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 < 99장. 마지막 수업 (2)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자 한국어문학 파트 연구실에도 활기가 돌았다. 민우를 비롯해 수빈과 진섭, 그리고 예린이 강의 준비를 위해 매일 출근을 했다.
신규 임용된 표태진 교수는 서류절차가 필요해 다음 달부터 정식 출근하기로 했다. 팀 307호 멤버들은 환영식까지 열어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렇게 찾아온 2월 둘째 주 월요일 아침.
늦겨울 치고 날씨가 따뜻했다. 그래도 민우는 코트와 목도리를 고집했다. 그렇게 폴라리스 연구실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희석아. 작업 진척 상황은?”
“여기 있습니다.”
남희석은 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리 인쇄해 놓은 작업 진척표를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표를 살폈다.
곧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특별한 문제는 없네. 이제 <인문과학총서> 출간까지는 2개월 정도 남았다. 마지막이라고 풀어지지 말고 다들 바짝 긴장해. 실수는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 나오는 거니까. 알았지?”
“명심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믿음직한 목소리였다. 괜한 이야길 한 건가 싶기도 해 민우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곧 커피 한 잔을 다 비운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수고들 하고. 무슨 일 있으면 한국어문학 과정 연구실로 전화해.”
“근데 오빠. 어제 잠 못 주무셨어요? 얼굴이 말이 아닌데.”
“그래?”
민우는 턱을 한 번 쓸어 만졌다. 까끌거리는 감촉. 생각해보니 오전에 면도를 하는 걸 잊어먹은 것 같다.
사실 면도 상태만이 아니었다. 다크 서클도 볼까지 내려와 있다. 잠을 못 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때 남희석이 한숨을 내쉬며 타박했다.
“누님은 눈치도 없이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교수님은 신혼이잖습니까. 당연히 피곤하실 만도 하죠.”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임신 초기의 부부관계는 꽤 위험하다고!”
별 생각 없이 듣고 있던 민우는 깜짝 놀랐다. 만약 커피를 계속 마시고 있었다면 뿜었을지도 모른다.
연구실에서 ‘부부관계’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다 이런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석들이 아침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잠이 확 깨네. 아무튼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니까 억측은 정중히 사양하마. 그냥 일이 좀 많아져서 그래.”
“그럼 다행이구요.”
“다행은 아니지요. 누님.”
검지로 안경을 슥 밀어올린 남희석이 묵직한 어조로 문제제기를 했다.
“중요한 일을 많이 하셔야 하는 시기인데 갑작스런 변수가 생긴 거잖습니까. 그러니 교수님께서 많이 힘드실 수밖에요.”
“힘든 건 수빈 씨도 마찬가지지. 하버드에서 공부하던 거 접고 와야 했으니 마음도 힘들었을 거고.”
“하지만 일의 객관적인 총량으로만 따져도 교수님께서 훨씬 힘든 게 자명한 사실이죠. 잠을 못 주무신다는 건 결국 일이 밀려서 그런 거니까.”
남희석은 사실을 근거로 논리를 풀어갔지만 이다혜에겐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홰홰 저었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네 미래의 부인이 불쌍하다. 불쌍해. 쯧쯧.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적어도 누님은 아닐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얏?”
그 한마디가 이다혜의 역린을 건드렸다. 얼굴 표정이 불쾌하면서도 슬픈, 그런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형태로 바뀌었다.
“어이구~ 김칫국은 사절인데? 누가 너 같은 답 없는 꼬맹이를 남편으로 삼는다고 그러니?”
“남편이라뇨. 전 그런 말을 한 적 없습니다. 번역에 심취하시다보니 모국어를 잊어버리신 모양이군요. 제가 좀 더 쉬운 말로 풀어드리면······.”
슬슬 진흙탕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민우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관심을 끄고 거울 앞에 섰다. 눈 밑이 퀭했다. 다크 서클은 어쩔 수 없지만 화장실에서 면도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도 두 사람은 투닥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민우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아침부터 그만들 싸우고. 나 간다?”
