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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70화 (270/500)

270화 : < 97장. 인생 최고의 선물 (3) >

오랜만에 즐거운 자리였다. 실컷 떠들며 먹고 즐겼다. 집들이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밤 11시가 지나서야 두 손님은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배웅을 하고 돌아온 민우는 어질러진 거실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슬슬 정리해야겠네. 청소랑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수빈이 넌 들어가서 좀 쉬어.”

“아녜요. 나도 도울게요.”

“요리하느라 고생했잖아. 뒷일은 나한테 맡기고. 자, 어서.”

민우가 억지로 떠밀자 어쩔 수 없이 수빈은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어 민우는 대부분의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민우는 이불을 수빈의 가슴께까지 덮어 주었다. 그 자상한 손길에 수빈은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집들이는 어땠어요?”

“재미있었지. 결혼도 안 했는데 진짜 결혼한 기분이 들더라.”

“나도요.”

두 사람은 짧게 입맞춤했다. 마음이 통했는지 서로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몸 좀 추스르고 명인대 선후배들 제대로 초대하자. 서지훈 선생님이랑 송승현 실장님도 부르고. 재환이 형이랑 우리 매형도 부르고.”

“민영환 선생님은요?”

뜻밖의 이름에 민우가 당황했다. 수빈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선연(善緣)으로 끝나긴 했지만 아직도 무서운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건······ 좀 더 생각해 보자.”

“그냥 해본 소리예요. 신경 쓰지 마요.”

“왠지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눈 좀 붙여. 불 꺼줄까?”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벽에 달린 스위치를 내렸다.

거실로 돌아와 한 시간 동안 깨끗하게 정리한 민우는 샤워를 하고 잠시 침실을 힐끗거렸다. 여전히 불은 꺼져있었다.

모든 것이 잠든 시각, 민우는 서재로 들어갔다. 노트와 볼펜, 그리고 루카치의 안경과 만년필을 챙기고 책상에 앉았다.

‘이제 슬슬 박사논문 개요를 짜 봐야지. 늦어도 다음 주에는 서지훈 선생님께 보여드려야 하니까.’

민우는 송현우 교수의 선집 작업을 하며 물려받은 지식을 이용해 박사논문을 쓸 계획이었다. 이미 모든 지식은 머릿속에 있었고, 그것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면 되는 작업이었다.

때문에 아무런 레퍼런스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두뇌와 깨끗이 비어있는 노트, 그리고 그것을 옮겨 적을 펜만 필요했다.

‘틈틈이 생각해뒀던 것들을 하나로 이어보자.’

볼펜을 쥔 민우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수많은 지식들이 그의 뇌리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다양한 모양으로 얽히고설키며 덩어리로 굳게 뭉쳤다. 민우는 그것을 그대로 펜으로 옮겼다.

서걱서걱―

민우는 마치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단번에 빈 노트를 꽉 채웠다. 한국현대문학사를 한눈에 개괄하는 멋진 개요가 완성되었다.

민우는 그것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부족하거나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를 확인했는데, 신기하게도 수정할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몇 번 고쳐야 했는데 이상하네. 뭐, 유물을 쓰지 않고 이 정도 결과물이 나왔다면 충분하지.’

서론을 포함한 총 일곱 챕터의 개요가 탄생했다. 얼핏 보기에 그럴듯해 보였으나, 민우는 이 개요가 어딘가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우는 루카치의 안경을 쓰고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이렇게 한다면 자신이 작성한 개요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확실히······.

‘어?’

보이지 않았다.

개요가 적힌 노트에는 푸른색 글씨로 고쳐져야 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안경과 만년필의 힘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멍하니 노트를 내려다보던 민우는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부서진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이상이 있는 부분은 없었다.

이번에는 만년필을 살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설마 능력이 사라진 거야?’

그런 생각에 민우는 다시 안경을 쓰고 노트의 한 구석에 프랑스어로 ‘avant-garde’를 적었다. 전위예술이라는 파란색 글씨와 함께 해석이 허공에 그려졌다.

