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 < 100장. 새로운 도전 (1) >
학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민우의 발표가 하이라이트였던 탓에 도중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꽤 많이들 남았다. 학회 임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저녁 회식 장소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앞쪽 화면을 주목해 주세요.”
총무간사 안유진이 연단에 올라 뒤풀이 장소를 설명했다. 민우는 따로 뒤풀이를 하기로 해서 바로 짐을 챙겼다.
“형!”
익숙한 목소리에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해맑은 표정을 지은 허윤이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민우는 발표자 대기석에서 남은 발표를 들었기에 맨 앞자리에 있었다.
단숨에 민우에게 다가온 그가 두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정말 최고였어요! 와 진짜 대박. 영화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이건 TV로 생중계 했어야 하는데.”
“배우한테 그런 칭찬 들으니 기분은 좋네. 언제 왔어?”
“형 발표 시작하기 직전에 왔어요.”
“그래? 안 보이길래 안 온 줄 알았지.”
“자리가 없어서 맨 뒤에 있었어요.”
“아무튼 바쁜데 와줘서 고맙다.”
허윤이 씨익 웃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알아보고 접근하려 하자 재빨리 후드를 뒤집어쓰고 선글라스까지 꼈다.
하지만 그는 허윤에게 볼일이 없었다. 한일대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민우와 발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실례가 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 지도교수님과 토론을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음, 뭐라고 할까. 처음엔 끔찍했죠. 학회에서 토론자 선정 메일을 받았을 땐 이게 꿈인가 싶었어요.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쉽게 상상이 가질 않네요. 아무튼 박 선생님. 발표 정말 잘 들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발표를 듣고 확실히 정하게 됐어요.”
“긍정적으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선생님처럼 멋진 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마치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은 사람처럼.
“미안한데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최동학입니다.”
“최동학이요.”
민우는 그 이름 세 글자를 기억했다. 5년, 아니 10년이라도 좋다. 그 이름을 학술지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다.
민우가 말했다.
“학부 시절부터 늘 이렇게 생각했어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지금도 부지런히 살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고요. 책도 열심히 찾아 읽고 있죠. 동학 씨도 열심히 하신다면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단하시네요. 저였다면 게으름 피웠을 거 같은데. 저도 노력하면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목표는 좀 더 높게 잡으셔야죠. 저보다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으신데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다음에 한번 연락 주시죠. 가볍게 식사라도.”
민우는 명함을 하나 꺼내 최동학에게 건넸다. 그리고 악수를 했다.
점점 멀어지는 최동학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보람을 느꼈다. 자신의 연구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된 거니까.
곁에서 지켜보던 허윤이 나섰다.
“역시 형은 대단해요.”
“뭐가?”
“방송국 사람들도 가끔 그래요. 형을 보면 배울 게 참 많다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마력 같은 게 있다나. 아무튼 저도 형님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게 꿈입니다!”
“거울 봐. 지금도 충분히 나보다 멋있으니까.”
싱거운 농담에 두 사람이 한차례 웃었다. 허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학회 정식 순서는 이제 다 끝난 거죠?”
“그렇지. 집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뒤풀이 가는 사람도 있고 해.”
“형은 어쩌실 예정?”
“보통 뒤풀이에 참가하는 편인데 오늘은 패스하려고. 오랜만에 명인대 사람들하고 같이 뭉치기로 했어. 뒤풀이 갔다가 우리끼리만 있는 것도 보기 안 좋으니까.”
“이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레인들의 모임이군요.”
“브레인은 무슨.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뭐.”
그때 뒤에서 민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수빈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빨리 오라는 신호였다. 명인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손을 한번 들어 보인 민우는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슬슬 가봐야겠다.”
“맞다. 찬혁이가 형 결혼식 때 축가 부르고 싶다는데 어때요?”
“찬혁이가?”
임찬혁은 허윤의 소개로 알게 된 가수였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도 어리지만 특유의 가창력으로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축가는 네가 한다고 했었잖아?”
