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71화 (271/500)

271화 : < 98장. 또 다른 밀실 회의 (1) >

“잠깐. 잠깐만······ 이거 내 예상에서 상당히 많이 벗어난 물건인데?”

그렇게 중얼거린 서지훈 교수가 잠시 연구계획서에서 눈을 떼고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하지만 민우는 되레 싱긋 웃으며 모른 척했다. 펜을 쥔 채 이렇게 말했다.

“어떤 부분이 이상하셨던 겁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받아 적겠습니다.”

“아니, 뭐라고 할까.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서지훈 교수는 답답한 표정을 하더니 펜으로 머리를 긁었다. 민우도 자주 보지 못하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하던 일이 막혔을 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빈틈투성이인 개요를 들고 와야 하는데 민우가 들고 온 것은 굉장했다.

“제법 신경을 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우와! 살다 보니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 날도 있네요. 감사합니다.”

“하, 나도 이제 끝이군. 새파랗게 어린 제자에게 비아냥을 듣다니.”

“설마요.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잡아 주시면 참고해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루카치의 유물이 손을 대지 못한 개요라고 해도 서지훈 교수의 시선에선 다를 수 있다. 인문학은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니까. 민우는 내심 그가 어떤 조언을 해줄까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괸 서지훈 교수가 손에 쥔 인쇄물로 시선을 내렸다. 눈을 크게 뜨고 봐도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건 개요가 아니라 마치 완성된 목차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 견고하다.’

그는 굳이 입 밖으로 그 생각을 꺼내지 않았다. 심사에 들어가기 전이다. 아직 젊은 제자가 괜히 헛바람이 들까 걱정이 되었던 것.

결국 그는 잠시 휴전을 선언했다. 손에서 박사논문 개요를 놓으며 물었다.

“언제 이렇게 준비를 많이 한 거냐?”

“구상은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구체화된 건 송현우 선생님 선집 편찬 작업할 때고요. 틈틈이 메모도 해놨죠.”

“역시 그런 건가. 아무리 봐도 쉽게 나올 수 있는 물건은 아니라서.”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완전히 납득된 것은 아니지만 아끼는 제자가 공들인 개요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논문 개요는 허술한 게 정상이다. 아직 가설 설정에 불과한 단계니까. 하지만 민우의 개요엔 빈틈이 없었고 서지훈 교수는 그것을 쿨하게 인정했다.

오히려 인정했기에 해줄 수 있는 조언들이 있었다.

“개요는 좋다. 이대로 가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 내가 걱정되는 부분은 여기에 어울리는 내용을 네 손으로 채울 수 있느냐 하는 거야. 사상의 흐름에 따라 문학사를 기술한다는 건 말이야 쉽지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거든.”

“인지하고 있습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살펴봐야 하는 부분이겠죠. 작품 선택에도 어려움이 있을 거고요. 하지만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머릿속에 쓰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차 있거든요.”

“문학사가 아니라 한국사상사를 한 편 쓰겠어.”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닙니까?”

서지훈 교수는 피식 웃었다. 민우의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고 싶다면 해야지. 누가 널 말리겠어? 어차피 나이도 젊고 한두 번 실패한다고 해서 흠이 되지는 않겠지. 정교수 승진이 좀 늦어지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럼 됐군.”

고개를 끄덕인 서지훈 교수는 간단한 소견을 적은 논문 개요를 민우 쪽으로 슥 밀었다. 민우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고 가방에 넣었다.

“그나저나 교육원 건은 잘 풀렸냐? 오늘 1차 면접이라고 한 거 같더만.”

민우는 오늘 있었던 면접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김한진 원장이 추천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떨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흐음. 일이 좀 난감하게 됐네. 감당할 수 있겠어?”

그렇게 물으면서도 서지훈 교수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끝 있는 분은 아니라고 들어서 크게 걱정은 안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서 인원을 선발했으니까요. 원장님도 양해해 주시겠죠.”

“그러면 됐지 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일 봐라. 네 성격상 누구 눈치나 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알겠습니다.”

민우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지훈 교수도 따라 일어났다.

“바로 청문대로 가려고?”

