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68화 (268/500)

268화 : < 97장. 인생 최고의 선물 (1)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그 사이 한국어문학 파트에 들어올 새로운 강사 모집이 진행되었다.

민우와 그의 친구들은 커리큘럼 확정과 세부 내용 조율에 더욱 집중했다. 지금도 연구실에 모여 보다 나은 수업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진섭이 전방에 나서서 활약을 펼쳤다.

“본교 학생들하고 교류하는 것도 중요하지. 한국인 친구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반대로 그건 본교 학생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즉, 서로에게 외국어 실력이든 뭐든 도움이 될 기회인 셈이지.”

확실히 경험은 무서웠다. 민우와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실제로 명인대 국제어학원에서 가르칠 때 그런 학생들을 많이 봐 왔어. 강좌 외로 자기의 모국어를 한국인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거나 역으로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이 많았지.”

“나도 지나가다가 전단지를 본 거 같기도 한데. 명인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어?”

“특별히 대학에서 나서서 해주거나 하진 않았어. 대학 인트라넷에 글을 올리거나 게시판에 전단지를 붙이는 게 전부였지. 그러니까 이렇게 소극적으로 하지 말고 학교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중개를 해주자는 거야. 이쪽은 입소문도 중요하니까.”

“좋은 생각이네.”

민우는 진섭의 설명을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교육원의 정규 과목 커리큘럼만 다뤘는데, 학생들의 방과 후 활동에도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추가 논의를 하고 있었다.

물론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교육원장과 각급 임원이 결정된 이상 상급 회의에 올려 논의를 거처야 한다.

그래서 세 사람은 논의에 올리기 위한 기초 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발의 자격이 있는 것은 한국어문학 파트 주임교수인 민우뿐. 그는 메모한 내용을 펜 끝으로 두드리며 되물었다.

“방식에 대해 좀 더 다듬을 필요가 있겠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든지 그런 게 필요한데. 주예린 넌 뭐 좋은 생각 없냐? 아까부터 꿀 먹은 벙어리야.”

“큰일입니다. 머릿속이 하얘진 것 같아요.”

“쯧, 역시 넌 교수보다는 작가 체질인가.”

“그렇게 성급하게 단정하지 마시죠! 아직 내 능력의 10퍼센트밖에 발휘하지 않았다고!”

“무슨 드래곤볼이냐?”

지금은 유명 작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때 교수를 꿈꾸며 명인대 대학원에 들어왔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예린이 눈을 번뜩이며 대들었다.

하지만 민우와 대거리를 한다고 해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결국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항복 선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뻔한 아이디어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그냥 펜팔 사이트처럼 매칭하면 되는 거 아닌가? 게시판 만들거나. 스마트폰 앱도 좋을 거 같고.”

“네이비 지식인에도 있을 법한 뻔한 아이디어 감사드리고요. 주 선생님. 좀 더 쓸모 있는 인재가 되도록 분발하시죠.”

“예······.”

그렇게 구박하면서도 민우는 예린의 아이디어를 빠짐없이 적었다. 지금은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히 다뤄야 할 때니까.

그때 뭔가를 떠올린 진섭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서류 전형 마감이었지? 역사학 강사 후보.”

“맞아. 아마 오늘 내로 최종 후보 리스트가 올라올 거야. 지금쯤 열심히 지영 씨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겠지.”

“왜 네가 직접 안 하고?”

“그 정도는 직원이 해도 돼. 오히려 서류 심사는 이해관계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제 3자가 하는 게 더 정확하거든. 정해진 가이드라인이 있으니까.”

“그런가. 아무튼 어떤 사람들이 뽑힐지 기대되네.”

그때 노크가 들리더니 얼마 전 한국문화교육원 직원으로 채용된 안지영이 들어왔다.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성이었다. 교육원의 사무를 전반적으로 관장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전문성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들. 마침 여기 다 모여 계셨네요.”

“어서 와요.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차였는데 잘됐네요. 서류 전형 심사는 다 끝났습니까?”

“예. 총 세 명이 서류심사에 합격했습니다. 이게 그 결과물이고요.”

이력서가 담긴 파일이 민우의 손에 들어갔다. 안지영은 민우가 지시를 내릴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검토를 마친 민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안지영을 바라보았다.