이번엔 안경을 낀 상태로 외서를 꺼내 읽었다. 외국어가 모조리 한국어로 번역돼 보였다. 안경 쪽도 기능은 멀쩡했다.

‘뭐지?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이야?’

사용 방법을 다시 짚어봤지만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지금까지 교정이나 검토를 할 때 안경과 만년필을 동시에 사용했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민우의 눈이 순간 부릅떠졌다.

‘설마!’

민우는 개요가 써진 노트를 움켜쥐었다. 놀라움으로 가득한 두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루카치의 유품도 고칠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개요를 써낸 거야? 순수하게 내 능력으로?’

그것 외의 다른 추측은 존재하지 않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루카치의 유품이 잘못된 점을 바로잡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만년필을 내려놓은 민우가 두 손을 꽉 쥐었다.

‘좋아. 이 기세로 끝까지 달려보자!’

그때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수빈이었다.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잔을 든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부하고 있었어요?”

“잠깐 논문 개요 짜고 있었어.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

“아녜요. 잠깐 쉴 생각이었는데 깜빡 잠들었네.”

수빈은 잔을 민우의 앞에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민우가 방금 작성한 개요가 담겨 있는 노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개요 치고 좀 긴 것 같네요. 소논문은 아닌 것 같은데.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할 논문이 아닌가봐요?”

“박사논문 개요야. 곧 서지훈 선생님께 보여드려야 하거든.”

“잠깐 읽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민우는 구수한 커피향을 음미하며 여유를 즐겼다. 그 사이 수빈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진지하게 개요를 읽었다.

곧 그녀가 노트를 내려놓았다.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민우는 그제야 개요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와, 이거 흠잡을 데가 없어요. 송현우 선생님의 문학사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느낌? 송 선생님이 시대 구분에 따라 문학사를 서술하셨다면, 이건 사상의 흐름대로 쓴 새로운 문학사네요.”

“그렇지. 정확히 짚었네.”

민우가 여유롭게 대꾸했다. 수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아니, 개요는 이렇게 썼다고 쳐도 내용을 잘 채워 넣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도 해요.”

민우는 대답 대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사람이었으니까.

“하긴. 사람 놀래키는 재주는 나만 있는 게 아니었죠. 오빠도 그쪽으로는 대단하니까.”

“좋아. 명인대 수석 겸 현직 문학평론가에게 극찬을 받았으니 서지훈 선생님께 보여드려도 뒤탈이 없겠네. 땡큐.”

“괜히 으스대지 말고 준비 잘해요. 서지훈 선생님은 클래스가 다른 분이니까.”

“어차피 깨질 거라면 당당히 깨지는 게 나아.”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같은 전공자로서 수빈은 끝없는 장벽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이 없다. 그 장벽에는 자신만 드나들 수 있는 문이 하나 생겼으니까.

“언제 잘 거예요?”

“개요 끝냈으니 이제 자야지.”

“가요. 그럼.”

두 사람이 침대에 누웠다. 수빈은 마치 아기처럼 민우의 품을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민우는 아침 일찍 청문대로 향했다. 평소보다 걸음을 서둘렀다. 오늘은 한국어문학 파트 강사 면접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면접은 민우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면접관은 민우 혼자였다. 서류 심사에 합격한 강사들은 연구실 밖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김한진 원장의 추천을 받은 두 교수가 먼저 면접을 봤다.

‘나쁘지 않은데? 회화도 어느 정도 가능하고 실력도 출중해. 학부 강의를 해도 충분한 사람들이 이쪽에 왜 지원한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민우는 공정하게 점수표를 작성했다. 1번 지원자였던 강유찬에게는 91점을, 2번 지원자였던 표태진에게는 93점을 주었다.

민우는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고 마지막 서류를 집었다. 한일대 출신인 노유민의 서류였다.

“마지막 지원자 들어오라고 해요.”

