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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67화 (267/500)

267화 : < 96장. 한국문화교육원 (5) >

막연한 걱정과 우려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민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애쓴 흔적이 보인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좋은 평가를 내렸다. 무엇보다도 김한진 교수가 제기한 것은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었다. 단지 무언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겉과 속이 다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민우의 눈이 깜빡였다. 동시에 그는 추측을 그만두었다. 지금 나온 정보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정중히 청했다.

“원장님. 감이 잘 안 오네요. 아무래도 제 경험이 부족한 탓이 큰 것 같습니다.”

“경험이야 뭐 시간 문제 아닌가.”

“어떤 부분이 부족하셨는지 알려주시면 귀담아 듣겠습니다.”

헛기침을 한 김한진 교수가 몸을 앞으로 슬쩍 내밀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다른 거는 잘 모르겠군요. 문학이니 번역이니 하는 것들은 오히려 나보다 박 교수가 더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여기에 카테고리를 좀 더 추가해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카테고리라 하시면······.”

“한국문화교육원은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전수하는 곳이지. 그런 취지에 있다면 당연히 한국의 역사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소? 역사 없이는 그 나라의 문화를 논할 수 없는 법.”

그제야 답이 선명해졌다.

민우가 물었다.

“그러니까 역사학 과목을 추가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지요.”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교양 과목으로 역사를 가르칠 수 있다면 좋은 선례가 되겠네요. 우리와 비슷한 어학원에서는 언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정도니까 말입니다. 한국어문학 파트에 역사 강의가 추가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학이 될 수도 있겠네요.”

김한진 교수는 찻잔을 민우 쪽으로 건배하듯 내밀었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한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였다. 한국 역사에 흥미를 가진 외국인 학생도 분명 있을 것이고, 대외적으로도 좋은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우는 그 이면에 숨겨진 김한진 교수의 수를 읽었다.

‘이건 딜이야. 김한진 교수님의 소속은 역사학과니까.’

동시에 몇몇 이해관계가 얽힌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은밀히 찾아와 청탁을 하는 모습. 말 잘 듣는 제자들에게만 기회를 주려는 모습.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힌 다양한 인맥들까지.

물론 반대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갈 곳 없는 제자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밥줄이 걸린 문제.’

한국문화교육원에서 역사학 관련 강의를 신설하면 그만큼의 강사 자리가 나게 되니 수익 여부를 떠나 벌써 이권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말입니다.”

민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한진 교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희가 기획하고 있는 것은 어문학에 중점을 둔 과정입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때지요. 즉, 역사학까지 들어가게 되면 울타리가 너무 넓어진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협동과정으로 역사학과 학부 강의를 듣게 하는 건 어떨까요?”

“학부 강의라······.”

“본교의 교차수강 옵션이라면 분명 메리트가 있으니 입학 지원자들의 수도 늘어날 겁니다. 소정 조건을 충족한 사람들은 수료증을 지급하는 것도 방법이지요. 그쪽으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민우의 깔끔한 정리에 김한진 교수는 잠시 주저했다. 예상 외의 반론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교차수강은 행정상 복잡한 일이지. 역사학과 교수들이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원장님께서는 역사학과 교수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별개의 문제지요.”

그 한마디로 민우는 김한진 교수의 ‘전형성’을 파악했다. 차분하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도 상아대의 유희윤 교수와 다를 게 없었다.

민우는 그런 모습을 관찰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피가 끓었다.

학문적인 피는 부모님이 아니라 서지훈 교수에게 이어받았고, 불합리에 당당히 맞서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별개의 문제라고 보이진 않는 건 제 착각일까요. 역사학과 교수이신 원장님께서 직접 역사학 과목의 필요성을 논하셨는데 청문대 역사학과의 행정상 문제에서 어려움을 표하시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강사 추천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는 곳이 바로 역사학과 아닙니까?”

말해버렸다.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단번에.

“가만. 잠깐만. 지금 뭐라고······.”

“역사학과에서 쉽게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장님께서는 역사학과에서 가장 연공서열이 높으시기 때문이죠. 문사철 관련 학과의 전통 아닙니까? 연공으로 움직이는 곳.”

잠시 말이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웃고 있는 사람은 민우 쪽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진실은 이렇습니다. 실은 원장님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

김한진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민우의 박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민우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허리를 바르게 펴고 표정을 풀었다.

“좋습니다. 원장님의 제안은 수용하겠습니다.”

의외의 결론이었다.

김한진 교수도 깜짝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그가 되물었다.

“정말 수용하겠다는 거요?”

“대신 영어 등의 외국어 강의가 가능한 분을 우선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점은 양해해 주십시오.”

“그건 납득하기 어려운데요. 한국에 유학 온 학생들이 모국어로 수업을 들을 필요가 뭐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다 쉽게 전파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학생들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거기 주예린 선생도 영어 강의는 불가능하지 않나?”

바로 찌르고 들어오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조사를 한 느낌이었다. 민우는 여유롭게 웃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알려드려야겠군요. 주 선생의 작품 <세계수>를 아십니까?”

“모른다면 거짓말이겠지.”

“북미대륙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이지요. 그렇다면 교육원에 찾아오는 학생들이 주 선생 수업 시간에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요?”

팔짱을 낀 김한진 교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민우는 책을 펼쳐 사인을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까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북미 도서 포털에서는 주 선생이 강의를 맡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너도 나도 강의를 듣겠다고 댓글이 달리기도 했었지요.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강사라면 굳이 어학 실력 같은 건 필요 없겠죠. 주 선생과 한 마디라도 더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한국어를 배울 테니까요.”

