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 < 97장. 인생 최고의 선물 (2) >
민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자 다혜가 가까이 다가왔다.
“밖에 귀신이라도 있어요? 왜 그렇게 멍하니······ 어머. 수빈 씨! 언제 오셨어요? 지금 미국에 계신 거 아니었나?”
“일이 있어서 오늘 귀국했어요. 잘 계셨죠?”
“예. 저야 보시다시피 잘 지냈죠. 보는 사람들마다 얼굴 폈다고 난리예요. 살쪘다고.”
“살 찐 것 같진 않은데. 오히려 우리 박 교수님 밑에서 일하면 살이 빠지지 않아요? 깐깐한 분이니까요. 혹시 교수님이 괴롭히지 않던가요?”
“어휴! 괴롭히긴요. 늘 잘해주셔서 저희가 감사하죠.”
“옆에 있다고 눈치 보실 건 없는데.”
“실은 방금 회식하라고 카드를 받은 입장이라 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안에 있던 희석도 나와서 꾸벅 인사했다. 수빈은 또다시 사모님 소리를 들었다.
“근데 우리 선생님은 왜 이러고 계신담?”
“제가 말도 없이 갑자기 와서 좀 놀란 모양이에요.”
“진짜 말도 안 하고 오셨어요? 완전 서프라이즈 파티네요.”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민우를 향했다. 그제야 민우는 정신을 차렸다.
“아, 진짜 깜짝 놀랐잖아. 하여간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는 참······ 예전 출판기념회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땐 나름 드라마틱했잖아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지 않았어요?”
“드라마의 주인공이라······.”
민우는 <번역의 이론> 출판기념회 때 이수빈이 깜짝 등장했던 그 장면을 떠올렸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때의 감동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확실히 그건 그러네. 아무튼, 어째 인터넷 전화 안 쓰고 톡으로 전화한다 싶었어. 그때 이상한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무리 오빠가 똑똑하다고 해도 거기까진 알기 힘들지.”
“언제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와 보니까 마침 오빠가 연구실로 들어가고 있더라구. 그래서 문 근처에서 전화를 했지. 왠지 오빠라면 전화를 받고 바로 나올 것 같아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어. 잘했죠?”
“그래. 잘했어.”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든든하고 고마웠다.
동시에 기쁨과 미안함 같은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처음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옆에서 가만히 듣기만 하던 다혜가 살짝 끼어들었다.
“저기 두 분. 안으로 들어와서 얘기 나누세요. 복도는 춥잖아요. 제가 커피 다시 준비할게요.”
“아니다. 우리 나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해.”
“그래요. 커피는 다음에 마실게요.”
“옙. 그럼 다녀오세요.”
두 조수가 연구실로 들어갔고, 민우는 문을 닫고 다시 돌아섰다. 여전히 수빈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럼 슬슬 나갈까?”
두 사람은 건물을 나서 청문대 학생회관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방학이라 그런지 넓은 매장이 텅 비어 있었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커피 애호가였던 수빈은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를 위해 카페인 대신 달달한 것을 선택했다.
그 사소한 것 하나가 민우에게 새로운 실감을 전해주었다. 진짜 아빠가 된 거라고.
“집에 들렀다 온 거야?”
“응.”
“그럼 부모님들도 다 아시겠네.”
“대충 이야기는 해 뒀어요. 울 아버지가 아주······.”
의도적으로 말을 줄인 수빈이 생긋 웃으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이어질 말을 맞춰 보라는 그런 의미였다. 민우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화 많이 나셨겠구나.”
“처음엔 좀 놀라셨는데 좋아하시더라구요. 벌써부터 우리 엄마랑 애기 옷 산다고 난리도 아니야. 말리고 오느라 혼났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외의네.”
“어차피 약혼한 거나 다를 바 없으니까요. 내가 계속 미국에 있으니 많이 적적하셨던 거 같기도 하구.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거 같아요.”
“그래도 가서 말씀은 드려야겠다. 이거 마시고 같이 집에 갈까?”
“좋은 생각.”
잠시 말이 끊겼다.
수빈은 음료수를 마시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민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수빈이 고개를 들었다.
곧 수빈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 오빠가 참.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네?”
민우는 흠칫 놀랐다.
“하버드 가면 독심술도 가르쳐 주나?”