“잠깐만요. 죄송한데 나가시는 길에 이 재활용 안 되는 쓰레기 좀 치워주고 가시면 안 될까요?”
이다혜는 어느새 남희석의 뒷덜미를 쥐고 있었다. 마치 쥐를 생포한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 * *
한국어문학 연구실 문은 잠겨 있었다. 도어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차가운 기운이 훅 밀려왔다.
‘매번 내가 일 등인가. 녀석들, 좀 일찍 다니지.’
민우는 불을 켜고 리모콘을 조작해 난방도 켰다. 이어 원두를 갈아 커피포트에 넣고 전원을 올렸다. 곧 자글자글 물이 끓기 시작했다.
‘맞다. 오늘까지 처리해야 하는 서류 있었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민우는 서류를 집었다. 그때 딸려 나온 종이 한 장. 무심결에 내용을 본 민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잠깐이나마 잊고 있었는데······.’
그것은 얼마 전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보낸 메일 인쇄본이었다. 발표일시와 발표자, 그리고 토론자 정보가 적혀 있는.
막연한 어지럼증이 들었다. 얼굴도 화끈거렸다. 글자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몇 번 휘저어도 그대로였다.
쿵!
결국 민우는 머리를 책상에 박다시피 엎드렸다. 이어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 뭐냐고 이게······.”
누가 들어줬으면 하는 심정으로 한 혼잣말이었다.
최근에 바빠서 학회 발표 준비에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있었다. 누가 나오더라도 철저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자신감의 기저에는 서지훈 교수가 자신의 편이라는 암묵적인 사실이 깔려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손을 내밀어 주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엔 적이다.
그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국규모 학술대회에서 열리는 토론이다. 서지훈 교수의 성격상 사제관계라고 해서 봐주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실들이 하나씩 모여 민우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박고 축 늘어졌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선생님 앞에서 제대로 발표나 할 수 있을까? 망신당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되었다.
아침 열 시가 지나고 연구실의 문이 열렸지만, 민우는 고개를 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좋은 아침요!”
주예린이 산뜻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표정을 보니 신작 마감을 끝내고 원고를 넘긴 게 분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진 비운의 주인공 같았는데, 지금은 더없이 상쾌했다.
때마침 커피가 완성되었고 주예린은 민우가 엎드려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며 커피를 한 잔 따랐다.
“오빠. 왜 민우 선배 자리에서 엎드려 있어? 어제 또 밤새 게임했지? 어쩐지 연락도 없이 자더라니. 언제 철들래? 그만 일어나. 그러다 선배 오면 또 잔소리한다.”
당연히 미동도 할 리가 없었다. 자신은 진섭이 아니었으니까.
주예린은 먹이를 노리는 사마귀처럼 천천히 민우의 자리로 다가왔다. 이번엔 어떤 잔소리로 괴롭혀줄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뒤통수를 보니 자주 보던 것이 아니었다.
“어?”
예린은 깜짝 놀랐다. 그가 진섭이 아니라 민우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선배. 왜 그러고 있어요? 수빈이랑 싸웠어요? 각방 쓰재? 아니지. 선배가 좀 막장이긴 해도 수빈인 천사니까 그런 말은 안 하겠고. 아니면 어디 아파요? 112 부를까?”
“112는 경찰서잖아······.”
“다행히 판단력은 정상이네요. 어디 아픈 건 아닌 것 같고.”
“······.”
“알겠다! 서지훈 선생님하고 맞짱 뜨는 것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민우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답이었으니까. 주예린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안 그래도 어제 그걸로 섭이 오빠랑 한참 떠들었는데. 과연 누가 이길까 내기도 했지롱!”
“내기?”
그제야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예린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넌 누구한테 걸었냐?”
“전 선배한테 걸었어요.”
“얼마나?”
“백만 원.”
“음······ 괜찮아. 너 정도 벌면 그 정도는 길가에 버려도 되겠지. 좋은 일에 썼다고 쳐.”
