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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76화 (276/500)

276화 : < 99장. 마지막 수업 (4) >

“어머, 아직 출발 안 하신 거예요?”

이른 아침 설예라 교수가 찾아왔다. 연구실에 앉아 차분히 명상을 하던 서지훈 교수는 싱겁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발표인데 미리 가서 뭐 해? 가뜩이나 그 녀석 긴장하고 있을 텐데. 세기의 대결이니 떠들며 귀찮게 하는 사람도 많을 거고.”

“하긴. 선배랑 박 선생 덕분에 학회 참석 신청 인원이 세 배는 늘었다고 들었어요. 학회 가입자도 엄청 늘었다던데요?”

“이거 남 좋은 일만 시켰군그래. 민 형이 한바탕 잔소리하시겠어.”

“아침부터 삐딱하시긴. 어느 학회든 회원수 많아지고 잘 돌아가야 우리 연구자들이 맘 편히 먹고 연구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대꾸한 설예라 교수는 소파에 편히 몸을 기댔다.

동료 교수라기보다는 선후배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래서 서지훈 교수 연구실에서만큼은 이렇게 편하게 있곤 한다.

서지훈 교수는 커피포트를 들고 커피를 컵에 따랐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연구실 지나가다가 재실로 돼 있어서 들어와 봤어요. 학회 있는 날인데 왜 안 가고 계신가 해서. 혹시 겁먹거나 그러신 게 아닐까?”

“지금 겁이라고 그랬어? 하하하. 농담이 지나치다는 생각은 안 드냐?”

“뭐, 선배는 총장님 앞에서도 떳떳한 분이니까. 얘긴 들었어요. 며칠 전에 총장님 앞에서 할 말 못할 말 다 하고 왔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갔어?”

서지훈 교수는 뜨거운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설예라 교수에게 건넸다. 설예라 교수는 두 손으로 감사히 잔을 받았다.

“그런데 얘기는 해봤어요? 박 선생 스카웃 얘기 돌고 있던데.”

“구체적으로 얘기는 안 했지. 하지만 지금쯤 알고 있을지도. 이 바닥은 좁으니 소문 같은 건 금방 퍼지니까. 아무튼 딱 5년만 기다리라고 했다.”

“5년이라.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되겠네요.”

설예라 교수는 허공을 응시했다. 수많은 상념이 스치고 지나가는 눈빛. 학과를, 그리고 학교를 바꾸겠다는 결심은 했지만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분위기가 왠지 무거워지는 것 같아 설예라 교수는 대화의 주제를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이번에 학회 있죠. 박 선생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언더독을 응원하는 건 일반 대중들의 당연한 심리야.”

“맞아요. 선배가 박 선생을 압도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 선생이 선배를 눌러버리는 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니까. 그래서 그런지 한 번 보고는 싶어요. 박 선생이 논리와 지식으로 선배를 압도하는 장면을.”

설예라 교수가 커피를 마시며 묘하게 도발해왔다. 하지만 상대는 서지훈 교수다. 그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역시 떨리는 건가요?”

“자꾸 영양가 없는 소리 할 거면 연구실로 돌아가 화초에 물이나 줘라.”

“부러워서 그래요. 오랜 세월 함께 한 제자와 학회에서 토론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러운데요. 훌쩍 자란 자식을 보는 기분이 아닐까요? 우리 수빈이도 빨리 키워서 학회에 내보내고 싶은데 아직 부족한 점만 보이고 하니까.”

설예라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포장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수빈 선생 정도면 훌륭한데 뭘 그리 아끼고 있어? 이제 박사 3학기 되는데 슬슬 학회 활동해도 괜찮잖아.”

“보기보단 멘탈이 약하거든요. 울렁증 좀 없애려고 TV출연 권유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난 거 같기도 하고. 괜히 무대에 내세웠다가 깨지고 나서 회복이 안 될까봐 걱정이 되네요.”

“아끼는 제자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게 네 지론 아니었나?”

“말이 쉽지 실제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죠.”

“한번 해 봐. 이 선생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니까. 민우도 있는데 옆에서 잘 케어해 주겠지.”

