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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79화 (279/500)

279화 : < 100장. 새로운 도전 (2) >

예상대로 회식은 길어졌다. 3차까지 명인대 사람들과 어울린 민우와 수빈은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한마디로 정말 유쾌한 자리였다.

서열이 분명한 대학원에서 교수와 함께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건 드문 일이다. 그래서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앗!”

신발을 벗던 수빈이 휘청거렸다. 민우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고마워요. 잠깐 정줄 좀 놨네.”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먼저 들어가라니까 말도 안 듣고 그래.”

“술 안 마셔서 괜찮을 줄 알았지. 그래도 이런 자리 정말 오랜만이잖아요. 앞으로 언제 또 있을지도 모르고. 재미있었어요.”

성공적으로 신발을 벗은 수빈이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보며 민우는 웃었다. 술 마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재미있긴 했어. 평소라면 다른 교수님들도 계셨을 테니까 그렇게 못 놀잖아.”

“민 선생님이 도중에 안 가셨으면 어쨌을까 싶더라니까요.”

“직장 회식 분위기였겠지. 그나저나 주님 통장에 스크래치 좀 났겠더라. 술도 고기도 잔뜩 먹었으니.”

“얼마나 나왔대요?”

“글쎄. 계산할 때 밖에 나가있어서 잘 모르겠네. 궁금하면 한번 톡으로 물어 보든가. 아무튼 먼저 씻어. 난 정리 좀 할게.”

“오 분만.”

“안 돼. 쉴 거면 제대로 침대에서 쉬어.”

“아잉~”

수빈이 귀엽게 앙탈을 부려봤지만, 민우는 그녀의 팔을 끌어 당겨 억지로 일으켰다.

“아아. 왠지 엄마가 두 명으로 는 것 같아.”

“칭찬으로 들을게.”

“그런데 오빤 많이 안 마셨나 봐요? 멀쩡하네.”

수빈이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지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분위기 봐 가면서 적당히 마셨지. 자기 전에 좀 봐야 하는 책이 있거든.”

“이 시간에? 좀 일찍 일어나서 보는 게 낫지 않아요?”

“중요한 책이라서.”

수빈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민우가 하는 일에는 늘 의미가 있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곧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거실을 둘러보며 정리할 것이 없나 확인했다. 어제 청소를 해서 특별히 손댈 것은 없었다. 그대로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가방에 들어있는 것들을 정리했다. 학회지는 책장에 꽂고 중요한 메모는 따로 갈무리했다. 그리고 루카치의 유품도 꺼냈다.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오늘 토론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어. 그럴 때마다 유고를 이어 쓸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오늘 완성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완성이라는 단어 하나에 가슴이 설렜다. 절로 미소가 걸렸다.

대학자가 남긴 유고의 빈 페이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에 비해 오늘 얻은 깨달음은 컸다. 완성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민우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서랍에서 유고가 들어 있는 목재 상자를 꺼냈다. 한쪽에 두기만 하고 열지는 않았다.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수빈이 잠들면 열어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유고가 완성되면 어떻게 할까? 이어서 써달라는 유언이 있긴 했었는데 그걸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란 말이지.’

역시 학계에 발표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학문적 성과를 세상에 알려 인류의 문명을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민우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었으니까.

사실 이런 고민은 유고를 처음 얻었을 때부터 해왔었다.

만약 이름 없는 학자의 유고였다면 별다른 생각 없이 그의 이름을 달아 출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죄르지 루카치는 다르다. 근대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자 중 한 명이다.

일반 원고도 아닌 유고인 만큼 그와 인연이 있는 기관이나 가족들에게 먼저 연락을 한 다음 일을 진행하는 게 도리라고 판단했다.

‘헝가리 출신 학자니까 그쪽으로 알아보는 게 좋겠다. 언론에도 공개하고. 조슈아 씨에게 도움을 청하면 좋겠네.’

민우는 영국에서 만난 기자 조슈아 벨라미와 연락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정도 부탁은 쉽게 들어줄 것이다. 대가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리고 출판은 협의를 거쳐야 하니까 나중 문제긴 한데······ 가능하다면 센트럴북스에서 했으면 좋겠다. 번역은 문제없어. 내 손으로 모두 해치워버리면 그만이니까.’