민우는 다시 힘없이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자 뚱한 표정을 지은 주예린이 바싹 다가와 민우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전 선배를 믿어서 그쪽에 건 거라고요! 절대 지면 안 돼! 서지훈 선생님 따위 그냥 말빨로 발라버리라고요! 장강의 뒷물결이 되라고!”
“안 돼. 이길 수 없어. 돌아가.”
“이 아저씨가 진짜!”
결국 주예린은 완력으로 민우를 일으켜 앉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흐느적거리며 의자에 겨우 몸을 기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진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예린이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한걸음에 달려온 진섭은 상황을 금방 파악했다.
“빅 매치를 앞두고 패닉에 빠진 건가?”
“어떻게 좀 해봐. 선배가 이러는 거 처음이라 불안하네. 책상에 축 늘어져 있길래 오빠인 줄 알았다니까?”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군. 민우가 져야 나한테 꽁돈이 생기니. 하하하핫!”
실컷 웃던 진섭은 예린의 싸늘한 눈총을 받고서야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멈췄다. 그때 문이 또다시 열리고 이수빈이 들어왔다.
“다들 일찍 왔네요. 근데 거기 모여서 뭐 하고 있어요?”
“민우가 어떻게 하면 정신을 차리게 할지 연구 중이었지.”
“안 그래도 요즘 집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거 같던데. 여기서도 이러네.”
이수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곧 열릴 학회 토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는 민우를 보며 진섭이 말했다.
“그래도 부담감은 이해가 돼. 상대가 상대여야지. 서지훈 선생님이라면 이 녀석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인데 논리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선배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사람이잖아.”
“뭐, 그건 나도 인정. 하지만 불가능도 불가능 나름이지.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잖아. 서지훈 선생님은 민우를 키운 사람이야. 논리와 지식으로 승부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울걸?”
수빈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 괜한 참견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을 정하곤 민우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오빠. 많이 부담돼요?”
“여기가 지옥인가 싶다.”
“그 정도로?”
“소문은 소문대로 다 났잖아. 재환이 형이랑 매형도 오고, 예진 누나도 오고. 명인대 선생님들도 오신다고 하고.”
명인대뿐만이 아니다. 한일대와 다른 주요 대학의 교수 및 학생들도 이번 토론을 보기 위해 방문할 예정이었다.
서지훈은 이미 완성된 학자였고 민우는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신진 학자였다. 신구(新舊)대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흥미로운 법.
수빈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민우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오빠는 서지훈 선생님이 왜 토론자로 나선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일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으니 한 번 크게 쪽팔림을 주려고 하신 게 아닐까 싶네. 전국 규모로 정신 차리라고.”
“과연 그럴까요?”
민우의 눈이 떠졌다. 수빈의 반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이라는.
“살다 보면,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지금처럼.”
모두의 시선이 수빈에게 쏠렸다. 하지만 수빈은 단 한 사람, 민우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서지훈 선생님이 오빠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서 토론자로 나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로······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는 줄 수 없는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요?”
“가르침······.”
민우가 조용히 중얼거렸고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설예라 선생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거든요. 아끼는 제자일수록 강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오. 제법 그럴싸한데? 역시 사람은 외국물을 먹고 와야 하나봐. 발상의 전환. 좋지. 그냥 논문 지도받는다 생각하고 마음 굳게 먹으면 끝 아닌가?”
진섭이 호응하자 예린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우는 어느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총기가 맺히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르침. 그리고 발상의 전환?”
그 의문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민우는 책상에 올려둔 발표문 인쇄본을 손에 들었다. 다시 보지 않아도 내용은 모두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단지 손바닥을 뒤집었을 뿐이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 보였다. 민우는 오히려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면 재미가 없겠지.”
그렇게 운을 뗀 민우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주예린.”
“넹?”
“얼마 배팅했다고 했지?”
“백만 원이요.”
민우는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5만 원권 지폐를 모조리 꺼내 주예린에게 건넸다. 열 장 정도 되어 보였다.
“이건 왜요?”
“내 쪽에 더 걸어 두라고.”
그제야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