“찬혁이랑 같이 듀엣으로 하려고요. 하나보단 둘이 좋잖아요? 그래서 곡도 다시 쓰고 있죠.”
“이거 괜히 내가 미안해지는데. 그래도 되려나 모르겠다.”
허윤은 아역배우 출신이기도 했지만 음악적 재능도 출중했다. 작곡도 가능해 싱어 송 라이터로 종종 활동하기도 한다.
얼마 남지 않은 민우의 결혼식에 직접 쓴 곡으로 축가를 부르기로 했었는데, 거기에 임찬혁이 가세하기로 한 것이다.
“왜 그러세요. 우리 사이에.”
“아무튼 고마워. 나중에 시간 되면 찬혁이랑 셋이 같이 밥이나 먹자.”
“넵. 접수!”
계단을 올라가려던 민우가 잠시 멈칫했다. 왠지 받기만 하니 미안해졌다. 뭔가를 고민하더니 허윤에게 물었다.
“혹시 너 다음 달 중순쯤에 스케줄 많나?”
“스케줄은 늘 한 가득이죠. 요즘 형 덕분에 고정도 늘고 해서요. 그래도 메인 작품 하나가 곧 끝나서 쪽잠을 잘 정도는 아닙니다.”
“괜찮으면 아프리카 한번 가보지 않을래?”
“아프리카요?”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알 카흐파 의장과 그가 운영하는 재단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다음 달 중순에 있을 학교 오프닝 세리머니까지.
모든 설명을 들은 허윤이 두 눈을 반짝였다.
“우와! 진짜 제가 껴도 되는 겁니까? 어마어마한 행사 아닌가요?”
“안 될 거 없지. 전 세계에서 아부다비문화재단을 주목하고 있어. 네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가 될 거야. 그러니까 촬영팀 껴서 같이 가자고.”
“촬영팀이요? 아!”
그제야 허윤은 민우의 의도를 눈치챘다.
제의가 아니라 기회였다. 선물에 가까운. 재단의 규모와 사업의 취지를 고려해볼 때 좋은 다큐멘터리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아역 배우 출신이라 이미지가 좋긴 했지만, 영상으로 담아 방송에 내보낸다면 그 이상으로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허윤의 마음은 벌써 아프리카에 도착해 있는 듯했다. 꿈과 희망에 부풀은 표정이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준다! 벌써부터 악상이 파박! 하고 떠오르네요. 이러다가 형하고 같이 광고 하나 찍는 게 아닌가 몰라.”
“공익광고면 생각해 보마. 아무튼 가서 소속사 사장님하고 얘기 잘해.”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 보는 방향으로 해볼게요. 나중에 연락해요. 형!”
허윤이 손을 흔들며 재빨리 학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민우는 명인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 * *
서른 명에 가까운 명인대 국문과 사람들이 고깃집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은 이미 세팅이 끝나 있었다. 고기도 한가득 담겨 나왔는데, 육질이 굉장히 좋았다. 문득 불안감이 든 서지훈 교수가 메뉴판을 들추어 보았다.
“잠깐. 박민우. 뭐 이렇게 비싼 델 잡았어?”
“주 작가님이 쏘신답니다.”
“오, 좋아. 현명하게 잘 골랐네.”
일동이 한바탕 웃었다. 말석에 앉아 있던 주예린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민영환 교수가 도중에 돌아갔기 때문에 상석은 서지훈 교수의 차지였다. 그 좌우로 송승현 실장과 설예라 교수가 자리를 잡았다. 이 세 사람이 명인대 국문과의 90년대를 주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이재환, 최민식 등 고학번 박사들이 자리했다. 박사논문을 쓰느라 바쁜 강예진도 와 있었다. 민우와 진섭, 수빈도 그 자리에 낄 수 있었다.
나머지 석박사 후배들은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가 주도하는 술자리에 서열은 의미가 없었다. 곧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서로 자리를 바꿔 앉으며 묵혀뒀던 이야기를 나눌 것이기에.
서지훈 교수가 소주병을 깠다.