민우는 손에 들린 루카치의 만년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유품이 자신의 손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명인대 중앙도서관의 소장품도 아니었다. 분실신고된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유고를 어떻게 세상에 내보내느냐가 진짜였다.

‘내가 이어 썼다는 증거는 사진으로 모아뒀으니 특별히 문제는 없을 거야. 유고의 모든 내용은 내 머릿속에 있으니까 어떻게든 증명은 할 수 있고. 이제 제대로 완성만 하면 돼.’

처음엔 자신의 이름만 달고 출판을 해볼까 하는 욕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세상은 이 유고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학자로서의 양심이 그 잡념을 떨쳐버리게 했다. 공저자라면 몰라도 단독 저자로는 출간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욕실 쪽이 조용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잠시 후 목욕 가운을 두른 수빈이 머리를 털며 서재로 들어왔다. 바디샴푸가 남긴 꽃향기가 그윽했다.

“그건 무슨 책인데요?”

어느새 민우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이번에 발표한 논문에 쓰인 레퍼런스 중 하나였다.

“별 건 아냐. 오늘 토론에서 느꼈던 것들을 좀 되돌아보려고 그래.”

“우와. 진짜 오빠 노력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학회도 무사히 끝냈으니 발 뻗고 좀 쉬어도 될 텐데. 정말 빈틈이 없네.”

“먼저 들어가 쉬어. 금방 갈게.”

“알았어요.”

민우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하지만 토론에서 느꼈던 것들을 되돌아본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수빈이 나가고 잠시 후 침실의 불이 꺼졌다. 그제야 민우는 루카치의 안경을 쓰고 펜을 손에 쥐었다.

달칵―

가벼운 목재음과 함께 유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우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유고를 꺼내 페이지를 펼쳤다.

‘좋아!’

예상대로였다.

빈 페이지 위로 독일어가 환영처럼 드러나 있었다. 민우는 만년필 뚜껑을 열고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번쩍!

푸른 광채가 바람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다.

민우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빈 페이지에 검은 잉크가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또 다른 페이지로, 그리고 또 다음으로. 그런 과정이 반복되며 빈 페이지가 빠르게 글자로 채워져 나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빈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끝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조바심을 꾹 누르며 필기에 집중했다.

잠시 후 펜이 멈췄다.

아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환영으로 된 글자는 빈 페이지 중간에서 끝나버렸다. 민우는 펜을 내려놓고 남은 페이지를 세 보았다.

‘하나, 둘······ 두 페이지 반 남은 건가? 아깝네.’

그래도 실망은 잠깐이었다.

‘이 정도 양이면 한 번의 깨달음으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겠어. 진짜 다음이 마지막이겠다. 기대되는데?’

민우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제는 새롭게 써진 유고의 내용을 확인할 차례였다. 째깍거리는 시계소리가 새벽 어스름과 함께 깊어져갔다. 그렇게 민우의 독서는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 * *

얼마 전 자얀이 전해준 속담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모래폭풍이 지나가니 하늘은 더욱 청명해졌다.

민우는 한껏 쾌청해진 기분으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녀올게. 나오지 마. 밖에 춥다.”

따라 나오려던 수빈을 민우가 붙들었다. 어쩔 수 없이 수빈은 현관에서 민우를 배웅했다.

“계약 잘하고 와요. 인세 팍팍 부르고. 알았죠?”

“어떻게 그래? 요즘 종이책 시장 불황인 거 알면서.”

“그래도 오빤 지음사에 지분 좀 가지고 있잖아요. 이럴 때 써먹어야지 언제 써먹겠어.”

“지분까지야.”

민우는 싱겁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 인세 같은 건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책에 어떤 내용을 채울지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처음으로 내는 일반서니까.

“아무튼 알았어. 오늘 좀 늦을 거야. 저녁에 회식 있어서. 미안한데 기다리지 말고 저녁 챙겨 먹어.”

고개를 끄덕인 수빈이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민우는 가볍게 포옹을 하고 집을 나섰다.

밖에는 레아가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아침부터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어서 타시죠.”

민우는 늘 그렇듯 조수석에 올랐다.

목적지는 청문대가 아닌 지음사였다. 원래라면 천천히 계약을 하려고 했으나 주말 사이에 송승현 실장에게 연락이 왔다. 월요일에 바로 계약을 하자고.

차를 출발시키며 레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송 실장님이 라온북스 쪽을 신경 쓰고 계신 모양이네요. 이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까.”

