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73화 (273/500)

273화 : < 99장. 마지막 수업 (1) [11권 끝] >

원장실 앞에 선 민우는 넥타이를 고쳐 맸다. 어떤 말이 오갈지는 이미 계산이 끝났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원장실에 김한진 원장 혼자 있었다. 몇 발자국 걸어가 꾸벅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박 교수. 그쪽에 앉지.”

“예. 원장님.”

김한진 원장의 표정은 좋아 보였다. 민우는 소파에 앉았고, 잠시 후 서류 정리를 끝낸 김한진 원장이 민우의 앞에 앉았다.

“그나저나 좋은 소식이 있다지요?”

“예? 좋은 소식요?”

“박 교수가 4월에 결혼한다 들었는데. 교수들 사이에서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하하하. 생각보다 일찍 하는군요. 보통 교수들은 늦게 하는 편이지 않습니까? 하긴, 박 교수는 벌써 부와 명예를 쌓았으니 지금 해도 별로 이상하진 않지만요.”

김한진 교수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하자 민우는 괜스레 멋쩍어졌다.

들어오자마자 일 이야기부터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민우의 근황을 물으며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김한진 원장이 계속 물었다.

“신부 될 사람이 이수빈 선생이라던데. TV에서 가끔 봤습니다. 우리 교육원에도 강의를 나올 예정이지요?”

“예. 이수빈 선생은 일반문학 파트를 맡아 줄 겁니다.”

“이수빈 선생의 능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박사학위만 딴다면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쏟아지겠지. 전체적으로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학 강사도 보충을 했으니 이제 교육원이 비상하는 일만 남았군요.”

민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청문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프로젝트였다. 민우의 라인 덕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지원 의사를 밝혔고, 문학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한국문화를 전수할 수많은 강사들이 섭외되는 중이었다.

많은 인력과 자본이 투입되는 만큼 기대가 큰 사업이었다.

“이번 역사학 강사 채용과정은 어땠습니까? 박 교수에겐 아마 첫 경험이었을 텐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민우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들을 하나로 나열했다.

그중엔 김한진 원장이 원하는 것들도 있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지만, 민우는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다.

“역사학 강좌를 추가함으로써 한국어문학 과정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학으로 완성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문학에 중점을 둔 과정으로 키우고자 했던 제 계획이 조금 편협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네요.”

“허허허. 많이 솔직하시군.”

“느끼는 바를 말하는 거니 굳이 금칠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교수들은 체면이라는 걸 생각하니까요. 아닙니까?”

“부족한 것을 직시하는 용기야말로 학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김한진 원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리에 도취한 표정은 아니었다. 민우가 스스로의 편협함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기본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노유민 씨를 최종 면접에서 떨어트린 것에 대해 많이 서운했지요?”

김한진 원장이 직구를 던졌다. 몸쪽 꽉 찬 공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선구안을 발휘했다.

“아쉬운 마음은 들긴 했지만 원장님의 결정에 불만은 없습니다. 임용 과정에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가서는 안 되니까요.”

“이해관계가 있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군.”

“물론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은 없습니다. 기계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죠. 그러나 가급적이면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김한진 원장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손주 바라보듯 편안한 눈으로 민우를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 따지고 보면 박 교수 팀도 정연주 이사님과 이해관계로 뭉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뭐, 싸우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너무 쉽게 인정을 하시는데. 그러면 재미가 없지요.”

“사실이니까요. 저희도 초빙을 받긴 했지만 이사님과 연줄이라는 게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원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분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표태진 선생도 최종 면접에 올렸고, 함께 지원한 강유찬 선생에게도 좋은 점수를 줬습니다.”

“그 점은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심 박 교수가 두 명 모두 박하게 평가를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어요.”

김한진 원장이 소탈하게 웃었다.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민우는 왠지 자신이 간단한 일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다. 말 그대로 실력으로 평가하면 그만인 것이었는데.

그러다보니 그의 어조가 차츰 부드러워졌다.

“박하게 평가하기에는 너무 실력들이 좋으셔서요. 노유민 선생이 없었더라면 두 분 모두 최종 면접에 올렸을 겁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박 교수 기준에 맞추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요.”

“교차수강 옵션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 그거.”

이번엔 민우도 직구를 던졌다. 그러나 상대도 베테랑 타자였다. 선구안이 즉시 발동되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 분야에 한정할 게 아니라 청문대에 설치된 모든 학과로 그 범위를 넓히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좀 더 디벨롭하고 있지요.”

“네? 청문대 전체로요?”

민우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김한진 원장은 교차수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도가 확 바뀌었다.

둘째, 김한진 원장이 오히려 판을 키우려고 하고 있었다. 민우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의 크기로.

“교차수강 옵션은 박 교수도 메리트가 있다고 지적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 메리트를 극대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해 봐야지요. 각 학과에 협조공문을 보낼 겁니다. 내 명의로 안 되면 총장님 명의라도 빌려 봐야지요.”

“어려운 결심을 하셨네요.”

“글쎄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요. 교육원을 발전시킨다는 목표는 박 교수와 같다고 보는데. 아닙니까? 다만 방법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방법의 차이를 서로 조금씩 줄여 보도록 하시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겁니다. 오해라는 건 교류가 적어질수록 생기기 쉬운 법이니. 언제든 와서 편히 이야기 하시지요.”