“안주도 있겠다 슬슬 잔들 채우자. 못 마시는 사람들은 억지로 마시지 말고. 좋은 자리니까 즐겁게 놀자고.”
“예!”
임산부인 이수빈을 빼고는 모두 술로 잔을 채웠다. 젊은 교수가 상석에 있는 자리였다. 오늘만큼은 실컷 취해도 되는 날이었다.
서지훈이 가득 채운 잔을 들자 최민식이 한마디 던졌다.
“선생님. 쉽게 모이기 힘든 자리인데 건배사 한번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 선생. 오랜만에 봤는데 이러기야?”
“빼지 말고 한 말씀 하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난감하네.”
모든 시선이 서지훈 교수를 향해 있었다. 가만 생각에 잠기던 서지훈 교수가 입을 열었다.
“건배사까지는 아니지만 평소 너희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으니 그걸로 갈음하지.”
“다들 박수!”
박수가 쏟아졌다. 잔을 높이 든 서지훈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오늘 학회를 보면서 다들 느끼는 바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와 박 선생의 토론을 보면서 말이지.”
서지훈 교수는 민우 쪽을 바라보았다. 민우는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가 변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의 의의라고 할까. 학문은 숭고한 일이다. 인생에는 끝이 있지만 학문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지. 우리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쌓은 지식과 지혜는 나이테처럼 곱게 쌓일 터. 그러니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이 한잔 술로 털어버리기를 희망하며. 건배!”
“건배!”
잔이 일제히 부딪치며 진짜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고기가 불에 익는 소리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로 식당이 소란스러워졌다.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자리가 바뀌기 시작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단연 민우였다.
선후배들이 몰려와 그에게 술을 권했다. 산을 하나 넘은 상태라 민우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그들과 대작했다. 사람은 달랐지만 질문은 하나같았다. 지도교수를 넘어선 기분이 어떠냐고.
민우의 대답도 한결같았다.
“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겼다고도 생각하지 않고요. 오히려 선생님께 또 배웠다는 생각만 드네요.”
“여전히 겸손하네요. 민우 후배는.”
송승현 실장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소주를 단번에 털어 넣었다. 그녀는 다른 선후배들과는 달리 금방 자리를 뜨지 않았다.
“왠지 좀 기분이 이상하네요.”
“예? 제가 뭐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아뇨. 그런 게 아니라. 왠지 오늘 토론하는 걸 보고 있으니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어져서요. 조용히 자고 있던 열정이 깨어난 느낌이라고 할까.”
민우도 조용히 술을 들이켰다. 술잔이 비자 송승현 실장이 먼저 잔을 채워 주었다. 민우도 그녀의 빈 잔을 채웠다.
“그래서 말인데. 책 하나 써보지 않을래요?”
“어떤 책이요?”
“자서전이라고 해두죠. 교수직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경험들을 책으로 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기엔 아직 너무 어리죠. 학문적 업적도 다른 선생님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고요.”
홍조를 띤 얼굴로 씨익 웃은 송승현 실장이 다시 소주잔을 들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늘 발표를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지더군요.”
송승현 실장은 금세 잔을 비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단순히 한 사람의 학문적 성공기가 아니라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거 같아요. 민우 후배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 어때요. 해보지 않겠어요?”
“좋은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거절하려나.”
“아뇨. 하겠습니다.”
의외에 대답에 송승현 실장이 살짝 놀랐다.
“웬일이에요? 겸손 떨면서 거절할 줄 알았는데.”
“부족하다는 제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선배님의 안목이라면 믿음이 갑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학회가 끝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던 최동학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민우는 행복한 상상과 함께 다시 그녀의 잔을 채웠다.
“계약부터 해야 하죠?”
“그래야죠. 다음 주 중으로 계약서 들고 청문대로 갈게요.”
“아닙니다. 제가 지음사로 갈게요. 오랜만에 인문사회팀에 들러서 인사도 할 겸.”
“그래요 그럼. 계약 성사의 의미로 다시 건배할까요?”
두 사람은 다시 잔을 부딪쳤다. 똑같은 소리가 났지만, 그 의미는 남달랐다. 민우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