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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72화 (272/500)

272화 : < 98장. 또 다른 밀실 회의 (2) >

‘혹시 오늘 부른 것도 민우 그 녀석하고 관계가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총장이 일본 방문 얘기를 꺼낸 뒤로 줄곧 민우 이야기만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초빙 이야기까지. 그렇다면 오늘의 토픽은 바로 민우다.

‘대체 왜?’

그 이후의 그럴듯한 전개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민우가 국내외에서 주목을 많이 받는 것은 민영환 교수도 잘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민우는 이미 청문대 소속이고, 그곳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가능성.

‘설마······ 우리 대학으로 초빙을 하려는 건가?’

민영환 교수가 두 눈을 부릅떴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지. 지금까지 임용된 국문과 교수 중 타대생 출신은 없었으니까.’

그것은 하나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순혈주의를 표방하는 전형적인 상아탑의 모습.

실제로 외국인 교수를 제외한 명인대 국문과 교수진은 모두 명인대 학부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출신학과가 다른 교수들도 몇 있으나 대부분 국문과 출신들이다.

‘하지만 전례가 없다고 해서 불가능하다고 치부할 수 있나? 민우 녀석 정도라면······.’

민영환 교수가 그렇게 속셈을 하는 사이 유일한 총장과 서지훈 교수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는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동경대뿐만 아니라 해외의 우수 대학들은 공격적으로 인재를 유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내 인재들이 해외로 나가는 사례가 너무 많아요.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인문대는 덜한 편이긴 하지만 방심할 수 없는 일.”

유일한 총장이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가만 듣고 있던 서지훈 교수가 미소를 짓더니 당돌하게 대꾸했다.

“그야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요? 국내 대학에서 우수한 교수와 연구원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는 총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급여는 급여대로, 연구환경은 연구환경대로 좋지 않지요. 대한민국에서 교수가 가지는 소셜 포지션, 혹은 애국심이 아니라면 버티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서지훈 선생!”

이대로 가다간 도를 넘을 것 같아 민영환 교수가 조심스레 주의를 줬지만, 서지훈 교수는 계속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인재를 해외에 뺏기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들의 실력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면 되지요.”

“하하하하! 방심하고 있다가 서 교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군요. 압니다. 나도. 그걸 모르면서 애가 탈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요. 그래서 두 분을 이렇게 모신 거기도 하고.”

“역시 박 선생과 관련된 일입니까?”

유일한 총장은 차를 들이켜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서지훈 교수의 눈가에 흥미가 돌았다. 그가 지체 없이 다시 물었다.

“혹시 박 선생을 우리 학교로 데려오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직 거기까지는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사전 인터뷰라고 해야 할지, 뭐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두 분은 박 선생의 지도교수였으니 말입니다.”

유일한 총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충만한 권위에 마치 거인이 옥좌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일한 총장이 두 팔을 벌리며 뻗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냉정하게 평가해 봅시다. 박민우 선생의 자질은 어떻습니까? 교수나 연구자로서.”

“그건 굳이 저희들이 판단하지 않아도 입증이 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의 소르본에서, 영국의 소아즈에서, 일본의 동경대에서도. 최근에는 어떻습니까? 아부다비의 국빈으로도 초청도 받았지요. 그 밖의 여러 나라와 단체들이 박 선생의 초빙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만 보더라도 어떤 인재인지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팩트니까요.”

서지훈 교수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유일한 총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태도는 신중했다. 이번엔 민영환 교수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민 교수님의 의견은?”

“글쎄요······.”

민영환 교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국문과 내에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교수였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서지훈 교수와는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였다.

과연 그는 민우를 어떻게 평가할까. 서지훈 교수는 내심 흥미진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민영환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박민우 선생을 어느 과로 초빙하시려는 겁니까? 국문과입니까?”

“일단은 그렇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박 선생이 국문과에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만약 데려온다면 그쪽 카드가 더 먹히지 않을지.”

지켜보던 서지훈 교수는 싱겁게 웃었다. 민영환 교수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질을 따지기 전에 우리 대학의 사정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건 아닐지요?”

“대학의 사정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잘 와닿지 않는군요. 구체적으로 부탁합니다.”

“명인대가 설립된 이래로 국문과엔 늘 자대생 출신 교수들이 임용되어 왔습니다. 관습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박 선생은 상아대 출신이지요. 지금까지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요. 그러니까 기존 구성원들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지?”

“예.”

민영환 교수는 짧고 굵게 대답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서지훈 교수는 지루한 표정이었다. 결국 유일한 총장 대신 그가 나섰다.

“논점이 조금 어긋난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총장님께서는 박 선생의 자질을 물었지 임용에 대해 물은 게 아니잖습니까. 자질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실제 초빙에 들어간다고 해도 과정이 복잡하니 그건 나중 문제고요.”

“뭐, 알겠네.”

살짝 무안해진 민영환 교수가 주먹을 말아 쥐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하지만 바로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박 선생의 석사과정 지도교수로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한마디로 박 선생은 못난이였지요.”

“허허, 못난이?”