“우리 박 교수님 표정이야 딱 봐도 뻔하지.”
“왠지 너 우리 누나 닮아 가는 것 같아. 알아?”
“그런가?”
어려서부터 민아도 늘 그랬다. 표정만 보면 다 써있다고. 그래서 민우는 누나에게만큼은 뭔가를 속이거나 하지 못했다. 애초에 거짓말을 안 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볼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기던 수빈이 하나의 가설을 떠올렸다.
“닮아가는 게 아니라 실은 오빠 때문이 아닐까?”
“나 때문이라고?”
수빈은 민우의 눈을 차분히 응시하며 설명했다.
“오빠는 되게 순수한 사람이거든. 특히 눈이 그래. 계속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오히려 점점 더 맑아지는 느낌?”
“너 나한테 정말 빠졌구나. 중증이네.”
“안타깝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네요~ 진섭 오빠도 그랬고 예린이도 그랬다구.”
“그래? 의외네. 살면서 그런 소리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겠지.”
그때 작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내려보니 수빈의 손이 민우의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아무튼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공부는 충분히 했고, 시야도 많이 넓어졌으니까 난 만족해요. 그깟 수료증 하나 받으려고 버틸 필요는 없잖아요.”
“알았어. 앞으로는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대신 나중에 너 교수되면 교환교수로 꼭 하버드 다시 다녀와. 육아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오빠한테 애기를 믿고 맡길 수 있을까.”
“나 그 정도로 신뢰가 없는 사람인가?”
“다른 의미로요. 오빤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왠지 책에 빠져서 애기 맘마 줄 시간도 놓칠 것 같단 말이지.”
의외로 설득력이 있어 민우는 선뜻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없이 행복한 웃음이었다.
이번엔 민우가 나머지 손으로 수빈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애기 이름은 뭐로 지을까? 엄마 아빠가 그래도 명인대 국문과 박사인데 남부끄럽지 않은 이름으로 하나 지어 줘야하지 않겠어?”
“음, 글쎄요. 한번 가는 길에 같이 고민해 볼까요?”
“그러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주차장으로 가 얼마 전에 새로 구입한 차에 올랐다.
목적지로 가는 와중에 수많은 이름들이 오갔다. 자신의 이름이 좋다며 갑론을박이 펼쳐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했다.
* * *
양가 부모님들께 소식을 모두 전한 민우와 수빈은 결혼식 날짜를 최대한 빨리 앞당겼다.
원래는 학기를 끝내고 서로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한 다음 천천히 날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빨리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날짜는 4월 첫째 주 토요일로 잡혔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결혼을 성공적으로 준비했던 웨딩플래너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신혼여행은 안전을 고려해 가까운 곳으로 다녀오기로 정했다.
여기에 민우의 인맥이 빛을 발했다.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이 결혼 준비에 손을 보탰다. 특히 연주는 대한그룹이 소유한 백제호텔의 최고급 웨딩홀을 대여해 주었다.
자얀도 가만히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수빈의 사정을 들은 그는 동남아 휴양지에 소유하고 있는 고급 호텔의 숙박권을 축전과 함께 보냈다.
하지은도 나섰다. 그녀는 결혼 기념으로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한 번 더 그려주기로 약속했다.
신혼집도 바로 구했다. 민우는 모아 둔 돈으로 서울에 위치한 26평형 아파트를 하나 구입했다. 태어날 아이와 함께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한창 가구를 들여놓고 이제야 사람 사는 곳처럼 꾸며 놓으니 진섭과 예린이 집들이를 왔다.
“흐음. 깨가 쏟아지는 냄새로 가득하군. 부러워. 역시 우리 박 선생은 개척자 정신이 투철하다니까. 뭘 하든 앞서 나가지.”
“비꼬는 거냐?”
“천만에. 부러워서 그런다. 저출산시대를 맞아 국가경쟁력이 저하되는 시점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건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지.”
“뭔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들어와라.”
진섭과 예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준비한 선물을 내려놓은 주예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수빈이는요?”
“잠깐 마트 갔어. 나 참 왜 갑자기 온다고 해서 애 고생시키냐? 집들이는 결혼하고 나서도 안 늦잖아.”
“그래도 우리가 너희 커플의 역사적인 탄생부터 지켜봐왔던 사람들인데 그러면 섭하지. 의리상 제일 먼저 들러서 인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니겠냐? 그나저나 생각보다 집이 괜찮네.”