마지막 말을 강조한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며 마무리했다.

“아무튼 한국어문학 파트 연구실에 자리를 두 개 더 마련해 놓겠습니다. 모쪼록 좋은 분들을 추천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하고 원장실을 나섰다. 빈자리를 한참이나 응시하던 김한진 교수는 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뜨거운 찻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과연 거물이라 이건가. 생각보다 길들이긴 쉽지 않겠는데? 겉과 속이 다르다······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칼을 품고 있었군.”

새파랗게 젊은 교수가 철저히 논리로 무장한 채 싸움을 걸어왔다. 이런 흥분은 대학원 시절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박민우 교수. 자네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

사실 민우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김한진 교수가 유희윤 교수와 비슷한 건 맞지만 그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권력을 가진 누군가를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어 아첨하지 않았다. 연구실에 앉아 민우가 가진 약점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똑. 똑.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 * *

민우는 즉시 한국어문학 파트 연구실로 돌아왔다. 커리큘럼의 세부 내용을 조율하던 진섭과 예린이 펜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잘 됐냐?”

“어땠어요? 설마 퇴짜? 오랜만에 제 유행어인 ‘큰일입니다’ 한 번 할 타이밍인가요.”

“그게 좀 애매하게 됐다.”

두 커플의 입에서 동시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질문이 나왔다. 한숨을 내쉰 민우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5분만. 딱 5분만 쉬고 이야기하자. 죽을 거 같아. 진이 다 빠졌다고.”

외투를 벗고 넥타이를 푸른 민우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잠깐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도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채 5분을 채우기도 전에 민우는 허리를 펴고 앉아야 했다. 궁금증에 못 이기는 두 사람의 눈빛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일단 우리 커리큘럼은 통과됐어. 원장님도 좋게 평가를 해 주셨다.”

“그런데 뭐가 애매하다는 거예요?”

“말 좀 끊지 마.”

“죄송.”

“오히려 커리큘럼을 축소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나를 추가하시더라고. 역사학 강의를 넣자고 하시네.”

두 사람이 흠칫 놀랐다. 그중 한진섭이 심경을 표했다.

“역사학? 뭐냐 그 뜬금포는.”

“명분이 없는 건 아냐. 우리 교육원 설립 취지를 생각해 보면. 문화와 역사는 뗄 수 없는 관계니까 과목으로 다룬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듣고 보니 그러네요. 취지도 좋잖아요? 우리나라를 더 알릴 수 있는 기회니까.”

여기에 모인 세 사람 모두 현대소설을 전공하는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소설을 이야기할 때 그 시대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상이란 하나의 역사다.

역사학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지 문학 강의에서도 역사는 이미 다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두 커플은 딱히 반론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수용한다고 했지. 대신 외국어 잘하는 사람으로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응? 그렇게 되면 우리한테도 불리하잖아. 예린이는 영어 못 하는데?”

민우는 김한진 교수가 제기한 문제와 논파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주예린은 두 손을 꼭 쥐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기세였고, 진섭은 엄지를 척 들었다.

“역시 국문과 교수는 다르구만!”

“아무튼 신규 강사 채용을 위해 자리 두 개 더 만들어야 한다는 게 오늘의 결론이다. 생각 난 김에 조교한테 이야기 해 둬야겠네.”

“뭔가 시시한데.”

진섭은 기지개를 켜며 투덜거렸다.

“명인대 국제어학원처럼 피바람이 불기라도 원한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뭔가 묘하게 일이 쉽게 풀리는 거 같은 기분이라서. 결국엔 둘 다 모두 해피한 거잖아? 우리는 커리큘럼대로 수업 진행하고, 그쪽은 과목 추가하고.”

민우는 창가에 있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진섭의 말이 맞다. 이대로 끝나기엔 무언가 시시하다.

민우가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할 무렵 진섭이 물었다.

“강사 선발은 네가 해?”

“일단은 한국어문학 파트 주임교수니까 내가 해야지. 뭐 최종 면접은 원장님이 하시겠지만.”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생각이냐?”

민우는 오른손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그리고 토끼 귀처럼 끄덕거렸다.

“실력과 열정. 딱 두 개만 볼 거다.”

그때 노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연주였다. 소식을 들었는지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한국어문학 파트에서 역사학 강사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빠르네. 벌써 이야기가 거기까지 간 거야?”

민우는 김한진 교수와 나눴던 이야기를 정리해 주었다. 연주의 표정에 더욱 근심이 서렸다.

“김한진 처장님이라면 잘 해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래에 보기 드문 이권사업이야.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을 수는 없겠지.”

“제가 한번 얘기를 해 볼게요.”

“그만 둬.”

돌아서려던 연주가 깜짝 놀라 몸을 돌이켰다. 어느새 일어선 민우는 커튼을 걷고 바깥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네가 나설 이유는 없잖아. 원장이 정해진 이상 네 손을 떠난 일이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상아대에서 있었던 일이 반복되는 건 원하지 않아요. 이러다 오빠가 여기서도 나가게 되면······.”

“그럴 일은 없다.”

민우의 어조는 단호했다. 이 이상의 이론(異論)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이.

창을 등지고 돌아선 민우는 진섭과 예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액자도. 그 속엔 환하게 웃고 있는 수빈의 모습이 있었다.

“상아대에서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든든한 친구들이 함께 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켜보기나 해. 꽤 재미있는 구경이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한 민우는 액자를 한번 쓸어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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