“그런 거 같아요. 원래 이렇게 성격 급한 분이 아니신데.”

“그만큼 이번 계약이 중요하다는 거겠죠. 학술서가 아니라 일반서니까 나름 의미가 크지 않을까요? 매니저님에게도요.”

“글쎄요.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하니까.”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민우는 혼자 엘리베이터에 올라 인문사회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익숙한 풍경을 보니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아니, 이제 과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네요.”

“어머, 박 쌤!”

얼마 전 과장으로 승진한 정은아 과장이 반색을 하며 민우를 맞았다. 정은아 과장이 호들갑을 떨자 직원들이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하시는 데 죄송합니다. 온 김에 인사는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죄송은 무슨요. 빈손으로 온 게 좀 괘씸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쌤이 왔는데 이 정도 환대는 해 줘야지.”

“한진섭 선생은요?”

“아직 출근 전이요. 오후에 나와요. 보통.”

진섭은 민우의 후임으로 이곳 인문사회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민우가 거둔 것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어 평판이 좋았다.

“맞다. 내 조카가 박 쌤 보면 싸인 하나 받아달라고 했는데. 잠깐만요. 도망가지 말아요!”

곧 정은아 과장이 A4용지를 하나 들고 달려왔다.

“웬 싸인이요?”

“박 쌤 요즘 TV에 자주 나오잖아요. 못 본 사이에 연예인 다 됐다니까? 아무튼 조카가 꼭 받아달라고 했으니 거절하기 없기.”

“난감하네요.”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민우에게 볼펜을 쥐어주는 정은아 과장.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서명을 한 뒤 적당한 글귀로 마무리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충분하죠! 조카가 좋아하겠네.”

“왠지 과장님이 더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요?”

뒤에서 장철호 주임이 한마디 던지자 정은아 과장이 버럭 화를 냈다. 사람들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소리도 여전히 즐겁게 들렸다.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실장님이 기다리고 계셔서요.”

“바쁘다는 핑계는 됐으니 좀 자주 놀러 와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시간 꼭 낼게요.”

민우는 바로 한층 올라가 실장실로 들어갔다. 송승현 실장은 이미 계약 준비를 모두 끝내 놓았다. 테이블엔 계약서 두 부가 놓여 있었다.

“어서 와요. 자, 이쪽으로.”

인사를 하려던 민우는 엉겁결에 자리에 앉았다. 송승현 실장은 서론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계약서를 손으로 슥 밀며 말했다.

“계약서예요. 조건은 서운하지 않게 넣었으니까 한번 읽어 봐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요.”

“예.”

민우는 계약서를 펼쳐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인세나 다른 것들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한 대목이 민우의 이목을 끌었다.

“책 관련 강연 영상까지 계약 범위에 들어가나요?”

“만약 민우 씨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곳곳에서 강연 요청이 갈 테니까요.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서 강연 영상을 제작할 생각이에요.”

과연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내다본 수였으니까.

곧 검토가 모두 끝났다. 민우는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계약서의 빈 칸을 채워나갔다.

“꽤 고풍스러운 만년필이네요.”

“이거요?”

서명만을 남겨놓고 민우가 만년필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중요한 계약엔 이 만년필로 서명을 하고 있어요.”

“소중한 물건인가요?”

“굳이 표현하자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물건이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진 민우가 마지막으로 서명을 넣었다.

계약서 작성이 모두 끝났다. 송승현 실장이 마지막으로 검토를 했다. ‘제목 미정’이라고 써진 부분을 보며 물었다.

“생각해둔 제목은 없나요?”

“하나 있긴 합니다.”

“뭐죠?”

“그건 확신이 서면 알려드릴게요. 아직은 가설 단계라서.”

피식 웃은 송승현 실장이 계약서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민우 쪽으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이 악수했다.

“계약해 줘서 고맙고, 원고 잘 부탁해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책 안 팔린다고 너무 뭐라고 하진 마시고요.”

“그런 걱정은 안 해요. 잘 안 팔릴 리가 없을 테니까. 우리 지음사의 영업력을 우습게보면 곤란해요.”

“그럼 실장님만 믿고 쓰겠습니다.”

“조심히 가요.”

인사를 마치고 출판기획실을 나서려던 그때 민우는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꼈다.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해보니 청문대 국문과 조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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