.”

‘예쁜 누나’라는 표현에 차민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가 한 명 있긴 했는데 그녀를 뜻하는 말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럴게요. 근데 논문 쓰시는 건가요?”

“논문은 아니고 책 원고다. 교외 오티는 원래 일정에 없었거든. 엉겁결에 따라가게 됐으니 짬짬이 써 놔야 해. 3월부터는 정신없이 바쁠 예정이라서.”

“어떤 책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자서전이야. 인문서 냄새가 나는.”

차민재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거기에 인문서 냄새가 난다니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는 민우의 노트북을 더 이상 힐끗거리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존경하는 사람의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민우는 무사히 교외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안색이 출발할 때와는 많이 달랐다. 피부가 푸석했고 피곤해 보였다. 목소리도. 마침 집에 있던 수빈은 달려 나와 민우의 짐을 받았다.

“얼굴 꼴이 말이 아니네. 별일 없었어요?”

“오티야 어느 학교든 다 똑같지. 술 마시고 게임하고 노래 부르고.”

“오빠도 노래 불렀어?”

“노래만 했으면 다행이게? 게임도 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그 와중에 원고도 썼어. 50장 더 채웠다.”

“와, 부지런도 하셔라.”

민우는 다른 교수들처럼 점잔을 떨지 않았다. 기왕 놀 거면 신나게 노는 게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출발하기 전 좋은 추억을 만들고 오자는 민우의 말은 실현되었다. 아마 이번 오리엔테이션은 학부 시절 내내 회자될 것이다.

“학교에선 별일 없었고?”

“응. 새로 온 표태진 선생님도 협조적이어서 일 잘 풀리고 있어요. 다음 주 금요일에 회의 겸 회식하기로 했으니 시간 비워 놔요.”

“알았어.”

대강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민우는 잠시 숨을 돌리고 서재에 앉았다. 푹 쉬고 싶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바로 내일, 청문대에서 폴라리스 회원 총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니까.

‘가디언지의 조슈아 씨도 취재를 온다고 했었지? 김강현 장관님도 오프닝 세리모니를 해주신다고 했고. 얼마나 큰 이슈가 될지 기대되네.’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총회 순서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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