“석사 입학했을 무렵의 별명은 천덕꾸러기, 낙제생, 3류대 출신이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많은 교수들이 그 친구를 서자 취급했지요. 그건 대학원 선배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우리 국문과는 꽤 배타적이니까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서지훈 교수는 민영환 교수를 가만히 바라보며 듣고만 있었다. 늘 패턴이 보였는데, 지금만큼은 무슨 말을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허물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민영환 교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더군요.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할까. 강철훈 선생의 프로젝트에 참가하더니 새로운 이론을 찾아내서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IAHS에 초청을 받았을 때는 혹시나 했는데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을 때는 진짜 놀랐습니다. 뭐,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요.”

어느새 민영환 교수의 얼굴이 개운해졌다.

곁에 있던 서지훈 교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는 양반이라고.

“학회에서 발표를 할 때도, 논문을 쓸 때도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활약상은 두 손으로 셀 수도 없죠. 한일대와의 경쟁에서도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압도했지요. 그런 박민우 선생의 능력이 집대성된 게 작년에 출간된 <번역의 이론>이라고 봅니다. 동경대와 북경대, 청화대가 인정한 학술서지요. 앞으로도 아시아의 주요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할 것은 자명한 일······.”

잠시 말을 멈춘 민영환 교수는 이어질 말을 다듬었다. 내심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런 표현을 민우에게 사용하게 될 날이 올 줄 알았을까?

아니,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민영환 교수가 입을 열음으로써 그것은 꿈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 되었다.

“박민우 선생은 이미 국내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할 겁니다.”

“뭔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군요. 알겠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이 견해에 동의합니까? 서 교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게 대꾸한 서지훈 교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박 선생이 가진 무서운 점은 화려한 커리어가 아닙니다. 뛰어난 능력도 아니죠. 그렇다면 그게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5년, 아니 10년 뒤에 어떤 괴물로 성장해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그렇다면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인재로군요. 좋습니다. 두 분의 의견은 새겨듣도록 하지요.”

유일한 총장이 마음을 굳힌 듯싶었지만, 뜻밖에도 서지훈 교수가 손바닥을 내밀며 부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박 선생을 데려오는 건 아직 시기상조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예. 아직은 이릅니다. 명인대도, 박 선생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총장은 물론 민영환 교수도 그 이유를 눈빛으로 추궁했다. 곧 서지훈 교수의 입이 열렸다.

* * *

“예? 청문대에 얼마나 있을 거냐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화를 받던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지훈 교수의 의도를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갑작스레 전화하더니 다짜고짜 그렇게 묻기만 했다.

― 말 그대로야. 너 청문대에서 얼마나 오래 교수로 일할 거냐고.

“아직 정교수도 안 됐는데 적어도 일 년 안에 그만둘 일은 없지 않을까요?”

― 그래? 오케이. 알았다. 수고.

“잠깐만요! 끊지 마세요. 왜 그걸 물으시는지 말씀은 해주셔야죠.”

― 젊은 녀석이 뭐가 그리 급해?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다.

서지훈 교수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작은 힌트를 주기로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덧붙여서. 아니, 오히려 힌트보다 그 이야기가 목적이었다.

― 얼마 전에 유일한 총장님을 뵈었는데 말이다. 민영환 선생님하고.

“유일한 총장님이라면······ 명인대 총장이잖아요?”

― 그래. 너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셨는데 민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더군. 네가 이미 국내 수준을 넘어섰다고. 자기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할 거라고. 놀랍지 않냐?

“정말요?”

민우가 잠시 멍해졌다. 곧 정신을 차린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민 선생님 건강이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닐까요? 문병을 가야 하나.”

― 하하하! 녀석도 참. 아무튼 말이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청문대에서 딱 5년만 버티고 있어봐.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

“5년이요?”

― 그래. 그 정도라면 땅을 일구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너에게도. 나에게도.

땅을 일군다. 오히려 수수께끼가 깊어졌다. 비유적인 표현이었으니까.

― 아무튼 괜히 들떠 있지 말고 열심히 해. 다음 달에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한다고 했지? 그것도 철저히 준비하고.

“아, 예. 알겠습니다.”

― 그럼 수고.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전화가 끊겨 버렸다. 민우는 다시 서지훈 교수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민우는 시계를 힐끔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슬슬 결과가 나왔으려나?’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었다. 민우는 전화기를 들고 안지영의 내선번호를 눌렀다. 곧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지영 씨. 교육원 최종 면접 결과 나왔나요?”

― 예. 교수님. 안 그래도 그 건으로 지금 막 전화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방금 원장님께서 결재하셨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 표태진 씨만 합격했어요. 이번 주 중으로 합격사실 통보하고 임용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라고 전할 계획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민우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동시에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떨어진 건가······.’

노유민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최종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한 일이었다. 김한진 원장이 점찍은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내선 번호를 확인하니 한국문화교육원장실 번호였다. 민우가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최종면접 소식은 들었습니까?

“방금 안지영 씨에게 확인했습니다.”

― 그래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원장실에서 좀 봅시다.

“알겠습니다. 원장님.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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