“결과가 좋네요. 괜찮은 인재들이 뽑힌 것 같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시고요?”

“일이 있으면 따로 말씀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꾸벅 인사한 안지영이 연구실을 나섰다. 진섭과 예린은 전부터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대학원생 같지가 않단 말이야. 레아 씨랑 약간 비슷한 느낌인데?”

“맞아 맞아. 뭔가 커리어우먼 느낌도 나고. 조교들은 보통 학생 티가 나는데 저 사람은 안 그러더라. 깐깐해 보여서.”

“그래서 말 놓기가 좀 힘들지.”

한진섭과 주예린이 저마다 품평을 늘어놓았다. 남은 세 사람의 이력서를 다시 훑어보던 민우는 지나가듯 힌트를 줬다.

“얼핏 듣기로 연주가 그룹에서 데려온 사람이라고 하더라. 평소 교육 사업에 뜻이 있었다고 하던데 상당히 유능하다는 게 중론.”

“허, 어쩐지 초짜 같지 않더라니. 그런데 강사는 누가 뽑혔냐? 김한진 원장이 추천한 사람들도 거기에 있어?”

“왠지 없을 거 같아. 민우 선배가 서류 전형을 만들어서 통쾌하게 선빵을 날렸으니 통과를 못했을지도.”

“아쉽게도 틀렸어.”

그렇게 대꾸한 민우는 이력서 두 개를 팔랑거렸다.

“김한진 원장님이 점찍은 게 바로 이 두 사람이야. 청문대 역사학과 출신이고. 강의 및 연구 경력도 꽤 있지.”

“뭔가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그 두 명이 딱 서류전형을 통과하지? 혹시 중간에서 김한진 원장이 압력 넣은 건 아니겠지.”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의심한 민우도 서류 접수가 끝난 직후에 김한진 원장이 추천한 두 명의 이력서를 평가해 보았다. 그들의 커리어는 합격권이었다.

이 결과로 인해 민우는 김한진 원장에 대한 평가를 조금, 아니 많이 바꾸었다.

‘유희윤 교수와 같은 부류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오히려 한참 위야. 유희윤 교수였다면 함량미달의 교수들을 추천하면서 강짜를 부렸겠지.’

하지만 김한진 원장이 추천한 사람들은 모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솔직히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민우의 생각이 점점 깊어졌다.

‘역사학 커리큘럼 추가의 명분은 물론, 그것을 가르칠 교수들의 실력까지 모두 확보한 거네. 이렇게 된다면 뽑지 않을 수 없게 되겠지.’

민우는 넓은 전장(戰場)을 상상해 보았다.

김한진 원장의 군세가 자신이 세운 방어벽을 너무나도 쉽게 파훼하며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마땅히 계책을 내기 어려웠다. 상대에겐 명분과 실리가 있었으니까.

그제야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조언을 실감했다.

―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꼭대기에 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지.

이어 그는 말했다. 권력을 잡지 않으면 자신이 하려던 이상적인 교수법들이 무너질 수 있다고.

물론 김한진 원장의 개입이 그 정도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서지훈 교수가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했는지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오히려 이 정도로 소소한 사건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교수직이 걸리거나 더 큰 게 걸린 일에서 이랬다면 타격이 컸을 것이다.

‘애초에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승부가 정해져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게임······.’

결말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민우는 빙긋 웃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수없이 겪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해법은 늘 하나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좀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카드가 하나 남았으니까.’

민우는 손에 쥔 이력서 중 김한진 원장의 추천을 받지 못한 나머지 하나의 이력서에 주목했다.

노유민.

그는 한일대 역사학과 출신의 젊은 박사였다.

* * *

회의를 마친 민우는 폴라리스 연구실로 돌아왔다. <인문과학총서> 마무리 작업 때문에 두 조수들은 정신이 없었다.

민우는 고생하는 두 조수들을 위해 직접 빈 잔에 커피를 채워 주었다.

“특별한 이슈는 없었어?”

“배고픈 거 빼고 특별한 건 없어요. 희석이 너는?”

“저도 딱히 없습니다. 오늘은 교직원식당 메뉴가 부실해서 그런지 허기가 지긴 하네요.”

“그래? 오늘 저녁은 빨리 먹어야겠구나.”