“예, 교수님.”

면접 지원을 나온 안지영이 노유민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는 덥수룩한 머리에 안경을 낀 전형적인 대학원생 스타일의 남자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민우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노유민이라고 합니다!”

밝고 쾌활한 목소리. 인상도 좋았다. 민우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드릴 겁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평소 생각하신 바를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 예.”

“본 교육원에 지원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강사 자리를 구하고 있다가 우연히 채용 공고를 접했습니다. 그런데 학부가 아니라 국제어학원 같은 곳이더군요. 신기했어요! 보통 국제어학원이면 어학만 가르치잖아요?”

“그렇지요.”

“한국의 언어와 문학만이 아니라 역사까지 가르친다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말 그대로 한국학이라는 개념으로 완성된 느낌? 그런 인상을 받아서 지원하게 됐습니다.”

노유민의 어조는 긴장감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들떠 있었다. 그만큼 기대감이 큰 것이다. 민우는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민우는 생각했다.

‘역시 김한진 원장님의 명분이 통한 건가. 노유민 씨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야. 이거 한 방 먹은 기분인데?’

이렇게 된 이상 아무래도 좋았다. 교육원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민우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형식이었다. 민우는 영어로 물었다.

「 외국인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건 쉽지 않을 텐데요. 어떻게 접근할 계획입니까? 」

「 우선 가르치는 범위를 한정해야 합니다. 」

「 뜻밖의 대답이네요. 」

확실히 앞선 두 지원자와는 다른 대답이었다. 먼저 면접을 본 두 지원자는 쉽고 재미있게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고 대답했었다.

무엇보다 기대가 되었던 것은 노유민의 어조에서 확신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 한국의 역사는 책 한 권으로 서술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죠. 그 어떤 명강사가 와도 이걸 압축해서 가르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입시용 역사과목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요. 그러니 테마를 여러 개 만들어 학생들이 그중에서 듣고 싶은 걸 고르는 방식으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

「 흥미로운 말씀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개설과목이 늘어난다는 부담이 발생할 텐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학생들에겐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좋고, 강사들에겐 시수가 늘어 좋습니다. 교육원에서 결정만 해 주시면 서로 좋은 정책이 되겠죠! 」

노유민이 목소리를 높였고 민우는 내심 수긍했다. 대학은 수백억의 자금이 오가는 곳이다. 강의 시수 몇 개를 늘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민우는 다시 한국어로 물었다.

“영어는 꽤 유창하게 하시는군요. 그런데 영어 말고도 일본어와 중국어를 한다고 하셨는데,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간단한 회화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강의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솔직하시네요.”

“하하하. 남을 속이는 건 취미가 아니라서요. 이것도 학문의 일환인데 거짓은 없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 대답이 민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로 민우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노유민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했다. 민우는 그 점을 높이 샀다.

모든 질문이 끝났다. 민우가 웃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질문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생 많으셨습니다. 노유민 선생님.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하네요.”

“저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노유민은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채점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우가 각 항목에 숫자를 기입했다.

계산기를 두드려 총합을 냈다. 결과는 95점. 지원자들 중 가장 높은 점수였다. 민우는 심사결과표에 간단한 소감을 기입하고 표태진과 노유민 두 사람의 이름을 최종 면접에 올렸다.

‘이걸로 된 걸까?’

민우는 직인을 찍기 전에 심사결과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김한진 원장이 추천했던 강유찬 대신 노유민이 이름을 올렸다. 김한진 원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궁금해졌다.

하지만 공정한 심사였다. 민우는 아무것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직인을 찍었다.

“지영 씨.”

문을 열고 안지영이 들어왔다. 민우는 심사결과표를 결재파일에 껴서 그녀에게 건넸다.

“1차 면접 결과표입니다. 바로 김한진 원장님께 전해 드리도록 하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안지영이 연구실을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힘껏 기지개를 켠 민우는 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박사논문 개요를 들고 서지훈 교수에게 찾아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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