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 < 100장. 새로운 도전 (3) >
한국문화교육원이라면 또 모를까, 아침부터 국문과 조교실에서 전화가 오는 일은 드물었다. 민우는 바로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문남기 조교입니다.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잠깐 통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무슨 일이야?”
― 다음 주에 잡혀 있는 교외 오리엔테이션 건으로 전화 드렸는데요. 그게······ 혹시 참석 가능하신지 해서 말입니다.
“어? 그거 이창호 선생님이 가시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 아까 이 선생님께 연락이 왔는데 주말에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허리를 다치셨대요. 그래서 못 가신다고 하시네요.
“이런. 조심 좀 하시지.”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한편으로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문대의 교외 오리엔테이션은 학생회에서 주도하는 행사다. 여기에 교수들이 한두 명 정도 참여하는데, 국문과에서는 주로 말단 교수들이 참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난 아직 비전임이잖아. 가도 되려나?’
그런 걱정이 문득 들었다. 민우는 문남기 조교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난 아직 전임이 아니라서 좀 부담스럽네. 보통은 전임 선생님들이 가잖아. 문 조교 생각은 어때? 청문대에 오래 있었잖아. 학부 때부터.”
― 초빙교수님들이 오신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국문과 선생님들 중에서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분이니 박 선생님께서 대신 가시는 게 오히려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 ······라고 학과장님께서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류재혁 학과장의 지시였다면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던 문제였다. 여기에 반전이 있을 줄이야. 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가라는 말씀이시네. 알았어. 내가 대신 가지. 참, 이 선생님 입원하거나 하신 건 아니지?”
― 예. 자택에서 요양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알았어. 그래도 한번 연락은 드려봐야겠다. 아무튼 이따 조교실에 잠시 들를 테니 그때 자세히 이야기하자.”
― 알겠습니다.
눈 깜짝할 새에 일이 하나 늘어버렸다. 그것도 2박 3일 일정으로. 전화를 끊은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학회 준비하느라 깜빡 잊고 있었네. 벌써 신입생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민우는 잠시 걸음을 멈춰 창밖을 내다보았다.
헐벗은 가로수들이 보였다. 하지만 곧 푸른 옷을 입고 새 생명의 싹을 틔울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봄이란 늘 그런 거니까.
* * *
청문대로 돌아온 민우는 이다혜, 남희석 두 조교와 함께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 관련 회의를 열었다. 마무리 작업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거 좀만 더 템포 올리면 교수님 결혼식 전까지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남희석이 테이블표를 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옆에 있던 이다혜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하지만 민우는 턱을 괴고 신중히 나섰다.
“반가운 말이긴 하지만 그 전까지 끝낸다고 생각하면 조바심에 실수를 하게 될 수도 있어. 4월 말까지라고 생각하고 작업을 하는 게 나을 거야. 검토 기간도 필요하니까. 무엇보다도 템포를 올리면 너희들만 고생이지. 악덕업주 소리는 듣기 싫다.”
그 말에 두 조교의 반응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남희석은 살짝 감동한 표정이었고, 이다혜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에이. 설마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수당도 잘 챙겨 주시는데. 우리 연구실만큼 대우 받는 곳 또 없을 걸요? 업계에 소문 다 났어요. 아카데미 동기들도 여기 오고 싶다고 난리들이고요.”
“그만큼 우리나라 연구 풍토가 열악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 분야를 막론하고 대개 연구원들의 희생에 뭔가가 이루어지니까.”
“듣고 보니 것두 그러네요.”
“그 얘긴 됐고, 원고는?”
“오전에 9권 지음사에 보냈어요. 바로 편집에 들어간다고 연락 왔고요.”
“좋아. 이제 딱 한 권 남았구나.”
딱 한 권.
그 한마디의 무게가 실감난 두 조교는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민우도 그랬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차분히 말했다.
“지금까지 너희들 모두 잘 해왔지만 마무리가 특히 중요해. 유종의 미라는 말도 있잖아. 우리들의 커리어에 오점이 되지 않도록,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알았지?”
“예!”
막바지라 조금 느슨해진 분위기를 다시 추스른 민우는 회의를 끝냈다.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리필해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탁상용 달력을 집어 2월과 3월을 번갈아 넘겨보았다.
‘자서전 작업은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네. 보름 정도로. 원고 넘기고 바로 아프리카 다녀오면 얼추 맞겠어.’
생각난 김에 바로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민우는 서랍에서 이면지를 꺼냈다. 그리고 루카치의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어떤 식으로 개요를 짜면 좋을까?’
아득했다. 마치 드넓은 평야 한가운데에 홀로 선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하지만 민우는 지혜로웠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민우는 저번 주에 있었던 술자리를 떠올렸다. 그때 송승현 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교수직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경험을 책으로 내보자고.
‘나름 드라마틱한 일들이 많긴 했지만······ 일반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은 아니야.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어필할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곤란해.’
자연스레 송승현 실장의 또 다른 말이 떠올랐다. 단순히 한 사람의 학문적 성공기가 아니라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거라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바로 그게 핵심 아닐까? 있었던 사실에 보편적인 의미를 하나씩 담아 보는 거. 읽는 사람들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해 볼 수 있는 내용이면 좋을 거 같아.’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우의 손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루카치의 만년필이 흰 종이 위를 거침없이 휘달렸다. 어린 시절부터 청문대에 임용이 된 순간까지의 일이 글자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민우가 손을 멈췄다. 펜을 내려놓고 완성된 목차를 훑었다.
‘이렇게 보니 좀 색다르네.’
생활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좋은 은사님들을 만났던 학창시절이 제일 앞에 놓였다. 그리고 상아대에서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어졌다.