몇 마디 더 나누다보니 오늘 저녁 메뉴가 삼겹살로 결정되었다. 조수들의 요구사항은 대부분 들어주었다. 먹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주는 편이다.

민우도 커피 한 잔을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진동음이 들려 확인해 보니 전화가 오고 있었다. 일반 전화가 아니라 톡 어플로 온 무료 전화였다.

‘수빈이네?’

민우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이상했다. 그쪽은 새벽일 텐데.

“또 악몽 꿨어?”

― 아뇨. 내가 무슨 죄인인가. 매번 악몽을 꾸게. 여기서 깜짝 퀴즈! 지금 여기 몇 시게요?

“뭐야 그 시시한 문제는. 새벽 세시 반이잖아.”

― 딩동댕. 역시 우리 오빠밖에 없다니까?

좀 이상했다. 목소리가 자다 깬 것 같진 않았다. 평소처럼 밝고 명랑했다.

“혹시 밤 샜어? 자다 깬 목소리는 아닌데?”

― 안 잤어요.

“왜? 과제 많아서?”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상하네.”

― 그래 보여요?

“엄청.”

전화기 너머로 수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더 궁금해졌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지 않았다.

― 오빠.

“응?”

― 되게 뜬금없는 질문인데, 오빠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녀 계획은?

“아들 하나 딸 하나? 우리 집처럼 사이좋은 남매로 키우고 싶어.”

― 다행이네.

“갑자기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 아들 하나 딸 하나면 어느 쪽을 낳아도 상관없는 거잖아요.

“뭐, 그렇지.”

― 그러니까 다행이라구.

“그래.”

민우는 약간 허탈했다. 새로운 놀림거리인가 싶었다. 아니면 심술을 부리고 싶었던 걸까.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넬까.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뜻밖의 한마디가 들렸다.

― 나 임신했어요.

“······응?”

민우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 오빠가 이제는 아빠가 되었다고 말했어요.

“어어?”

큰 소리를 내며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두 조수들의 미심쩍은 시선이 느껴졌다. 민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 어떻게 된 건지는 오빠도 잘 알잖아요.

“아, 하긴. 그러네. 아니, 지금 이렇게 시시한 말을 할 때가 아니지. 언제 알았어?”

― 며칠 안 됐어요. 요즘 식욕이 워낙 좋아서 혹시나 했는데······.

수빈은 경위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들어보니 병원에서 확인도 받은 모양이었다. 민우는 머리로는 걱정이 되면서도 이상하게도 마음은 설렜다.

아버지가 된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미안해. 시기가 안 좋게 됐네. 유학 중이기도 한데.”

― 왜 오빠가 사과를 해요? 나는 축하받을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 바보야.

진짜 바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변화라도 잘 알아챌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것을 놓치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서 계속 공부하기는 어렵겠지?”

― 아무래도 그럴 거 같아요. 불안하기도 하고. 공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우리의 미래가 생겼는데.

“일단 무리하지 말고 좀 쉬고 있어. 바로 데리러 갈 테니까.”

― 바쁜데 와도 돼요? 교육원 일 때문에 정신없잖아.

“바보는 맞는데 뭐가 더 중요한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

― 조금 감동했어요.

아마 조금은 아닐 터다. 싱긋 웃은 민우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의논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내가 아빠가 됐다고?’

흘러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붕 뜬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마치 날아갈 것 같았다.

바로 레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편을 알아봐 달라고 전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수빈이 부모님께 먼저 말씀을 드리고······.’

외투를 걸친 민우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다혜에게 쥐어주었다.

“오늘은 너희들끼리 먹어라.”

“무슨 일 있으세요? 뭔가 심각한 전화 같던데.”

“나중에 얘기해 줄게. 나쁜 일은 아니야.”

“그럼 좋은 일입니까?”

희석이 대담하게 물었고 민우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다혜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기념으로 2차 가도 되죠?”

“마음대로 해.”

“앗싸!”

“3차는 안 된다.”

전달 사항을 모두 전한 민우는 연구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놀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미국에 있어야 할 수빈이 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울 오빠 이런 표정은 또 오랜만이네. 이런 건 역시 사진으로 남겨야지. 자, 찍을게요?”

수빈이 셔터 아이콘을 꾹 눌렀다.

찰칵!

민우의 얼빠진 표정이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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