서지훈 교수가 외투를 걸치며 나가려는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설예라 교수는 커피를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아까 저한테 미리 가서 뭐하냐고 구박하셨던 건 착각이었나.”

“맞아. 착각. 지음사 들렀다가 와이프랑 점심 먹고 갈 예정이거든.”

“이야, 여전히 신혼이시네요. 부럽네.”

“부러우면 너도 빨리 시집가든가.”

“때 되면 가겠죠. 송승현 선배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두 사람은 나란히 연구실을 나섰다. 하지만 목적지는 반대였다. 갈라서기 전에 마주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너도 오늘 학회에 온다고 했나?”

“가야죠.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지.”

“한층 더 피곤해지겠군.”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세요. 나름 참관하러 가는 거니까.”

“참관?”

“잘 봐뒀다가 저도 나중에 수빈이한테 써 먹을 생각이에요. 아끼는 제자를 향한 선배의 마지막 수업. 기대할게요.”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의 목적을 간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서지훈 교수는 손을 들어 보이곤 몸을 돌렸다.

* * *

민우와 수빈, 그리고 진섭은 예린의 차를 얻어 타고 학회장으로 향했다. 이번 국제비교문학회 겨울 학술대회는 본부가 위치한 한일대에서 열린다.

열심히 운전을 하던 예린이 룸미러로 민우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선배. 지금 기분이 어때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묻고 그래? 운전이나 열심히 하지.”

“사제대결을 앞둔 대학원생의 심리상태를 알고 싶어요. 차기작 구상하고 있거든요. 3류대 출신 인문학도의 성장기! 어때요. 끌리지 않아요?”

“생각만 해도 멀미난다. 조기절판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소재로 써. 요즘 누가 머리 아픈 거 읽겠냐. 필력 낭비하지 말고 시원시원한 걸 쓰라고.”

“쳇. 너무하시네.”

잠시 후 주차장에서 내린 307호 멤버들은 학회가 열리는 대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선 민우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게 다 학회에 온 사람들이야?”

“오. 대박!”

일전에 열렸던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접수처에 몰려 있었다.

일단 네 사람은 맨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신규 가입자들이 많아 접수가 조금 지연되고 있었다.

“살다 살다 줄 서서 등록해보긴 처음이네. IAHS 이후로 처음이다.”

“너랑 서지훈 선생님이 토론한다고 하니까 학계에서 꽤 화제가 됐던 모양이더라고. 이른바 박민우 효과라고 할까?”

진섭은 내내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수빈도,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승패를 떠나 새삼스레 민우는 자신의 두 어깨에 많은 것이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 후 앞사람이 비켜서자 접수 데스크의 모습이 보였다.

“박 선생님!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총무간사 안유진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녀는 민우가 방명록을 작성하는 사이 민우의 몫으로 준비해 둔 명찰과 책자를 건넸다.

“전보다 회원들이 많아졌죠? 선생님 덕분에 학회가 많이 붐비는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일거리가 많이 늘었겠어요. 저도 학회 몇 번 준비해봐서 아는데 힘드시겠네요.”

“무슨 말씀을. 아녜요!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우리 학회도 더 크게 키워봐야죠. 오히려 저희가 감사한 일이죠. 안에 다른 선생님들 계실 거예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세 친구들도 등록 좀 도와주세요.”

곧 접수를 마친 민우와 친구들은 학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른 시간부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문학 관련 학회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우선 네 사람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윤이는 언제 온대?”

민우가 물었고, 수빈이 답했다.

“오전에 스케줄이 있어서 오후에 온대요. 오면 내가 등록 도와주려고요.”

“기자들까지 따라붙는 게 아닌가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연예인이 학술대회에 참가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나름 특종이 아닐까?”

최근 허윤은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기자들이 쫓아다니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수빈이 웃는 것을 보니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서지훈 선생님은 시간 맞춰서 오시려나보네. 안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국제비교문학회 연구이사인 박진영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민우를 발견한 그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잘 지내셨죠?”

“나야 늘 그렇지. 박 선생은?”