그렇게 사담이 몇 마디 더 이어지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매듭을 짓고 원장실을 나선 민우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네. 꽉 막힌 분은 아니었구나. 아니, 오히려······.’

더욱 방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틀에 박힌 교수가 아니었다. 머리가 좋지 않았다면 눈앞의 이익만 챙겼을 것이다.

‘교차수강 옵션을 그렇게 키울 줄은 몰랐어.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아마 야망도 크겠지. 하긴, 그 정도는 하니까 처장까지 올라갔겠지만.’

앞으로 한국문화교육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만 하지는 않았다.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즐겁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문화교육원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안지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영 씨. 아직 퇴근 안 했어요?”

그녀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민우를 맞았다.

“잠깐 일이 남아서요. 원장님과 얘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예, 특별한 문제는 없었어요. 그나저나 지영 씨 일이 좀 많아질 거 같은데요? 교차수강제도가 시행될 것 같네요. 원장님께서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십니다.”

“다행이네요. 교차수강제도는 교수님께서 제안하신 거니까 원장님께서 한 발 물러나신 거라고 봐도 되겠어요.”

“그 반대일 수도 있죠. 오히려 서로 한 걸음 내디딘 걸지도.”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안지영이 예쁜 미소를 지었다.

“늘 긍정적이셔서 좋네요. 교수님은.”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김한진 원장과 민우 사이에 알력이 있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연주 라인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민우의 편이었다.

“그럼 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교수님도 너무 늦게까지 계시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그녀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이제 민우만 홀로 사무실에 남았다.

적적한 느낌에 민우도 집에 돌아갈까 하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 서류를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김한진 원장을 만나고 나니 좀 더 욕심이 생겼다. 교육원을 더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똑똑―

그때 노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서류를 보던 민우가 살짝 놀랐다.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정연주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게······ 좀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역사학 강사 채용 건은 잘 마무리됐어. 원장님하고도 얘기 잘해서 생산적인 결론을 내렸고. 그러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좀 다른 얘기에요.”

“다른 얘기?”

민우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연주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민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기에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쳐다봐?”

“혹시 스카웃 제의 받으셨어요?”

“그건 늘 있는 일인데 뭘 또 새삼스럽게.”

“명인대······에서요.”

민우가 흠칫 놀랐다. 다른 대학은 민우에게 큰 자극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명인대는 다르다. 민우에게 있어선 꿈의 무대이기도 했다.

“아니.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유일한 총장님이 오빠를 데려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사립대학교 재단이사 모임에서 들은 소문인데 그쪽 소식통은 거의 확실하거든요.”

“명인대 국문과 교수 임용은 자대생만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잖아. 알다시피 난 상아대 출신이고. 그러니까 그 소문은 헛소문일······.”

민우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불현듯 아까 서지훈 교수와 통화했던 내용이 떠올랐던 것이다.

‘가만. 그때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건가?’

서지훈 교수는 자신에게 몇 년이나 청문대에 있을 거냐고 물었다. 그때는 굉장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마치 그만두기를 바라는 듯이.

‘민 선생님하고 같이 유일한 총장님을 만났다고 하셨지. 거기서 내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고. 두 분은 내 지도교수님인데, 혹시 사전 인터뷰?’

교수 임용 과정 중에 지도교수에게 연락해 지원자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역시 뭔가 있으신 거죠?”

“아니, 명인대 쪽에서 제안 온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다고 해서 당장 그쪽으로 갈 것도 아니고.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서지훈 교수는 5년만 버티라고 말했다. 그 정도라면 땅을 일구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민우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는 떠나실 생각인가 보네요.”

“솔직히 말하면 한 대학에서 평생을 보낼 생각은 없어. 더 큰 목표가 생긴다면 옮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당장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네 체면을 봐서라도 쉽게 옮길 수는 없지.”

“알겠어요. 밤 늦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어. 직장인데.”

씁쓸히 웃은 연주가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민우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소파에 앉아 계속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있어 명인대 이야기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타대생 출신인 나에게도 기회가 생기는 건가? 그 철옹성 같은 곳에서······.’

서지훈 교수가 말한 5년이라는 시간은, 아마도 순혈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준비 기간일 것이다.

그때 메일 알람이 울렸다.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팝업을 확인했다. 국제비교문학회 총무간사가 보낸 메일이었다. 민우는 터치해서 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던 민우가 깜짝 놀라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게 뭐야?”

민우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총무간사가 보낸 메일에 이상은 없었다.

발표명: 한국 비교문학의 역사와 전망

발표일시: 2019년 2월 15일 금요일 오후 3시 30분(2부)

발표자: 박민우(청문대)

토론자: 서지훈(명인대)

믿을 수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킨 민우는 다시 토론자를 확인했다.

‘명인대에 있는 서지훈이라면······ 한 명뿐인데?’

자신이 늘 기대고 의지하던 사람. 때로는 따끔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던 그 사람.

그랬던 그가 이번엔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 끝을 제자인 자신에게 겨누었다. 민우의 심장이 여러 의미로 격동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