“오랜만에 왔으니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만나고 가려고요. 그럼 다음에 또 인사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마라. 박사논문 내용 조금씩이라도 채워서 들고 와. 박사과정의 마지막 과제라고 생각하고.”

박사과정의 마지막 과제.

민우는 그 표현을 곱씹었다.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고는 서지훈 교수에게 꾸벅 인사했다.

연구실에서 나온 민우는 어디를 들를까 잠시 고민하다 오랜만에 박사 연구실에 들렀다. 마침 강예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따라 연구실이 썰렁하네요. 혼자 계세요?”

“어? 박민우. 네가 여긴 웬일?”

“제가 못 올 곳 왔나요?”

“청문대가 보낸 세작인가.”

민우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 민우의 포지션은 애매했다. 명인대 대학원생이자 청문대 교수였으니까.

대부분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 초빙교수직을 받게 되는 현 세태를 미루어보면 굉장히 희귀한 케이스라고 할만했다.

민우가 대꾸했다.

“농담할 기운 남아있는 거 보니 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논문 순조롭게 풀리고 있나 봐요?”

“그럴 리가 있니. 세상에 순조롭게 풀리는 논문은 없어.”

강예진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과 짙게 드리워진 다크 서클이 그녀의 현재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민우는 의자를 끌어다 그녀 옆에 앉았다.

“잠은 좀 주무세요?”

“아니. 정확히 37시간 48분째 철야 중. 이제 좀 끝이 보이는 거 같아서 쥐어 짜내고 있지.”

“이번 학기에 발표하시게요?”

잠시 고민하던 강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신중하고 치밀하기로 유명한 그녀였다. 그런 결론이 나왔다는 건 박사논문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우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논문 쓰는 것에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자리를 지켰다. 논문은 머리와 손이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거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고 실감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예전의 누구처럼 쓰러집니다.”

“바로 옆에 명인대병원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 너도 그래서 그때 안 죽었잖아.”

“무서운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이해하렴. 이 시기엔 다들 예민해지는 법이거든. 고3때 느꼈던 막연한 괴로움하고는 비교가 안 돼. 뭐, 지금이야 남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아마 너도 그러지 않을까? 지금이야 개요 짜는 수준이라 모르겠지만 말야.”

영악한 미소를 지은 강예진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다 민우에게 아무것도 챙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책상을 뒤졌다.

무수히 많은 복사물과 참고자료가 널려 있었다. 카페인 음료 캔도 마찬가지. 예진은 아직 따지 않은 커피를 민우에게 건넸다.

“신혼 재미는 어때?”

“왜 이러십니까. 아직 결혼 안 했어요.”

“신혼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며. 그럼 신혼 아닌가? 수빈이는 건강하고? 못 본 지 꽤 됐네.”

“예. 아직까지는 별문제 없어요. 병원도 자주 가고 있고요.”

“잘 챙겨줘. 오징어 남편 만난 것도 기구한 운명인데 한 순간의 실수로 인생을 망쳤으니 케어라도 잘 받아야지.”

민우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이만 가겠습니다.”

“아, 뭘 그런 걸로 삐치고 그래? 앉아 봐. 할 얘기가 산더미처럼 많다고.”

두 사람은 한동안 밀린 이야기를 풀며 시간을 보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주된 이야기였다. 그녀는 일찍 자리를 잡은 민우를 부러워했다.

민우는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예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다. 박사논문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강예진 선배가 이렇게 길게 푸념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 푸념에도 끝이 있는 법이다. 강예진은 화제를 돌리더니 민우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결혼을 앞둔 소감 같은 것들을.

“글쎄요. 솔직히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요.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실감이 나겠죠.”

“그래도 적당한 나이에 하니까 좋은 거 아닐까. 요즘은 다들 늦게 하는 편이잖아. 대학원 출신들은 더더욱 그렇고. 너 애 낳고 키워서 나중에 대학 보내도 환갑은 안 되겠네.”

“누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 없으세요?”

“요즘 화장도 안 하고 다니는데 누가 날 쳐다라도 보겠니?”