“선생님 덕분에 발표 준비하느라 혼났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민우가 뼈있는 한마디를 건네자 박진영 교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지훈 교수의 발표 청탁을 받은 게 바로 그였으니까.

“논문 심사와 발표자 선정은 다르다는 거 알잖아. 지원자가 있는데 마다할 순 없지. 하물며 국내 탑이라고 불리는 학자인데.”

“그래도 덕분에 학회 인원도 늘고 하니 뭔가 보람은 있네요.”

“잘 봐둬.”

박진영 교수가 학자들로 가득 찬 객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민우는 그 장면을 눈에 담으며 이어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이게 박 선생이 현재 학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야. 처음 이곳에서 발표를 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고. 굉장히 높아졌다는 게 실감이 나지?”

“그러게요.”

“그간 고생 많았어. 정말.”

박진영 교수는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우연히 블로그를 하다 만나게 된 사이였지만 어느새 학문적 동반자가 된 두 사람이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다 박진영 교수는 자리를 떠났다. 그때 한진섭이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수빈도,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크흠. 일찍들 왔구나.”

“선생님!”

“왜들 그러냐? 내가 못 올 곳에라도 왔나?”

민영환 교수였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민우의 옆자리에 슬쩍 자리를 잡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307호 멤버들은 어찌할 줄 몰랐다.

“편하게들 있어. 여기는 학교가 아니니까.”

그제야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민영환 교수가 민우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준비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번에도 강연식으로 발표를 할 생각이지?”

“네.”

팔짱을 낀 민영환 교수가 연단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진지해졌다. 마치 민우와 서지훈 교수의 발표를 시뮬레이션하기라도 하듯.

“강연식 발표는 네 주특기였지. 하지만 서 선생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다. 이미 내용 파악 정도는 끝내고 무대에 설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

짧지만 건성으로 한 대답은 아니었다. 민영환 교수는 민우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발표 주제와는 무관한 질문이 나올 거라는 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발표 주제와 무관한 질문이 나오다뇨.”

“비교문학은 서 선생의 주전공이 아니야. 하지만 굳이 토론자로 나섰다는 건 뭔가 다른 의미가 있어서겠지. 예상외의 질문에 흔들리지 말고 네 생각을 분명히 말해라. 꾸밈없이. 그럼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결연한 표정을 지은 민우도 시선을 연단으로 고정했다. 곧 오늘 사회를 맡은 박진영 교수가 연단에 오르며 학술대회의 시작을 선포했다.

* * *

“토론에 참여해주신 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10분 휴식 후 다음 순서가 진행됩니다. 청문대의 박민우 선생님의 발표인데요. 발표 주제는 한국 비교문학의 역사와 전망입니다.”

짝짝짝짝―

오늘의 메인이벤트답게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맨 앞자리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민우는 짐을 챙겨 연단에 올랐다. 곧 서지훈 교수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는 필기도구 하나 없이 그저 발표지만 달랑 들고 있었다.

‘역시 민 선생님 말씀대로구나. 모든 준비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이야.’

민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서지훈 교수가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거리 때문은 아니었다. 눈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서로 알 수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발표 준비를 하는 내내 끊임없이 그런 생각이 맴돌았다.

필기도구를 꺼내기 위해 필통을 열었다. 그 안에는 루카치의 만년필과 307호 멤버들이 선물해 준 만년필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민우가 손을 뻗었다.

어떤 것을 집어야 하나 잠시 고민할 찰나 며칠 전 수빈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는 줄 수 없는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요?

민우의 눈빛에서 고민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기고 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무대를 통해 내가 무엇을 얻어갈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겠지.’

결정은 끝났다.

그는 루카치의 만년필이 아닌, 친구들에게 선물로 받았던 그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당당히 서지훈 교수를 바라보았다.

“곧 2부의 두 번째 발표가 진행되겠습니다. 참석자 여러분들께서는 좌정해 주십시오.”

사회자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빈자리 없이 꽉 찼지만,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객석이 조용해졌다. 사회자가 눈으로 신호를 보냈고 드디어 민우가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안녕하십니까. 청문대의 박민우입니다. 지금부터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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