학부시절 학문의 길을 선택한 순간과 명인대에 입학해서 학문적 동반자들을 만났던 일도 들어갔다. 지음사에서의 연구원 생활, 그리고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았던 일도.
그뿐이 아니다. 학문적 유산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었던 송현우 교수와의 일화, 그리고 TV출연을 포함한 각종 사회 활동과 해외 학술활동,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에 이르는 일대기가 망라되었다.
턱을 괸 채 면밀히 검토한 민우는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이.
‘이걸론 뭔가 부족한 느낌인데······.’
루카치의 만년필을 썼는데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생각에 깊게 빠져있어 그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고민은 잠깐이었다. 곧 민우의 두 눈이 총명하게 반짝였다.
‘그래! 인생의 참된 의미는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완성되는 법이니까, 거기에 좀 더 중점을 둬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민우는 다시 만년필을 들었다. 각각의 목차에 해당하는 이야기들 중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고향 친구들과 은사들, 그리고 307호 멤버들의 이름도 적혔고, 여러 국내외 유력 인사들의 이름도 들어갔다.
민우는 그 사람들과 만나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깨달았는지를 최대한 자세히 적었다.
적힌 이름만 100명이 넘었다. 그러다보니 이면지는 곧 검은색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그것도 부족해 민우는 이면지 두 장을 더 할애해야 했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드디어 펜이 멈췄다. 민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민우는 정리한 목차와 내용을 빠짐없이 컴퓨터로 옮겼다. 그러는 와중에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타이핑을 뚝 멈췄다.
‘아차차.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려나?’
달력을 확인한 민우는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전화번호부를 열심히 뒤적이기 시작했다.
* * *
“웬일이세요? 오라버니가 먼저 연락을 다 하고.”
하지은이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한적한 카페였다. 민우는 먼저 음료를 주문했다. 점원이 주문을 받아주는 곳이었다.
하지은은 홍차, 민우는 커피를 골랐다. 점원이 돌아가자 민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곧 미국 간다면서? 그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불렀지.”
“거짓말 하는 거 얼굴에 다 써 있네요. 매번 바쁘다고 노래를 부르는 양반이 갑자기 그런 이유로 부른다고? 말도 안 돼.”
민우는 머쓱하게 웃었다. 어떻게 하면 얼굴에 티가 안 나게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려 했지만, 맞은편엔 하지은이 있었다.
“보통 연주랑 같이 보는데 따로 부르니까 이상하잖아. 혹시······ 권태기?”
“미국식 농담이냐? 다른 건 아니고 너한테 부탁 좀 하나 하려고.”
“뭔데?”
아직 커피가 나오기 전이지만, 민우는 가방에서 인쇄물을 꺼내 하지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잘 볼 수 있도록 뒤집어서.
그것은 출판기획서였다.
“자서전 하나 내려고 얼마전에 출판계약을 했어. 특별한 책인 만큼 표지도 좀 특별하게 하고 싶어서 말이다.”
“아하! 그러니까 촉망받는 미술인인 내게 직접 디자인 의뢰를 하시겠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
“단가 꽤 비싼데? 감당할 수 있겠어?”
“회사에서 최대한 맞춰주기로 했으니 원하는 액수를 불러. 대신 현실적으로.”
하지은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원하는 액수를 쉽게 부르지 않았다.
민우 입장에서는 애가 탔다. 그는 하지은의 작품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그녀의 화풍으로 표지를 꾸미고 싶었으니까.
드디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캐시는 좀 시시하니까······ 품앗이는 어때?”
“뭔가 불안하다?”
“싫으면 말고.”
“은근 갑질에 소질이 있었네. 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줘야지. 원하는 게 뭐야?”
“전에 윤이한테 들었는데, 윤이 데리고 아프리카 간다면서?”
소문이 거기까지 갔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데려가 주면 그려줄게. 표지.”
“너 곧 미국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냥 쉬러 가는 거야. 미뤄도 상관없는 그런 시시한 스케줄이지.”
“정말 그거면 돼?”
“고럼 고럼.”
하지만 민우는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허윤은 촬영이라는 목적이 있지만 하지은은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네. 일단 받아들이는 걸로 하고. 납기일은 보름이야. 맞출 수 있겠어?”
“콜.”
“근데 아프리카엔 왜 가려고?”
“음······ 새로운 도전?”
그제야 두 사람이 시킨 음료가 나왔다. 하지은은 홍차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미술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하거든. 좋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그곳에서 시험하고 싶어. 언어도, 학력도 배경도 통하지 않는 황무지 같은 곳에서 말야.”
동질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문학과 미술, 외양은 많이 다르지만 말하는 건 결국 똑같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민우는 공감할 수 있었다.
“좋은 무대가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 성과는 우리 손으로 만드는 거니까.”
“그 말이 정답이네. 아무튼 오늘 돌아가는 대로 바로 재단에 이야기를 해 둘게. 한 명 정도 늘어나는 건 크게 상관없을 거야.”
“잘 부탁요.”
하지은은 민우의 출판계획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응? 제일 중요한 게 빠졌는데? 제목이 아직 안 나왔는데 어떻게 표지를 만들어?”
“아, 그거. 이리 줘봐.”
민우는 고민을 끝냈다.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출판계획서에 적힌 ‘제목 미정’에 줄을 긋고 새 제목을 써 넣었다.
다시 출판계획서를 돌려받은 하지은이 제목을 확인하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프로페서>라······ 제목 괜찮네! 벌써부터 뭔가 필이 팍 꽂히는 거 같아.”
“그 느낌 잘 살려 봐.”
“오케이.”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민우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전화는 물론 문자와 메일이 끊임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