“누나 박사 따고 나면 소개팅 해드릴게요. 괜찮은 사람 많습니다. 누난 연하 취향이었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나중에. 지금은 남친보다 자료 물어올 사람이 급해.”

“오케이. 그것도 나름 알아보도록 하죠.”

잠시 후 다른 박사 선배들이 들어와 판이 커졌지만, 민우는 다음을 기약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왠지 더 있다간 밤늦게까지 붙잡혀 있을 것 같아서였다.

* * *

다음 날, 명인대 총장실에서 국문과 소속의 두 교수에게 연락이 갔다. 소환 대상은 서지훈 교수와 민영환 교수였다.

두 사람은 대학본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다. 민영환 교수는 인사 대신 불만을 토했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나. 어? 국제어학원에서는 손 떼는 게 좋다고 했잖아?”

그는 냉정히 말했지만 얼굴엔 노기가 잔뜩 껴 있었다. 반면 서지훈 교수의 표정은 쾌활했다. 마치 남의 일을 보듯 여유가 넘쳤다.

서지훈 교수는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더니 느릿하게 뒷짐을 졌다.

“왜 갑자기 국제어학원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총장님께서 다른 이유 때문에 부르시는 걸 수도 있는데 말이죠.”

“안 봐도 뻔하지. 우리 둘을 동시에 부르는 게 그 이유밖에 더 있나? 요즘 너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잖아? 강사진 교체도 심하고. 원장 자리에 앉자마자 피바람이 그치지 않으니······.”

“피바람이라뇨. 더 좋은 표현이 있는데 그런 저속한 단어를 쓰셔야겠습니까. 개혁이라는 단어를 추천 드립니다.”

“말이 좋아 개혁이지. 쯧.”

민영환 교수는 혀를 찼다.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서 멈췄다. 이제 총장실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뚜벅뚜벅 걸었다.

“어쨌든 그 이야기 나오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씀 드려. 앞으로는 더 신중히 일을 추진하겠다고. 알았나?”

“예, 예. 그러지요.”

서지훈 교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럴 마음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총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묵직했다. 몇몇 자기(瓷器)와 함께 정갈하게 꾸며진 총장실엔 명인대의 권위가 스스럼없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왜소한 체격의 노년이 앉아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의 이름은 유일한. 바로 국내 최고의 대학을 이끌고 있는 사내였다. 서지훈 교수와 민영환 교수가 그의 앞에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총장님. 부르셨다기에 이렇게 찾아뵙니다.”

“어서들 오시오. 저기에 앉지.”

그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 소파가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이 함께 자리를 옮기자 곧 따뜻한 차가 나왔다.

유일한 총장이 서지훈 교수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요즘 서 교수의 활약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만.”

“활약이라니요. 하하하. 당치 않습니다. 그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일 뿐이지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송현우 교수가 참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는데······ 서 교수에 대한 칭찬은 늘 빼놓지 않고 했었지요. 그래서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도 국제어학원을 잘 부탁드리지요.”

“저야말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서지훈 교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민영환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그러자 민영환 교수는 혼란에 빠졌다. 총장이 잔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칭찬을 하고 있다. 도대체 자신과 서지훈 교수를 왜 함께 부른 걸까.

곧 유일한 총장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왔었습니다. 거기서 좀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본이라면 동경대 학술교류 행사 건 때문이셨겠군요.”

“맞습니다. 국문과 박사과정에 박민우 선생이라고 있지요?”

“예. 지금 한창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 선생은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서지훈 교수가 정중히 물었고, 유일한 총장이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뭐랄까······ 좀 이야기가 복잡했는데. 여하튼 그쪽에서 박 선생에 대한 초빙 의욕을 보이더군요. 강연도 성공적이었고 내부적인 평가가 무척 좋다고.”

“확실히 박민우 선생은 동경대 문학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미즈 유이토 교수의 낙점을 받기도 했지요. 구체적인 오퍼가 분명 있을 겁니다.”

“어?”

그제야 민영환 교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 자리에 불려온 이유를 짐작한 것이다.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서지훈 교수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민우와 관련이 있었다. 석사과정, 그리고 박사과정 지도교수라는 직함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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