진섭과 예린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집을 구경했다. 아직 안 들어온 가구가 좀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인테리어가 깔끔했다.
특히 방 하나를 아예 서재로 꾸민 것이 인상적이었다. 벽면을 둘러싼 책장에 각 분야의 책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아무래도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두 사람은 한동안 서재에서 나오지 못했다.
책상도 두 개였다. 그 위에 노트북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민우는 나중에 공동연구처럼 함께 작업할 일이 있을 때 사용할 거라고 설명했다.
“캬! 완전 끝내주네. 로망의 극치라고 해야 하나. 예린아. 우리도 나중에 신혼집 이렇게 꾸밀까?”
“이렇게 코딱지만 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 60평대 아파트로 가야지.”
“60평대면 청소가 좀 힘들지 않을까?”
“가정부 쓰면 돼.”
왠지 듣고 있으니 짜증이 났다. 민우는 그대로 두 사람을 내쫓으려다가 꾹 참았다. 그렇게 두 손님은 집을 모두 둘러보았고, 마침 마트에서 돌아온 수빈은 요리를 계속했다.
“주예린. 놀지 말고 거실에 상 펴고 앉아 있어라.”
“옙.”
곧 수빈이 요리한 것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정석적인 집들이용 음식이었다. 민우는 따로 술을 준비했다.
상차림이 끝나자 진섭이 입을 떡 벌렸다.
“뭐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그냥 대충 밥만 주면 되는데. 이러면 진짜 미안해지는데.”
“안 그래도 불러서 파티하려고 했거든요. 재료가 부족하긴 했는데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해봤어요.”
“역시 일등 신붓감이라니까. 민우 너 복 받은 거다.”
그렇게 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잡담만 나누기에 네 사람은 일적으로도 공통점이 너무 많았다.
“민우 너 청화대 강연 건은 어떻게 됐어?”
“두 주 미뤘어. 여기에서 준비할 게 너무 많아서 그쪽에 연기 요청했는데 다행히 양해해 주더라. 문제는 북경대인데······.”
“북경대? 거기서도 강연 요청 왔어?”
“어마무시하네요. 역시 선배십니다!”
“언젠 코딱지만 한 집이라며?”
“아 그건······ 굳이 말하자면 소설적인 표현이죠!”
“잘해라.”
“넵.”
베이컨말이를 한입에 쏙 넣은 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저서인 <번역의 이론>은 일본에서도 호평이었지만 중국에서는 더했다. 북경대에서도 정중히 강연 요청을 보내온 것.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결혼 준비야 그렇다 쳐도 청문대 한국문화교육원 일 때문에 하루라도 대학을 비울 수가 없었다. 매일 회의가 열렸고, 역사학 강사 채용 건도 마무리를 해야 했다.
“아무튼 북경대 요청은 잠시 보류했다. 그쪽하고 얘기를 더 해봐야 할 것 같아. 아마 교육원 강사 채용 끝나고 나서야 시간이 날 거 같은데.”
“그렇구만. 그나저나 최종면접에 누구 올릴지 결정은 했어?”
“아직. 내일 면접이야.”
“골치 좀 썩겠네. 김한진 원장 견제하려면 둘 중 하나는 떨어트려야 할 텐데.”
진섭과 건배한 민우는 맥주를 한 번에 모두 털어 넣었다. 주예린은 운전을 해야 한다며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민우가 한 템포 늦게 답했다.
“그보다 누가 우리 교육원에 도움이 될까를 먼저 생각해야지. 노유민 그 사람이 좀 신경 쓰이긴 하는데······ 어떤지는 면접에서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야. 아무튼 세 사람 모두 괜찮은 인재라는 건 확실해.”
“원장하고 한판 하려는 거 같았다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한판은 무슨. 역사학 분야를 교차수강으로 처리했으면 깔끔했을 텐데 그러지 않으니까 그랬지. 왠지 그쪽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게 눈에 너무 보이잖아.”
“그런가?”
“싸우려는 게 아니야.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에 대해 지적을 했을 뿐이지. 논문에서 논리적 비약이 보이는 부분을 지적한 것과 같은 이치야.”
“암튼 원장한테 추천 받은 사람 떨어지면 볼만하겠네.”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지.”
그렇게 네 사람은 교육원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